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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

1126년(인종 4)

1 개요

고려 인종[고려](仁宗) 4년인 1126년에 발생한 이자겸(李資謙)의 난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이 왕위 찬탈을 시도했던 사건이다. 이자겸의 사돈이자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쳤던 무장 척준경(拓俊京)이 깊이 관여하였기 때문에 이척(李拓)의 난으로 명명되기도 하는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탐욕만으로 불거진 모반이 아니었다. 이는 왕실을 중심으로 공조관계를 유지해오던 문벌사회가 인종대를 기점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실제로 고려 문벌사회는 이자겸의 난을 시작으로 묘청의 난(妙淸-亂), 무신정변(武臣政變)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잇달아 경험하는 과정에서 힘을 잃고 붕괴되어 버린다.

2 고려 시대 경원 이씨 가문의 성장

이자겸은 고려 전기 대표적 문벌인 경원(慶源) 이씨 집안 출신이었다. 본래 고려 건국 초 경원 이씨는 현 인천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온 호족세력이었다. 고려 시대 인천의 지명이 인주(仁州)였기 때문에 인주 이씨로 불리기도 하였던 이 세력은 신라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경원 이씨의 연원에 대하여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선조가 신라 대관(大官)이었는데,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니 천자가 가상하게 여겨 이(李)라는 성씨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을 전한다.

경원 이씨는 현종[고려](顯宗)의 왕비를 배출하면서 고려 정치사 전면에 등장하였다. 현종은 김은부(金殷傅)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김은부는 현종 초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를 지내던 인물이었는데, 거란과의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오자 예를 갖추어 그를 대접하였다. 당시 호종하는 신하들이 변변치 않아 끼니조차 마련하기 힘들었던 비참한 상황에서 현종은 김은부가 보여준 충성스러운 모습을 높이 평가하였다. 개경으로 돌아온 그는 김은부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그의 맏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은부의 다른 두 딸들 또한 아내로 삼았는데, 이들이 바로 원성왕후(元成王后)·원혜태후(元惠太后)·원평왕후(元平王后)이다. 그리고 이 왕비들을 낳은 김은부의 부인이 바로 경원 이씨 집안의 이허겸(李許謙)의 딸이었다.

태조 이래로 근친혼을 위주로 하며 왕실에 편입되는 대상의 확대를 방지하였던 고려에서 새로이 왕실의 통혼권 안으로 편입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중앙 정계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지 않은 인물의 여식이 왕비로 들어가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현종 또한 왕실의 관행을 따라 이미 성종[고려](成宗)의 딸 두 명을 아내로 맞이한 상태였다. 하지만 거란과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겪으면서 그는 혼인을 통해 새로운 세력과 결합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는 김은부와 이허겸 모두에게 지위 상승으로 직결되는 결정적 기회로 작용하였다.

1022년(현종 13)에 김은부와 그의 선조들에 대한 추증이 이루어지자 이허겸 또한 왕비의 외조부라는 이유로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 卲城縣開國侯)에 봉해졌다. 이후 원성왕후가 현종의 후사로 덕종[고려](德宗)·정종[고려](靖宗)을, 원혜왕후가 문종[고려](文宗)을 낳자 이허겸의 가문은 왕실의 외척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며 ‘경원 이태후(李太后)의 가문’으로 거듭난다. 문종은 이모인 원성왕후의 딸이자 이복누이였던 인평왕후(仁平王后)를 제1비로 맞아들임과 동시에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李子淵)에게서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를 들였다.

어머니 쪽으로 이어지는 친속(親屬)을 따라 배타적인 혼인망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 대에도 비슷한 경향성이 나타났다. 문종 사후에는 인예태후가 낳은 아들들인 순종(順宗)·선종[고려](宣宗)·숙종[고려](肅宗)이 즉위했는데, 이 가운데 숙종을 제외한 나머지 두 왕들 또한 이자연의 가문에서 왕비를 얻었다. 당시 이자연에게는 이호(李顥)·이석(李碩)·이정(李頲)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이 각각 한 명의 딸을 왕실에 납비(納妃)함으로써 이호의 딸은 순종의 비인 장경궁주(長慶宮主)로, 이석과 이정의 딸들은 각각 선종의 비인 사숙태후(思肅太后)와 원신궁주(元信宮主)로 간택되었다.

