•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왜구

왜구

굶주린 왜적들, 한반도와 중국을 약탈하다

1360년(공민왕 9)

왜구 대표 이미지

『삼강행실도』에 묘사된 왜구

한국고전원문자료관(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및 연원

왜구란 글자 그대로 풀면 ‘왜(倭)가 도적질한다(寇)’ 혹은 ‘왜 도적’이라는 의미이다. 사료에서는 왜인들의 해적 행위를 뜻하는 명사로 사용되곤 하였다. 이러한 왜구로 인한 우리나라의 피해는 삼국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곳곳에 왜적이 침입한 기사가 보이며 「광개토대왕비문(廣開土大王碑文)」에서도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한반도의 피해 상황을 짐작케 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왜구와 관련한 기록은 1223년(고종 10) 5월에 왜구가 금주(金州)를 침입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이때를 시작으로 한 왜구 침입 기사는 1265년(원종 7) 7월의 침입 기사까지 11회 정도가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이후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는 1350년(충정왕 2) 이전까지는 충렬왕대와 충숙왕대 2~3차례 정도 왜구 침입 기사가 보일 뿐으로, 그 피해 규모도 경미한 수준이었다. 이렇게 왜구가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이전 시기의 왜구를 ‘13세기 왜구’라 하기도 한다.

