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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제건원

황제국 고려, 연호를 선포하다

918년

1 칭제건원의 의미와 역사적 연원

‘칭제건원(稱帝建元)’은 군주를 황제라 칭하고 연호(年號)를 세운다는 뜻이다. 일찍부터 중국과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를 맺어온 한국사에서 칭제건원이 갖는 의의는 높게 평가되어왔다. 그것은 국가 사이의 불평등성을 전제로 하는 전근대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이 중국과 차별화된 또 다른 세계의 최고권자임을 드러내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역사적으로 막강한 왕권(王權)에 기반해 팽창정책을 추구한 국왕들은 칭제건원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부심을 표출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신라의 진흥왕(眞興王)·발해의 무왕(武王) 모두 영락(永樂)·개국(開國)·인안(仁安)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신의 치세(治世)를 표상하고 국왕의 위상을 높였다.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고려의 태조 왕건(太祖 王建) 또한 이전 국가들의 전통을 이어 즉위와 함께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선포하였다. 후삼국이 각축하는 당시 상황에서 태조의 칭제건원은 나머지 두 국가인 후백제와 신라를 겨냥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추측된다. ‘하늘이 주셨다’로 직역되는 ‘천수’는 한반도의 정통국가가 고려라는 뜻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왕조와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며 고려는 연호를 폐기하였다. 태조 16년인 933년, 후당(後唐)으로부터 책봉조서(冊封詔書)를 받은 태조는 ‘천수’를 삭제하고 후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기준에서 황제의 책봉을 받는 제후(諸侯)가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를 황제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분수를 넘는 행위였기에, 이런 관념을 지녔던 대륙 국가와 정식외교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해 내렸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2 광종대 칭제건원과 그 배경

태조의 아들로서 두 형 혜종(惠宗)과 정종[고려](定宗)의 뒤를 이은 광종[고려](光宗)은 즉위 다음해인 950년(광종 1) 1월 ‘광덕(光德)’이라는 연호를 선포한다. 고려가 17년 만에 독자적인 연호를 다시 만든 것이다. 물론 이듬해 중국의 신흥왕조인 후주(後周)로부터 책봉을 받고 다시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광덕 연호 사용은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광종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비교해본다면 이때의 칭제건원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결코 낮게 볼 수 없다.

태조와 정종 시기에도 중국 대륙에서는 고려를 책봉한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5대10국(五代十國)으로 명명되는 혼란의 시대에서 광종 이전까지 후당·후진(後晉)·후한(後漢)이 차례대로 등장했고 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광종 이전에는 그 때마다 고려가 연호를 폐기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존의 연호를 사용하다가 신흥왕조와 통교하게 되면 비로소 그들의 연호를 채택하는 식이었다.

반면 광종은 중국왕조가 후한에서 후주로 넘어가는 시점에 독자의 연호를 선포하였다. 후주가 송(宋)으로 전환되던 과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960년(광종 11)에 그는 독자적인 연호인 ‘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이때의 조치는 황제국(皇帝國) 체제의 성립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해 3월에 광종은 개성(開城)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부르도록 하였다. 고려의 수도를 황제의 도성이라 명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황제의 지위로 격상시킨 것이다.

광종의 칭제건원은 다양한 정치적 계산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우선 그는 신하들에 비해 국왕이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아직 왕조 수립과 통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기가 아니었기에, 그 과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과 왕건에게 협력했던 지방 세력들의 지위와 세력이 고려 정계에서 왕성했다. 이들 중에는 왕실과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 한층 더 기세를 올린 인물들이 많았다. 태조 사후 혜종부터 광종까지 시기에 이러한 여러 세력이 왕위를 둘러싸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왕자 시절부터 광종은 그 과정 속에서 혜종과 정종이 요절한 것을 보았고 몸소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본인의 즉위 역시 이런 투쟁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따라서 광종이 신하들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을 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956년(광종 7)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하여 신하들의 군사적·경제적 기반이었던 노비들 중 원래 양민이었지만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다시 양민(良民)으로 만들었고, 958년(광종 9)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신진세력을 육성했다.

광종의 칭제건원은 이러한 조치들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칭제건원과 함께 광종은 점점 강경한 조치를 내렸다. 개경을 황도로 삼은 직후 그는 준홍(俊弘)·왕동(王同) 등 다수의 대신들을 모반 혐의로 축출하였다. 이는 공포정치의 서막이었다.