3 이자겸의 정치적 성장과 왕실과의 통혼

이자겸은 이호의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이자연 이후로 고모·누이를 비롯한 수많은 가문 내 여성들이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젊은 시절 그는 정치적으로 불우했다. 우선 이자겸의 누이 장경궁주가 순종 사후 노비와 간통한 죄로 궁에서 쫓겨나자 이자겸은 이 일에 연좌되어 관직을 빼앗겼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고려에서 지배층 여성, 더군다나 선왕(先王)의 정비(正妃)가 천한 노비와 관계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이자겸이 활동하던 숙종 시기에 이자연 가문과 국왕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선종의 아들 헌종[고려](獻宗)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유약하고 병이 있어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 사숙태후는 사촌인 원신궁주 및 이자의(李資義)와 모의하여 원신궁주의 아들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을 후사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선종의 동생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가 정변을 일으켜 이자의와 그의 당여(黨與), 즉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숙종이었다. 그로부터 이자연 가문은 숙종의 시각에서 볼 때 외가이면서 동시에 정적(政敵)인 미묘한 위치에 놓이게 되어 국왕으로부터 이전과 같은 절대적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숙종이 이전의 관행과 달리 외가, 즉 이자연 가문에서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이를 근거로 양자의 냉랭한 관계를 추론해왔다.

이자겸의 정치적 인생은 그의 둘째딸이 예종[고려](睿宗)의 왕비가 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훗날 문경태후(文敬太后)라 불리게 되는 이자겸의 차녀는 1109년(예종 4)에 인종(仁宗)을 낳아 정비(正妃)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를 계기로 이자겸의 지위는 급격히 높아진다. 그는 재상의 반열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임명되었을 뿐 아니라 익성공신(翼聖功臣)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1122년에 예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태자가 아직 어리다는 것을 빌미로 예종의 동생들은 호시탐탐 왕이 될 기회를 엿보았다. 이에 이자겸은 우호관계에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태자를 추대하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어렵게 즉위하게 된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직후 이자겸을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그에게 의존하였다. 이제 이자겸의 위세는 감히 어느 누구도 겨룰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인종 초기 정국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인종이 즉위하고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모반을 꾀한다는 명목으로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왕보(王俌)와 한안인(韓安仁) 세력이 축출되었다.

경쟁 세력을 모두 제거한 이자겸은 국왕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력을 누렸다. 그는 인종을 부추겨 뜻에 거슬리는 인물들을 정계에서 몰아내었고, 자신의 부(府)를 설치해 분수에 넘치는 일들을 저질렀다. 자신의 부하인 주부(注簿) 소세청(蘇世淸)을 송(宋)에 파견해 표문을 올리면서 스스로를 국왕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거나 국왕에 대한 예식(禮式)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등 인종의 권위를 무시하는 경우가 잦았다. 마음대로 관직을 팔아 자신의 친척이나 세력 구성원을 중요한 직책에 앉혀놓는 정도의 일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였다. 심지어 그는 예종대의 명장(名將) 척준경을 사돈으로 맞이하여 막강한 군사적 배경까지 갖추고 다른 세력들을 물리적으로 억압하였다.

이자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다른 가문이 국왕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나누어 갖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1124년(인종 2년)에 자신의 3녀를, 곧이어 다음 해에는 4녀를 왕비로 들여보냈다. 인종의 입장에서는 친이모와 결혼한 셈이었다. 비교적 근친혼에 관대한 고려사회였으나 삼촌과 조카 혹은 이모와 조카 사이의 혼인은 이 시기에도 비정상적인 범주로 간주되었다. 근친혼은 이복남매 혹은 사촌 이상의 남매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욱이 이때의 혼인은 왕실을 장악하려는 이자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찬자는 이자겸이 3녀를 왕비로 들이던 날 소나기가 오고 거센 바람에 나무가 뽑혔다는 기록을 넣어 당시의 혼인을 간접적으로 비꼬았다.

