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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

인현왕후 복위, 서인의 시대가 열리다

1694년(숙종 20)

1 개요

갑술환국은 16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고 왕후가 되었던 세자의 생모 장씨(張氏)를 다시 희빈(禧嬪)으로 강등시키는 조치와 함께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소론(少論)과 노론(老論)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치적 사건이다.

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숙종대에서 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1674년 숙종이 즉위했을 때 제 2차 복제논쟁을 계기로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집권한 갑인환국(甲寅換局), 1680년(숙종 6) 훈척계열의 김석주와 숙종이 협력하여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진출시킨 경신환국(庚申換局), 1689년(숙종 15) 숙종과 소의(昭儀)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의 위호를 정하는 일에 반대하던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진출한 기사환국(己巳換局), 다시 장씨가 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며 남인이 실권한 갑술환국(甲戌換局) 등이 그것이다. 환국 정치의 시기에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서로에 대한 비판이 정도를 넘어 서로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정치인들 간에 상호 신뢰에 바탕한 조화의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운영에 제동을 걸며 당파 간의 지나친 경쟁을 자제하고 더 큰 정치적 목표 아래에서 서로 협조하는 정치 문화를 지향한 것이 18세기의 탕평정치이다.

2 갑술환국의 경과

1680년 경신환국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중심으로 한 서인 훈척 계열이 군사적 실권을 독점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석주는 군제 개혁을 주관하면서 금위영(禁衛營)이라는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였다.

군권을 장악한 이러한 훈척계열의 독주에 대해 삼사(三司)의 젊은 관료들은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682년(숙종 8) 남인 허새(許璽) 등이 복평군(福平君)을 추대하려 한다는 역모가 고발된 이후 증거가 불충분한 사건의 처리방향을 두고 훈척과 연소 신료들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서인계 관료와 지식인들은 각각 지지하는 입장에 따라 분화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간의 사제간 갈등이 이에 결부되면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이 성립되었다.

1688년(숙종 14) 10월 남인과 연결되어 있는 역관 집안 출신의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듬해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된 왕자의 명호를 ‘원자(元子)’ 즉 차기에 왕위를 계승할 아이로 못 박고자 했다.

이에 대해 서인 신료들은 왕비 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숙종이 이를 고집하여 왕자를 원자로 정했고, 장씨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1689년(숙종 15) 2월 노론계의 영수이자 산림인 송시열이 원자 정호(定號)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하는 동시에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계 인물들로 대체시키는 환국을 단행했다.

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숙종의 의지와 판단에 의한 것으로, 남인의 정치적 기반은 허약했다.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들은 서인 학문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을 문묘에서 출향하는 조치를 통해 서인들에 대한 보복을 시작하였다.

원자 정호에 반대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또 김수항(金壽恒), 이사명(李師命) 등 노론계 신료들과 김익훈(金益勳) 등 훈척 등 18명이 죽고, 서인계 인물들 다수가 정계에서 축출당했다.

인현왕후는 투기를 일삼는다는 이유로 폐출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흰 가마를 타고 요금문(曜金門)으로 나가 친정인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으로 돌아갔는데, 통곡하는 관리와 유생들이 길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하지만 남인 중심의 정국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690년(숙종 16) 6월에는 3세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면서 남인들의 정권이 안정에 접어드는 듯하였지만, 권대운(權大運), 목내선(睦來善) 등이 진출한 남인 정권 아래에서 왕비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가 관례를 뛰어넘어 총융사(摠戎使)로 발탁되고, 역관으로 막대한 재부를 이루고 있던 장씨 가문의 인물들은 과도한 사치로 눈총을 받았다. 1691년(숙종 17)에는 폐위되었던 인현왕후의 궁인이었던 최씨가 새로 후궁이 되는 등 왕실 내부의 여건도 남인 정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에 일어난 두 고변 사건으로 다시 정국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1694년 3월 우의정 민암(閔黯)이 소론계 한중혁(韓重赫)이 돈을 모아 장희재나 동평군 항(東平君 杭) 등 실권자에게 접근하여 궁중의 틈을 엿보았고, 김춘택(金春澤) 등도 이에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의 고변을 아뢰었다.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문초를 했으나 완강하게 부인하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던 때에 또 다른 고변서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장희재가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숙원(淑媛) 최씨를 독살하려 했고, 또 신천군수와 훈국별장 등이 반역을 도모하는데 민암 등 남인이 결탁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국청의 조사결과 이 고변은 허구로 지어낸 것으로 귀결되는 듯 했으나 다음 날인 4월 1일 민암이 최초의 고변의 사주자라는 것이 밝혀진 후 숙종은 다시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남인계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이 관작이 삭탈되어 문외출송 당했고 민암, 유명현(柳命賢) 등이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3 갑술환국 이후의 정국

갑술환국으로 그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남인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직당했다. 남인의 정치적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갑술환국으로 축출된 남인은 그 이후로 ‘기사여당(己巳餘黨)’으로 불리며, 종신토록 벼슬길이 막히는 폐고(廢錮)되었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다. 더욱이 일부 남인들이 영조대 무신란에 참여하면서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후 남인들은 영조대에 탕평 정국에서 청류 오광운(吳光運)이 탕평책에 호응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 이후 채제공(蔡濟恭)이 정조대까지 남인들의 구심 역할을 하며 정계에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정권을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갑술환국 이후 서인의 정치적 주도권은 더욱 확실해졌다. 4월에는 송시열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도록 했고, 기사환국 이후 문묘에서 출향되었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도 다시 실현되었다.

오랫동안 폐서인되어 친정집으로 돌아가 있던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왕비 장씨는 다시 옛 작호로 강등시켰다. 다만 세자의 생모로서의 지위는 유지하도록 하고 사친에 대한 예를 취하도록 했다. 그러나 희빈 장씨는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었을 때 저주를 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후 세자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도 위태로워졌고, 왕세자를 보호하려는 소론 계열과 이에 반대하는 노론 계열의 대립도 격화되어 가면서 경종대의 정국 갈등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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