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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 6진 개척

세종, 여진족을 물리치고 영토를 개척하다

1434년(세종 16) ~ 1443년(세종 25)

4군 6진 개척 대표 이미지

사군육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시대적 배경

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새로 건국된 명(明)이 기존의 중국의 지배자였던 원(元)과 각축을 벌이며 서서히 세력을 성장시켜 마침내 대륙의 패자로 등장하였다. 원은 비록 대륙에서의 패권을 상실하였으나 아직 강력한 세력을 유지한 채 몽골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이 건국되었고,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의 막부가 점차 영향력을 잃어 가면서 지방 세력들이 힘을 얻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처럼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개국한 조선은 왕조의 개창과 동시에 대외관계 수립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와 함께 고려 말 피폐해진 군사력을 복구하여 국가의 방어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준동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방어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대륙정세에 대응한 양계지방의 방어 체제 정비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히 양계 지방의 방어 체제는 대륙 및 요동의 정세 변화에 따라 방어 전략과 체제를 바꾸어가면서 대응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친명정책을 표방하였지만, 조선 개국 직후 대명관계는 매우 껄끄러운 편이었다. 고려 말 명의 건국 직후 고려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어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였지만, 고려가 원과도 통교하는 것이 밝혀지면서 급격히 갈등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조선 초에도 이어져 조선의 입공을 몇 차례 거절하기도 하고, 사신이 가져간 표전문을 문제 삼아 조선 사신 몇 명이 명에서 처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친명을 표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초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요동공벌론’ 이 대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관계는 조선에서 태종이, 명에서는 영락제가 즉위하면서 곧 유화분위기로 돌아서는 듯하였다. 그런데 영락제가 즉위 이후 대외팽창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조선에서는 영락제가 조선을 침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영락제가 안남을 정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태종은 군량을 비축할 것을 명하는 한편으로 무기와 군사에 대한 정비를 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종 당시까지만 해도 명은 언제든 적대적 관계로 돌입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한편 몽골로 쫒겨난 북원도 당시까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에 침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태조 이성계 본인이 이미 고려말에 북원의 잔류세력인 나하추(納哈出)와 실제 교전을 벌인 일도 있었다. 특히 조선의 건국세력은 원의 전성기 시절 강력한 군사력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만큼 이들에 대한 경계심도 대단하였다.

명과 북원 세력 외에도 조선의 국경 지방에는 여진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한때 금을 세워 중원을 호령한 적도 있었으나, 이후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만주 지방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부족의 형태로 생활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세력을 일으킨 함경도 지방에도 여진 세력들이 다수 거주하였는데, 이성계가 이후 무장으로서 이름을 얻게 된 데는 그를 따르는 여진 장수와 병사들의 공이 컸다. 특히 이지란(李之蘭) 등은 여진 출신으로 개국공신에 이르기도 할 만큼 여진과 태조와의 관계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따라서 국초에는 이들이 조선의 국가 안위에 큰 위협이 되는 세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태종이 집권한 후 조사의의 난(趙思義-亂)이 발생하자, 조선 정부와 여진사이에 긴장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킨 배후에는 태조 이성계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으로 인하여 태상왕으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성계가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난을 지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동북지방의 많은 여진족이 이 난에 가담하였다. 결국 난이 실패로 돌아가 진압되었지만 이후 태종은 동북 지방의 여진족과 불편한 관계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후 여진이 조선의 국경을 무력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1410년(태종 10년) 조선에서 함경도와 접해있는 모련위(毛憐衛) 여진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태종은 조연(趙涓), 신유정(辛有定), 김중보(金重寶), 곽승우(郭承祐)등에게 군사 1,150명을 주어 모련위 여진족을 정벌하였는데, 약 160여명의 여진족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태종의 정벌은 여진에 대한 최초의 무력시위로 이후 조선은 여진과의 갈등관계가 깊어질 때마다 몇 번의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으며, 여진 역시 이후로는 빈번한 무력시위 및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태종대와 세종대 초반 양계지방의 방어 체제는 서북지역과 동북지역이 각각 다르게 만들어졌다. 평안도는 명이나 원처럼 대규모 병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처럼 방어의 중심 기지를 설정하고 이를 근간으로 몇 겹의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압록강 유역은 조선의 국경 안으로 확실히 들어오지 못한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또한 대규모 병력이 침입할 경우, 백성들이 이에 대응하여 가장 가까운 성으로 피신하게 하는 입보규정도 마련되었다. 현재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입보규정은 1428년(세종 10)에 황희(黃喜)가 기획한 내용인데, 성의 규모와 입보할 백성의 수를 자세히 고려하여 만들어진 규정이었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하여 입보할 성에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위한 군량을 미리 저치하도록 규정하였다.

