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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난

붉은 두건의 도적들, 고려로 밀려오다

1362년(공민왕 11)

1 개요

홍건적은 14세기 중반, 즉 원(元) 말기에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이다. 이들 중 한 갈래는 북중국과 요동 일대를 거쳐 1359년(공민왕 8)과 1361년(공민왕 10)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였다. 여기서는 홍건적이 발흥하게 된 배경과 중국 대륙에서의 움직임, 그리고 그들이 고려로 향하게 된 경과를 우선 살펴보고, 두 차례에 걸친 침입과 격퇴의 과정을 추적해보겠다. 아울러 홍건적의 난이 고려 국내의 정치와 원과의 대외관계 등에 미친 영향을 확인해보겠다.

2 혼란한 대륙과 홍건적의 등장

1206년 칭기스칸의 몽골 통일을 시작으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 몽골제국은 13세기 내내 거칠 것 없는 팽창을 이어가며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해나갔다. 중국에 국한시켜 보자면, 몽골족은 1234년에 금(金)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장악했으며, 1276년에 남송(南宋)의 수도 항주(杭州)를 함락시킴으로써 중국 전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13세기 후반에 이르면 동쪽으로는 만주(滿洲) 일대를 비롯하여 중국 대륙 전체를 장악했고, 서쪽으로는 현재의 이란과 러시아 일대에 이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몽골족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이민족 지배에 따른 모순의 확대로 통치력이 점점 느슨해지게 되었다. 특히 1340년대부터는 자연재해가 거의 해마다 반복되었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은 천명(天命)이 몽골, 즉 원을 떠났다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민심의 이반은 특히 중국의 강남 지역에서 훨씬 심각하였다. 특히 이 일대에는 종말론적인 성격이 강한 백련교(白蓮敎)가 지친 농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1344년에 일어난 대홍수로 황하(黃河)의 수로가 바뀌는 재난이 중국을 덮쳤다. 대운하를 통해 강남에서 수도인 대도(大都)로 운송되어 올라오는 식량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원 조정은 황하의 수로를 바로잡는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전국에서 거의 20만에 달하는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공사는 1년 만에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으나, 여기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의 불만은 점점 고조되어, 곧 전국적인 반란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1340년대를 통해 전국에 파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백련교도들은 135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조직화하며 무장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홍건군(紅巾軍)이 최초로 봉기한 것은 1351년의 일이었다. 유복통(劉福通) 등이 이끈 농민군들은 원 왕조 타도를 내세우고 일어섰다. 홍건군은 백련교의 종교적 지도자였던 한산동(韓山童)과 뒤이어 그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받들어 이들이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후손이라고 일컬었다. 1355년에는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송(宋), 연호를 용봉(龍鳳)이라고 하였다. 이들 반란군은 모두 붉은 두건과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홍건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홍건군은 일원적인 계통을 갖춘 단일한 집단은 아니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들은 서로 다른 지도자를 내세우며 개별적으로 원 조정에 적대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이후 명(明)을 건국하게 되는 주원장(朱元璋)의 세력도 원래는 홍건군의 한 계열이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건 홍건군은 강남 일대에서 일어나 점차 화북으로 북상하였다. 이에 북중국 일대에서는 홍건군과 원 정부군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원 조정은 1354년(공민왕 3)에는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 채하중(蔡河中)을 고려에 보내어 병력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등 장수 40여 명과 군사 2천여 명을 파견하여 홍건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대륙의 불안정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서북면의 방어태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이 일대의 군사지휘관을 새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1354년에 홍건군은 기어이 황하를 넘었다. 그 가운데 관선생(關先生)과 파두반(破頭潘) 등이 이끈 한 지파는 1358년에 원의 도읍인 대도(大都) 공격을 감행하였다. 원 정부군의 방어에 막힌 홍건군은 1359년에 방향을 동북쪽으로 틀어 원의 두 번째 수도인 상도(上都)를 함락시키고, 다시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遼陽)을 점령하였다. 요동 일대가 전쟁의 영향권에 들게 되자 전란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이주해 들어오기도 했다.

이에 홍건군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고려에 보내어 거병의 명분을 설명하고 고려를 회유, 협박하고자 하였다.

“백성들이 오랫동안 오랑캐의 손아귀에 빠져있는 것에 분개하여 의를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중원(中原)을 회복하고, 동쪽으로 옛날 제나라와 노나라 땅을 넘고 서쪽으로 함진(函秦)으로 나아갔으며 남쪽으로는 민광(閩廣)을 지나고 북쪽으로는 유연(幽燕)까지 이르니, 모두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마치 굶주린 자가 산해진미를 얻은 것과 같고 병든 자가 좋은 약을 만난 것과 같이 하였다. 이제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사졸을 엄중히 타일러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였으며, 귀순한 백성들은 잘 대해줄 것이고 어리석게도 반항하는 자에게는 죄를 줄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내부적으로 경계 태세를 강화해갈 뿐이었다.