4 난의 발생경위와 진압과정

인종은 외조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의 전횡을 보며 대책을 궁리하였다. 이때 국왕의 기색을 눈치 챈 내시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과 모의하여 이자겸·척준경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왕에게 거사를 알리고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오탁(吳卓), 대장군(大將軍) 권수(權秀) 등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拓俊臣)을 비롯해 이자겸에게 협조하는 인물들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이자겸의 난이 발발하였다. 변고를 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리들을 이끌고 주모자들의 집에 불을 지른 뒤 가족과 노비들을 가두었다. 이윽고 궁성을 포위하여 국왕에게 주모자들을 내놓으라는 요구를 하였는데, 이때 이자겸의 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이 현화사(玄化寺)의 승병을 이끌고 합류함으로써 그의 세력이 더욱 커졌다. 더구나 척준경이 왕궁을 불태우자 사지에 몰린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결정을 한다. 하지만 이자겸은 재상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선뜻 응낙하지 못하고, 다만 인종을 자신의 집안에 가두고 감시·조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인종을 감금한 이자겸은 국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고 수없이 인종의 생명을 위협했다. 같은 해 4월, 이자겸은 다른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응문(鄭應文)과 이후(李侯)를 금(金)에 보내 칭신(稱臣)하였다. 당시 금은 고려에 사대하도록 요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수락할 것인지를 두고 조정은 고심하고 있었다. 그동안 하대하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신하를 자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참 기세를 올리던 강국 금나라에 맞서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겸이 주도하여 금에 대한 사대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해 전쟁을 피하여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려 했던 이자겸의 개인적 욕심에서 비롯된 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금 황제는 고려에 화답하는 조서에서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고 예물로 회유하지 않았음에도 고려가 자발적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에 만족을 표하였다. 또한 이자겸은 인종의 왕비였던 4녀를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인종에게 독약을 먹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계략은 4녀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끊어놓음으로써 비로소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자 평소 기회를 엿보고 있던 최사전(崔思全)은 척준경을 찾아가 “이자겸은 궁중의 세력에만 기대어 신의(信義)가 없으니 좋고 나쁨을 함께 할 자가 아닙니다. 공은 한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공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전하였다.

이에 척준경은 국왕의 편에 서겠다는 결심을 내리고 이자겸과 그의 세력을 체포하였다. 인종은 이자겸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들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왕비였던 이자겸의 3녀와 4녀도 궁에서 내쳤다. 이자겸과 결탁하여 악행을 저지르던 세력들 또한 대거 좌천되거나 귀양을 떠났다. 이로써 인종 즉위 후 4년간 국정을 농단해오던 이자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5 이자겸의 난이 남긴 영향

이자겸의 난을 전후로 고려 문벌 사회는 안정기에 접어든 이래 유지해오던 공조체제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인종 즉위년인 1122년에 이자겸이 한안인 세력을 축출할 때까지만 해도 ‘권귀(權貴)’라고 지칭되던 문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신진 세력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가문의 위세를 높이고 음서(蔭敍)를 활용해 관직에 진출하였던 이자겸과 비교할 때 한안인은 과거 급제 후 숙종·예종 시기를 거치며 학문적 역량에 의거해 국왕의 측근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문벌들이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세도부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자겸·최사전·최홍재(崔弘宰) 등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자겸이 여기에 대해 대응할 당시 문벌들은 분명 하나의 이해단위로 움직였다. “(한안인은) 기세를 빙자해 권귀와 반목하다가 패하였다.”는 『고려사절요』의 평가가 당시 상황을 압축적으로 전해준다.

반대로 이자겸의 난이 진압되는 과정에서는 문벌들이 이합 집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애초 이자겸의 난이 실패한 것은 이자겸과 척준경의 대립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고, 두 사람을 이간질하여 충돌시키기까지는 이자겸의 전횡을 비판한 여타 문벌들의 활약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이자겸의 6촌이었던 이공수(李公壽)와 한안인 세력을 함께 제압했던 최사전이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최사전은 척준경을 만나 이자겸이 궁중의 세력만 믿어 신의를 잃었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이야기는 이자겸이 왕실과의 혼인에만 집착하다 다른 문벌들과의 연합을 경시하였고 이것이 곧 이자겸의 패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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