반면 함경도의 경우 여진의 소규모 부대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鎭)을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함경도에는 아직도 많은 수의 여진들이 조선 경내에 거주하고 있어 아직 확실히 국경선이 확정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함경도는 입보 규정이 마련되지 않은 대신, 조선의 국경 안에 들어와 있는 여진인들을 어떻게 회유할 것인지가 큰 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함길도의 방어체제 수립과 병행하여 여진 추장들에게 관직과 물품을 하사하여 조선의 울타리로 삼으려는 정책이 추진되었다.

2 4군 6진의 개척

위와 같은 북방정세와 방어체제는 세종대 중반 무렵부터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대륙의 명과 친화적 관계가 공고해지게 되었고, 북원 세력의 위협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반면 태종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여진과의 갈등은 지속되어 세종대에는 두 번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아울러 북방의 적이 여진으로 설정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어 체제가 모두 국경선을 위주로 재편되게 되었다.

본래 태종대 조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여진인들은 주로 함경도의 오음회, 즉 회령(會寧)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명의 관직을 수여받게 되었는데, 명에서는 관직을 수여받은 여진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게 되었다. 건주위 설치 이후 여진인들 중 상당수가 파저강 유역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파저강은 현재 요동성의 동가강(佟佳江)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압록강 이북 지역에 해당하였다. 이러면서 평안도 지역에도 여진인들과의 마찰이 생길 여지를 안게 되었다.

이들 파저강 유역에 자리한 건주위 여진의 추장은 이만주(李滿住)였다. 1432년(세종 14) 평안도 지역에 여진인 400여기가 침입하여 사람과 우마를 약탈해 가다가 조선군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는 평안도 지역에서 여진과 마찰이 생긴 첫 사례로, 이에 대해 세종은 정승들과 더불어 사태의 수습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이 사태를 곧 명에 알리기로 하였고, 이후 군사적인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정벌의 총 책임자로 선임하고, 이순몽(李順蒙), 최해산(崔海山), 이각(李恪), 이징석(李澄石), 김효성(金孝誠), 홍사석(洪師錫) 등을 일선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정벌에 임하게 하였다. 7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진 소탕에 임한 조선군은 62명을 사로잡고 9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만주를 사로잡는 것은 실패하였다. 이로서 조선은 여진의 약탈에 대해 강경히 대응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의 약탈이 계속되자 1437년(세종 19) 이천(李蕆)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다시 이만주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2차 토벌에 동원된 병력이 총 8,000에 불과하였으나 여진을 생포하지 말고 바로 사살하도록 명하는 등 토벌의 수위는 훨씬 강경하였다. 이천은 평안도의 병력 중 정예병을 골라 뽑고 이들을 3개부대로 나누어 여진의 근거지를 급습 대승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만주를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것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토벌의 여파로 이만주는 조선에 승복의 뜻을 전하며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한동안은 무력 도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여진의 약탈과 그에 따른 두 차례 정벌 이후 세종은 평안도 일대에도 함경도와 유사한 국경선 방어대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국경 방어의 전초기지로서 압록강변에 위치한 지역에 새로이 4개 군현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 군현이 바로 여연군(閭延郡), 자성군(慈城郡), 무창군(茂昌郡), 우예군(虞芮郡)이었고, 이들을 한데 묶어 훗날 4군이라 지칭하였다.

4군 중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여연군이었다. 여연군은 함길도 갑산군(甲山郡)에 소속되어 있다가 1416년(태종 16) 하나의 군현으로 독립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중강진 부근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417년(태종 17)에는 함길도에서 평안도로 소속을 옮기도록 하였다. 이로서 여연과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지방을 잇는 방어선이 성립함으로서 압록강 국경 방어의 윤곽이 성립되었다.