3 한반도로 튄 불똥 - 홍건적의 1차 침입

1359년(공민왕 8)에 홍건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요동 일대를 휩쓸고 있었다. 원 조정에서도 토벌군을 조직하여 홍건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고, 요양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이에 홍건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한반도로 침입해 들어왔다. 이들을 우리 역사에서는 ‘홍건적’이라 기록하였다. 그해 11월에 홍건적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약탈을 하고 돌아간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곧이어 12월에는 모거경(毛居敬)이 이끈 홍건적 4만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함락시켰고, 곧바로 다음날에는 정주(靜州)와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홍건적의 남하는 계속되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지 20일 만에 서경(西京)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서경은 고려에서 건국 초기부터 정치와 군사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말하자면 고려 제2의 수도와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홍건적은 경험과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왜 한반도를 침입하였을까? 우선 전략적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당시 홍건적은 고려를 원의 동맹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를 공격함으로써 그 배후의 요동을 안정화시키려는 전략을 취하였던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홍건적이 고려를 피난처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요동의 군사적 대치가 긴박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홍건적들에게 고려는 좋은 안식처로 생각되었다.

고려군은 발 빠르게 대응하였다. 홍건적 침입 초기에는 경복흥(慶復興), 안우(安祐) 등 공민왕 측근의 인물들이 출전하였다. 그러나 홍건군의 거센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서경까지 밀리고 말았다. 고려는 곧 대대적으로 병력과 말을 동원하는 등 거국적인 대응에 돌입하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개성(開城)에서는 피난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에 돌입하였다. 1360년(공민왕 9) 1월에는 양군이 각각 수천 명씩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군은 빼앗긴 지 20일 만에 서경을 수복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뒤이어 안우, 이방실(李芳實) 등이 이끈 고려군은 함종(咸從)에서, 그리고 선천군(宣川郡)에서 홍건군을 크게 격파했다. 함종에서의 전투 성과를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將軍) 이견(李堅)이 전사했다. 그러나 각 부대들이 힘껏 싸워 적군 2만 명을 죽이고 자칭 원수(元帥)인 심자(沈刺)와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 이후로도 홍건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에는 두 달 정도가 더 걸렸다. 홍건적은 물러나면서까지 서북 지역에 처참한 피해를 입혔다. 압록강을 건너 후퇴한 홍건적을 고려군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그해 4월, 전쟁에 승리하고 개선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공민왕이 승리의 기쁨을 표현했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와 옥갓끈을 하사하였다. 공주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십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종사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로입니다. 내가 비록 내 살을 베어 주더라도 오히려 다 보답할 수 없을텐데, 하물며 이 물건 정도를 아까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4 홍건적의 대대적인 2차 침입

홍건적은 일단 압록강을 건너 물러났지만 그 세력이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었다. 요동 일대로 후퇴했던 홍건적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들어와 고려의 서북면 지방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에서는 이공수(李公遂), 주사충(朱思忠) 등을 원에 파견하여 대륙의 정세를 살펴보도록 하였으나, 그들은 항상 심양(瀋陽)에서 길이 막혀 돌아오고 말았다. 이로써 고려 조정은 한반도에 침입했던 홍건적이 몽골제국 전체에 퍼진 반란군 세력 중 일부였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는 1356년(공민왕 5)의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 이후 소원해졌던 원과의 관계를 복원하여 홍건적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그 조치의 일환으로 원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뜻을 표명하였고, 또한 정동행성(征東行省)에 관원을 다시 배치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각도의 군비 현황을 점검하고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지배층들로부터 말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은 두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침입하였다. 이번에는 1차 침입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이 거느린 10만의 대군이었던 것이다. 홍건적은 침입을 시작한 지 1개월 남짓 만에 개경을 압박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어가(御駕)가 남쪽으로 떠나는데, 공주는 연(輦)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李氏)가 탄 말은 파리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는 사람이 다 눈물을 흘렸다.”라고 묘사하였다.

공민왕을 비롯한 고려 조정은 복주(福州), 즉 지금의 안동(安東)으로 피난지를 정하였다. 복주는 북쪽의 홍건적이나 남쪽의 왜구 등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분지 지형이었으며 경상도 교통의 요지로 물산이 풍부했던 점, 그리고 왕실을 비롯해서 홍언박(洪彦博) 등 고려의 중신들과 깊은 관련을 지닌 곳이었다는 점에서 피난지로 선택되었다. 공민왕은 복주에 머물면서 자주 영호루(映湖樓)에 나아가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공민왕이 친히 썼다고 하는 영호루의 현판이 전해지고 있다.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고 5일 만에 홍건적은 기어이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후 개경에 머물면서 홍건군은 잔학한 행동을 거듭하였다.