2 경인년(1350) 이후 왜구의 창궐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하고 그로 인한 피해가 커지기 시작하는 것은 1350년(충정왕 2)부터이다. 고성, 죽말, 거제 등 남부의 해안지역을 침입한 왜구와 관련한 기록들은 대개 우리나라에 왜구가 침입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고종 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있었음에도 여러 기록들에서 1350년, 즉 경인년부터 왜구가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때의 왜구 침략으로 인한 피해가 컸으며 또 이후 계속적으로 왜구의 침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 왜구 창궐의 배경은 당시 일본의 상황과 동아시아 정세 두 가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당시 일본에서는 북조(北朝)와 남조(南朝) 두 개의 정권이 탄생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1336년에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을 축출하고 새로 고메이(光明) 천황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막부를 열어 쇼군을 칭했다. 이를 북조라 부른다. 한편 쫒겨난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으로 밀려나 남조를 열고 북조와 대립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남조 변방의 주민들 일부가 해적 활동에 나섰는데, 이들이 당시 고려에 침입한 왜구와 관련된다. 또한 군량미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직적으로 남조 휘하의 세력이 한반도를 침범한 것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왜구의 근거지는 막부의 통제력이 약한 변방으로, 삼도(三島), 즉 세 개의 섬으로 보고 있다. 이 세 개의 섬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대마도(對馬島), 일기도(壹岐島), 송포도(松浦島)의 세 개 섬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시기 왜구 창궐에는 몽골의 세력이 약화되어가고 있던 동아시아 정세도 한 가지 배경이 되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한인 군웅들에 의한 반란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몽골, 즉 원(元)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1367년에는 명(明)이 원의 수도인 대도(大都)를 점령했다. 하지만 몽골은 근거지를 막북 지역으로 옮겨 북원을 세웠다. 명은 긴 북원과의 경쟁으로 왜구 문제에 집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려 역시 몽골에 복속되었던 이른바 원간섭기 동안 자체적인 군사력을 갖추기 어려운 가운데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한 이후로는 그나마 갖고 있던 군사력을 새롭게 국경이 된 북방 지역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구 방어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 1350년(충정왕 2)의 왜구 침입을 기점으로 왜구의 고려 침략은 점점 그 규모와 빈도가 높아졌다. 이후 고려 말까지의 42년 동안 506회, 연 평균 12회 정도의 왜구 침입 기록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왜구의 침입이 가장 많았던 우왕 대에는 재위 14년 동안 왜구의 침입 기록이 378회에 이를 정도였다. 이 시기 왜구는 이전 시기 왜구가 주로 금주(金州) 관내의 연해 지역에 출몰했던 것에 비해 이제 그 침입 지역이 전국의 연해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1352년(공민왕 1)에는 왜구들이 개경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북쪽으로부터의 홍건적의 침입까지 있게 되면서 1360년(공민왕 9)에 공민왕은 잠시 백악(장단)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철원이나 충주와 같은 내륙으로의 천도가 논의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후 공민왕대 후반 이후부터는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연해지방에만 그치지 않고 내륙까지 그 활동범위가 넓어졌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보이지 않던 기병(騎兵)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등, 그 전술 면에서도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그에 따른 전술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은 왜구들이 고려를 침략한 목적과 관련된다. 이 시기 왜구의 고려 침략은 정치적 혹은 문화적 목적보다는 경제적 목적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수차례 고려를 침입했으나 한 지역을 점거하여 거점을 구축한 일은 없어 임진왜란 당시 왜성을 쌓았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에 이들은 주로 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양곡을 저장한 창고, 특히 해안 지방의 조창(漕倉) 등을 약탈했다. 그런데 이렇게 왜구로 인해 고려의 연해 지역에서 미곡의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였고, 조운이 어렵게 됨에 따라 조세의 운반은 육지를 통해 진행되었다. 왜구들은 기존과 같이 해안지방이나 조운선의 약탈만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이에 1370년대에 이르면 왜구들의 활동 범위가 내륙지방으로 확대되고 그에 따른 전술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왜구의 규모는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침략 기록에 나타난 왜구의 선박수를 보면 적을 때는 20척, 많을 때는 400척으로 나타나고 있다. 각 배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며 어느 정도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1512년(중종 7)에 조선과 대마도 사이에 맺어진 임신약조(壬申約條)을 보면 배의 크기를 셋으로 나누고 선원 수를 각 40명, 30명, 20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참고가 된다. 이를 통해 한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을 최소로 보더라도 고려 말 고려를 침략한 왜구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왜구를 단순한 오합지졸의 해적 무리가 아닌, 그들 근거지의 유력한 토호에 의해 조종되는 세력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의 왜구가 빈번하게 고려를 침략함으로 해서 그 피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우선 경제적인 피해로는 왜구로 인한 국가 재정 위기를 들 수 있다. 왜구의 약탈로 민생이 어려워져 세금을 감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고, 또한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선과 조세를 보관하던 조창이 약탈당하게 되면서 국가 재정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다. 조운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조세를 육지로 운송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국가 재정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왜구의 침략은 사회적으로도 불안과 혼란을 조장했다. 경제적 약탈 이외에도 이들은 침략 때마다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또 포로로 잡아갔다. 조운선과 조창뿐 아니라 일반 민가를 불태우고 파괴하여 공민왕대 후반에는 그 피해 때문에 사람들이 “해안 50리 혹은 30, 40리 떨어진 곳에서야 살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또한 왜구가 수도인 개경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개경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왕이 다른 지역으로 잠시 옮겨가고 천도가 논의되는 상황은 조정과 민심을 불안하게 했다.

한편 이렇게 왜구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지자 공민왕대 후반 이후에는 고려인이면서 왜구인 것처럼 가장하여 도적질을 하는 이른바 ‘가왜(假倭)’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예컨대 1382년(우왕 8)에 화척(禾尺)들이 왜구를 가장해 관가와 민가를 도적질했는데 이 때 포획한 수가 남녀 50여 명에 말 200필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왜로 인한 피해는 주로 교주도, 강릉도의 양수척[화척](楊水尺)과 재인(才人)들의 집단 거주지 인근에서 발생하였다. 이는 가왜의 신분이 대개 화적, 재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 지역이 비교적 왜구의 출몰이 적어 치안이 덜 이루어지는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3 왜구에 대한 대책

왜구의 침입과 그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고려 조정의 대책은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사신 파견을 통한 교섭이다. 고종 대에는 1223년(고종 10) 이래로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227년(고종 14)에 박인(朴寅)을 보내 왜구를 금지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 왜구의 침략이 본격화하는 1350년(충정왕 2) 이후인 1366년(공민왕 15) 11월에 김일(金逸)을 보내 왜구를 금해 줄 것을 청했고, 이에 일본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은 왜구를 근절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는 막부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약속이 어느 정도 효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에의 사절 파견은 이후에도 이어져 우왕대 초반에도 나흥유(羅興儒), 정몽주(鄭夢周), 이자용(李子庸)과 한국주(韓國柱) 등을 보내 왜구 금지를 청하는 교섭을 진행했다.