그러다가 여진의 침략과 그에 대한 조선의 1차 정벌이 있은 후 두 고을의 사이가 너무 멀어 방어가 용이하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두 고을 사이에 새로운 군현을 설치할 것이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1432년(세종 14) 여연과 강계의 중간에 위치한 여연군 소속의 자작리에다 성을 쌓고 여연의 남촌과 강계의 북촌을 가각 소속시킨 후 자성군으로 독립시켰다. 이로서 강계-자성-여연군으로 압록강 유역의 방어 기지가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성군의 설치 이후에도 압록강의 방어는 용이하지 않았고, 여진족의 침입도 간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2차 파저강 토벌 이후 1440년(세종 22) 본래 하무로보가 있던 지역에 무창현을 신설하였고, 1442년(세종 24)에는 무창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또 다음해인 1443년(세종 25)에는 자성과 여연의 중간에 위치하였던 우예보를 우예군으로 승격시키고 자성군의 태일진 등을 소속시키게 하였다. 이로서 1416년(태종 16)~1443년(세종 25)의 약 27년 사이에 압록강 상류지역에 4개의 군현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후대에 4군이라고 명칭하였다.

한편 함경도의 경우는 일찍부터 국경선 방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래 고려 말 쌍성총관부의 회복과 이성계의 영향력 등으로 말미암아 조선 초에 이미 두만강 유역은 상류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국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종대 여진들의 잦은 약탈에 따라 방어선이 남쪽으로 후퇴한 상태였고, 방어선 역시 두만강 유역보다 아래에 구축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1432년(세종 14) 여진족의 일족인 우디케족이 다른 여진 일족인 오도리족을 습격하여 그 추장인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동맹가첩목아는 조선 초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던 여진 추장으로, 현재 회령지방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명으로부터도 작위를 받아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수장으로 임명된 거물이었다. 동맹가첩목아의 죽음은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명에서도 그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고 주모자인 양목답올의 자수를 종용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세종은 동맹가첩목아의 죽음과 여진 부족간의 대립을 틈타 그간 위축되었던 국경선을 회복하기로 결정하고 이 지역에 새로운 군현들을 신설하여 방어 기지를 구축하였는데, 그것이 종성도호부(鍾城都護府),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부령도호부(富寧都護府)의 여섯 도호부, 즉 6진이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6진 개척의 총책임을 맡기고 이징옥(李澄玉)을 병마 도절제사로 파견하여 업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6진 중 가장 먼저 설치된 곳은 종성과 회령이었다. 1434년(세종 16) 영북진의 위치를 보다 북쪽으로 전진배치하고, 본래 여진의 근거지였던 알목하 지역에는 회령진을 설치하였다가 곧 회령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다음해인 1434년(세종 16)에는 영북진을 종성군으로 독립시키고 인근 지역을 소속시켰으며, 5년 후인 1440년(세종 22)에는 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한편 태종대 설치되었으나 야인의 침입으로 위치를 남쪽의 경성군과 합병하여 방어를 포기하였던 경원부를 1434년(세종 16) 다시 두만강 유역인 회질가(會叱家)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였다. 이후 1442년(세종 24)에는 진에 절제사를 두고 1449년(세종 31)에는 온성 북편의 땅을 내속시켰다.

한편 경원부를 회질가 지역으로 북진시키면서 옛 공주(孔州) 지역에서 방어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에 1435년(세종 17) 이 지역에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하였는데, 두 해 뒤인 1437년에 공성현의 명칭을 경흥군(慶興郡)으로 개명하였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443년(세종 25)에는 성을 새롭게 수축하는 동시에 경흥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위와 같이 네 개의 고을이 두만강 유역으로 북진 배치되면서 방어선을 확립하게 되었는데, 1440년(세종 22)에는 종성과 경원 사이의 방어의 어려움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다온평(多溫平) 지역에 새로이 온성군(穩城郡)을 설치하였다. 온성은 1441년 도호부로 승격되어 판관과 토관을 설치하였고, 1442년에는 진을 설치하여 온성도호부사가 진절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종성, 회령, 경원, 경흥, 온성의 다섯 고을로 두만강 하류 지역의 방어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이들 다섯 고을을 5진이라고 명칭하기도 하였다. 6진의 가장 마지막인 부령도호부는 1449년(세종 31)에야 설치되었다. 즉 앞서 다섯 고을이 두만강 유역으로 전진 배치되면서 해당 고을들이 원래 위치하던 배후지역에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에 1449년(세종 31) 원래 있었던 부거현(富居縣)을 혁파하고 인근 지역의 여러 고을을 옮겨 부쳐서 부령도호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위와 같이 국경 방어 체제의 일환으로 4군과 6진이 설치되었지만, 단순히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부수적인 방어시설의 정비와 방어시설을 운용해 갈 인력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세종대 4군 6진 개척과 함께 행성行城)의 축조와 사민입거(徙民入居)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두 사업은 엄청난 인력과 물력, 행정력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행성이란, 기존의 산성이나 읍성처럼 거점 지역에 한정된 크기로 지어진 성이 아니라 방어선을 따라 길게 축조된 성을 말한다. 물론 조선이 쌓은 행성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처음과 끝을 모두 쌓아올린 성이 아니라, 군데군데 산과 강 등의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그 사이를 성으로 쌓은 것이었다. 행성을 쌓을 계책은 1440년(세종 22) 결정되었는데, 그 책임자로는 황보인(皇甫仁)을 임명하였다. 행성의 역사는 10년 넘게 진행되어 세종의 사후에까지 진행되었다.