다음으로 광종은 북방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는 태조·정종의 북진정책을 계승하여 즉위한 다음해부터 장청진(長靑鎭)과 위화진(威化鎭)을 시작으로 현 평안도·함경도 일대에 지속적으로 성을 건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군사적 힘 외에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발해가 동북아시아에서 지녔던 위상을 잇는 것이었다. 고구려와 발해는 단순히 군사적 힘에만 의존하여 팽창해간 나라가 아니었다. 이들 국가는 대륙의 국가와 다른 별개의 천하를 설정하고 그 중심이 자신들이라는 자부심을 공유하였다. 이를 통해 주변의 군소 세력들과 차별화되는 스스로의 위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대륙 국가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이를 과시하는 범위에는 제한을 두었다.

이러한 관념을 토대로 독자적 천하 안에서는 황제를 자임하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제후를 자처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운영하였다. 고려 또한 비슷한 상황을 직면하고 있었다. 여진족(女眞族) 계통의 여러 북방세력을 고려로 편입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정점에 두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광종의 북방정책과 칭제건원은 같은 맥락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3 칭제건원의 영향

광종 이후 고려는 더 이상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인종[고려](仁宗) 12년인 1134년 황주첨(黃周瞻)이 묘청(妙淸)·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의 사주로 칭제건원을 건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묘청이 서경에서 난을 일으켜 대위국(大爲國)을 세우고 연호를 천개(天開)로 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공식적으로 고려는 광종 이후 스스로의 연호를 선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려국왕이 원(元)에 복속되고 황제의 부마(駙馬)가 되는 13세기 이전까지 고려는 ‘해동(海東)’이라는 독자적 세계의 천자국(天子國)이었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풍입송(風入松)」이라는 노래에서 고려 국왕은 해동천자(海東天子)로 호명된다. 동시에 해동천자가 다스리는 ‘사해(四海)’에는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으로 명명되는 집단이 등장하는데, 이 북적은 고려시대에 여진 부족들을 아울러 뜻하던 ‘북번(北蕃)’과 종종 같은 의미로 쓰였다고 보인다. 즉, 고려 시대 사람들은 스스로를 여진족 계통의 제후를 거느린 황제로 이해했던 것이다. 실제로 여진 부족들이 고려 국왕에게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양식인 표(表)를 올렸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고려가 동북아시아에서 다원적 국제 구도의 일각을 이루며 누렸던 국제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이웃 나라인 송이나 요(遼)․금(金)에서는 고려가 비록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책봉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예우하였다. 송은 고려와 자국을 내왕하는 사신들을 국신사(國信使)로 불렀으며, 번국을 담당했던 예부(禮部)가 아니라 황제 직속의 추밀원(樞密院)을 통해 고려의 사신들을 접대하였다. 송으로부터 책봉 받았던 고려를 대등한 국가로 취급하고 예식의 등급을 높인 것이다. 심지어 금(金)은 건국초기 고려에 보내는 서신에서 고려국왕을 황제로 칭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고려는 이들 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을 접대할 때 대등한 관계에서 사용하는 예식과 사대(事大) 관계에서 사용하는 예식을 혼용하여 위계를 모호하게 하였다.

내정(內政) 영역에서도 황제국 체제의 면모를 보여주는 단서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왕실과 관련된 호칭들을 들 수 있다. 고려의 신하들은 황제에 대한 호칭을 사용하여 국왕을 폐하(陛下)로 불렀다. 국왕의 어머니와 차기 왕위계승자를 각각 태후(太后)·태자(太子)라 하였으며, 왕의 친척들을 제왕(諸王)으로 통칭하였다. 다음으로 국왕의 복식도 황제의 격에 맞는 것을 사용하였다. 1992년 출토된 태조 왕건 동상을 통해 황제 복식의 흔적을 일부 확인할 수 있는데, 동상이 쓰고 있는 관은 제후의 원유관(遠遊冠)이 아닌 천자의 통천관(通天冠)이다. 마지막으로 관제(官制)나 문서체제에서도 고려는 황제국 제도들을 사용하였다. 당(唐)의 3성 6부제를 변형해 2성 6부로 운영하였으며 송의 신설기구인 중추원을 도입하였다. 실무 행정기관의 명칭은 6조(六曹)가 아니라 6부(六部)였으며, 국왕의 명령은 조(詔)·칙(勅)이었다.

따라서 인종 대에 등장했던 칭제건원 요구는 여진족 왕조인 금을 겨냥해 대외적으로도 가시적 행위를 하자는 의미였을 뿐, 고려에 없던 황제국 체제를 새로 도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고려를 부모의 나라 혹은 형제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에 대해 고려가 사대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 세력들에 의해 외왕내제의 기조가 잠시 흔들렸던 것일 뿐이다. 원의 요구로 고려 관제가 격하되는 충렬왕대(忠烈王代) 이전까지 앞서 서술한 황제국 체제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을 지탱하는 다원적 천하관 또한 대다수 고려 지배층에게 확고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앞서 검토한 광종대 칭제건원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문화적 토대를 마련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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