고려 조정의 왜구에 대한 대책의 또 다른 한 가지는 군사적 대응이다. 이는 다시 토벌과 군사체제의 강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왜구 토벌로는 1376년(우왕 2)에 최영(崔瑩)이 주도한 홍산대첩(鴻山大捷), 1380년에 나세(羅世)와 최무선(崔茂宣), 심덕부(沈德符) 등이 화포를 이용해 대승을 거둔 진포(鎭浦) 전투, 이때의 왜구들이 이듬해 내륙에 들어온 것을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변안열(邊安烈)등이 물리친 황산대첩(荒山大捷)이 있다. 진포 전투와 황산대첩은 이를 계기로 왜구의 침입이 약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화약, 화포, 화전(火箭)과 같은 새로운 병기를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한편 바다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투로는 1383년(우왕 9)에 정지(鄭地)가 이끈 고려의 수군이 경상도 연해를 침략하던 왜구를 관음포(觀音浦)에서 크게 물리친 남해대첩이 있다. 이 싸움으로 왜선 17척이 불타고 2,000여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이 관음포 전투(觀音浦戰鬪)에서의 승리로 고려군의 사기가 높아졌고, 왜구의 세력을 크게 꺾을 수 있었다. 이어 1389년(공양왕 1)에는 당시 경상도 원수였던 박위(朴葳)가 병선 100여 척을 이끌고 왜구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인 대마도를 정벌해 왜선 300척을 불태우고 포로로 잡혀 갔던 고려인 100여 명을 데리고 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토벌에 더해 고려에서는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무력화한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통해 왜구에 대응하기도 했다. 공민왕대에는 연해지방의 방어를 위해 진수군(鎭戍軍)을 증설하고 수자리를 설치했다. 수군의 군사력을 배양할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공민왕대 말에는 수군을 재건하는 방침이 정해져 기선군(騎船軍)이 설치되었다.

군사조직의 정비 및 강화뿐 아니라 새로운 병기로서 화약, 화기 등의 개발과 제조를 위한 노력도 있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최무선은 화약제조에 성공하여 1378년(우왕 4)에는 화약과 화기를 이용하는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㷁放射軍)이 편성되기도 했다.

4 조선 건국 이후의 왜구

고려 말에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과 그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 줄어들기는 했으나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피해는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근심이 왜구만한 것이 없다.”라 할 정도였다. 이에 조선 초에도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고 조선으로 귀화하는 왜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회유책을 썼다. 한편으로는 왜구 토벌과 변경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조선 시대에 들어와 고려 시대 왜구 방어책과 비교해 보다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 회유책이다. 이로 인해 조선 초에는 평화적인 사절 왕래와 조선에 귀화해 오는 왜인들이 증가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특히 부족한 물자의 교역을 위해 오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에 조선에서는 이들을 위해 항구를 열어 교역을 자유롭게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태종대에 부산포(釜山浦), 내이포(乃而浦), 염포(鹽浦), 가배량(加背梁)의 4개 포를 열었으며, 세종대에도 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3포(三浦)를 개항해 왜관(倭館)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는 상황에서 1396년(태조 5)에 이어 1419년(세종 1)에 이종무(李從茂) 등이 이끄는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왕래를 금할 경우 왜구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곧 통교를 허락하는 등 정벌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이러한 조선의 왜구에 대한 회유책은 삼포왜란(三浦倭亂) 등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까지 계속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