행성축조 뿐 아니라 사민입거도 매우 긴 시간동안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새로 설치한 군현에 백성 수가 너무 적으면 병력 동원이 어려워지고, 또 농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체적인 군량생산의 어려움이 커지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새로 만든 지역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미 4군 6진 개척 이전 고려 시대에도 몇 차례 시행된 바 있었고, 조선 태조 때에도 한 차례 시행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민입거는 4군 6진 개척 이후에 실시되었다.

당시 이루어진 사민은 처음에는 토지와 관직을 내려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건 등을 내세워 자원자를 모집하는 방식이었으나, 자원자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 입거시킬 호 수를 정해놓고 서울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선발하게 하였다. 또 사민은 여러 차례 이루어졌는데, 4군과 6진 지역에 직접 입거시키기도 하였고, 혹은 남쪽 지역 사람들은 평안도와 함길도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평안도, 함길도 남쪽 사람들을 4군 6진으로 입거시키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민입거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은 매우 커서, 사민대상자가 된 사람 중에는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와 같은 4군 6진의 개척과 그에 따른 방어시설의 정비, 인력의 충원 등을 통해 세종 말년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행성 축조의 경우 세종이 사망할 때까지도 작업을 모두 마치지 못하였고, 사민 입거한 백성들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도망자가 속출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관료들 중에는 국경 방어를 포기하자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그럼에도 세종은 ‘조상들의 강역을 줄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그에 따라 국경 방어 체제도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다.

3 4군의 폐지와 6진의 계승

세종의 강력한 의지로 지속되던 국경 방어선의 유지는 세종 사후 방어선 유지의 어려움과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여진 외에 강력한 국방의 위협요소가 등장하였는데, 바로 원의 후예로 몽골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오이라트 부족이었다. 오이라트 부족의 흥기는 조선 뿐 아니라 명과 여진족 등을 포함한 전체 동아시아 사회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이 와중에 명의 황제인 정통제(正統帝)가 직접 오이라트 부족을 평정하러 출전했다가 포로로 잡히는 토목번의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결과 명 정통제의 동생이던 경태제(景太帝)가 즉위하였고, 오이라트는 명의 수도인 북경을 포위하여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명이 끝까지 항전하여 수도를 지키고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에서 명의 위상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이라트가 조선을 침입할 경우 대응 방식에 대해서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였다. 이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할 때에는 국경방어선이 그나마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으나 10만 단위가 넘는 대부대를 거느린 오이라트에 대해서는 현재의 방어선이 무력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와 더불어 국경의 방어 기지까지 병력이 이동하여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지적이 이전부터 꾸준히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455년(단종 3) 평안도 4군에서 병력을 빼어 뒤로 물리도록 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리하여 약 20년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4군 개척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대규모 병력의 침입에서 보다 자유로운 함길도 지역에 설치된 6진은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의 국경방어선으로 기능하였다. 조선 후기 청이 건국되고 조선이 항복한 이후에는 6진 지역의 방어선으로서의 기능이 쇠퇴하였지만, 반면 국경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이후 대대적인 지방관제 개편으로 당초 도호부이던 고을의 등급이 군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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