“적군은 개경을 함락한 후 수 개월 동안 진을 치고 머물면서 말과 소를 죽여 그 가죽으로 성을 쌓고는 물을 뿌려 얼음판을 만들어 아군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했다. 또 남녀 백성들을 죽여 구워 먹거나 임신부의 유방을 구워 먹는 등 온갖 잔학한 짓을 자행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은 광주(廣州), 충주(忠州) 등을 거쳐 12월 복주에 도착하였고, 이후 반격을 준비하였다. 우선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전국 각지에서 근왕병을 모집하였다. 또한 국내 각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배후에서 홍건적을 격파하는 전과가 이어졌다. 반격의 채비를 마친 고려군 20만은 이듬해인 1362년(공민왕 11) 1월에 개경의 교외에 진을 치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1월 18일 새벽부터 벌어진 전투는 치열하였다. 이 한 번의 전투로 홍건적 20만 가운데 절반은 전사하고, 나머지 절반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 성과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저희끼리 밀고 밀치다 죽은 적들의 시체가 가득했고 10만이 넘는 적들의 머리를 베었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와 금은보화, 금·은·동으로 만든 인장, 무기 등의 물품을 노획했다. 그 잔당인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도망쳐 버리니 적도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라고 전한다. 이로써 홍건적의 2차 침입은 마무리되었다.

5 홍건적 침입의 뒷수습과 그 영향

성공적으로 홍건적을 격퇴한 기쁨도 잠시, 고려 정계는 음모와 계략으로 피바람에 휩싸였다. 1362년(공민왕 11) 1월 18일 개경을 수복한 뒤 4일 후에 안우, 김득배(金得培), 이방실 등 뛰어난 전공을 세운 3원수가 전쟁을 총지휘한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태는 보름 정도 지난 뒤에 안동에 전달되었다. 공민왕은 지휘관을 살해한 죄를 용서한다는 교서를 장수들에게 전달하는 한편 장수들을 행재소로 오도록 독촉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3원수는 각각 행궁으로 찾아왔는데, 2월 29일에 안우가 먼저 도착했다가 김용(金鏞)의 계략으로 피살되었고, 이방실과 김득배도 내려오던 도중 각각 지금의 경북 예천인 용궁현(龍宮縣)과 지금의 경북 문경인 산양현(山陽縣)에서 체포되어 살해당하였다. 3원수는 총병관을 멋대로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제거되었던 것이다.

공민왕은 1362년(공민왕 11) 2월 25일에 안동을 출발하여 상경길에 올랐다. 그러나 곧바로 개경으로 들어가지 않고 상주(尙州)에서 약 6개월, 청주(淸州)에서 약 4개월을 보낸 뒤, 이듬해인 1363년(공민왕 12) 2월 14일에 개경 근처의 흥왕사(興王寺)에 행궁을 설치한 채로 머물렀다. 그런데 윤3월 1일 새벽, 김용의 사주를 받은 적도(賊徒) 50여 명이 행궁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숙위하던 관리와 군사가 모두 도망쳐버렸고, 환관 안도치(安都赤)가 왕을 대신하여 살해되었으며, 우정승 홍언박은 집에 머물다가 살해당했다. 사태는 이튿날 최영(崔瑩)을 비롯한 무장들이 개경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적도를 진압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윤3월 6일에 공민왕은 흥왕사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자들을 공신으로 책봉했는데, 여기에는 최영, 안우경(安遇慶), 우제(禹磾), 오인택(吳仁澤) 등 무장들이 대부분이었다. 약 20일 뒤에 그 주모자가 김용인 사실이 밝혀져 김용은 처형되었다.

정세운과 3원수의 피살, 흥왕사의 난 등 일련의 정치적 격변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격동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무장들의 군사력 관장에 대한 공민왕의 의심, 조정 중신과 최고위 장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얽혀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정세운을 비롯한 무장들과 홍언박·김용 등 공민왕 측근의 유력한 인사들이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사태의 수습에 공을 세운 최영과 같은 새로운 무장세력이 대두하였다. 이들은 거듭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조정의 중임을 담당하게 되었다.

홍건적의 침입과 그 격퇴는 고려-원 관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으로 종전의 고려-원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순식간에 껄끄러운 관계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가 홍건적이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고려는 원과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원에 사신을 파견해 홍건적 격퇴를 알렸고, 원은 그에 대응하여 공로를 치하하는 사신을 보내오면서, 요동 일대의 홍건적 잔당을 협공할 것을 요청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려-원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는 오히려 공민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국왕을 세우려는 시도가 곧이어 전개되었다. 덕흥군(德興君) 옹립사건, 혹은 공민왕 폐위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공민왕에 대한 기황후(奇皇后)의 개인적인 원한과 최유(崔濡) 등 부원배의 모략이 결합하여 일어났다. 결국 1364년(공민왕 13) 1월에 덕흥군과 최유가 이끈 1만 명의 원군(元軍)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최영과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등을 전장에 투입하여 맞섰다. 결국 원의 공민왕 폐위 조치는 군사적 대결 끝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고려에 대한 원 조정의 정치적 개입은 거의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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