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경복궁 중건

경복궁 중건

폐허가 되었던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다시 세우다

1865년(고종 2) ~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 대표 이미지

경복궁 근정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1865년(고종 2)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 중건을 결정하고, 1868년(고종 5)에 완공한 사건이다. 경복궁 중건은 19세기 전반기에 지속되었던 세도정치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흥선대원군의 의도에 따라 진행되었다.

2 경복궁 중건의 과정

1863년(고종 즉위) 철종(哲宗)이 재위 14년 만에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철종이 승하하자 당시 대왕대비였던 익종비 신정왕후(神貞王后)는 흥선군(興宣君) 이하응 (李昰應)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으로 익종(翼宗)의 대통을 잇도록 명하였는데, 이가 곧 고종(高宗)이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가문에 집중되어 있는 국가권력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시도 가운데 일어났던 것이 경복궁 중건이었다.

1865년(고종 2) 4월 2일 신정왕후는 대신들에게 경복궁을 중흥(中興)할 것을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신정왕후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폐허가 된 경복궁을 중건하고자 했던 이유로 경복궁이 조선의 개창과 함께 세워진 정궁(正宮)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남편인 익종이 일찍이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헌종도 그러한 뜻을 이어받기는 하였으나 구체적인 시도는 하지 못했다고 언급하였다. 이어서 대신들을 불러서 보는 자리에서 대왕대비는 경복궁 중건의 총책임을 대원군에게 맡기는데, 이를 통해 이미 막후에서 신정왕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교감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경복궁 중건 방침이 정해지자 바로 영건도감이 설치되어 영의정 조두순(趙斗淳), 좌의정 김병학(金炳學)을 도제조로 하여 비중 있는 다수의 인물들이 제조와 부제조로 임명되었다. 영건도감에서는 4월 13일을 공사의 시작일로 정했다. 경복궁 중건 사업에 대해 초반에는 경복궁 중건의 경비를 자진해서 기부하는 형태인 원납전(願納錢)을 통해 많은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1865년(고종 2년)에는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궁성과 내전 구역의 주요 건물들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6월에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과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 신무문(神武門), 영추문(迎秋門) 등 궁성문의 공사 일정이 잡히고, 9월에 인지당(麟趾堂), 천추전(千秋殿), 만춘전(萬春殿) 등도 공정이 정해졌다. 10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창경궁에 있던 자경전(慈慶殿)을 헐어다 자미당(紫薇堂)을 지었다.

1866년(고종 3) 2월 13일 대왕대비가 희정당에서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 수렴청정을 거두겠다고 발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스스로 공개적인 자리에 나와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실권을 행사하기 보다는 경복궁 영건도감에 자신과 연결되는 인물들을 채우고 이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 무렵 권력구조의 변동 속에서 경복궁 중건과 그 실무 기구인 영건도감은 흥선대원군의 권력을 장악하여 행사하는 데 일차적 계기와 기반이 되었다.

1866년(고종 3) 3월 대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공사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같은 해 6월 23일에는 중건 공사 가운데서도 큰 공사에 해당하는 궁성(宮城)과 네 개의 문 공사가 끝났다. 이렇게 공사가 진척되던 1866년에는 병인박해(丙寅迫害),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 등이 일어나는 등 내외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경복궁 중건 공역은 늦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1866년 병인양요를 비롯하여 외국과 마찰을 겪는 탓으로 주춤하였던 공역은 1867년(고종 4)에 순조롭게 진척되어 8월부터는 주요 건물 뿐 아니라 다른 일반 건물들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8월 18일에 1차로 건물과 문의 이름을 정하였고, 이후 11월과 이듬해 6월에 걸쳐 새로 지은 건물들에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8년(고종 5) 7월 2일 고종이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 왕대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 대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를 모시고 경복궁으로 옮겨감으로써 5년에 걸친 경복궁 중건 사업이 일단락되었다.

3 재정운영의 실체

경복궁 영건을 시작할 무렵에는 원납전이 재정 수입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였다. 원납전은 순수한 의미에서 스스로 원해서 내는 돈이라기보다 현실적으로는 강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돈이었다. 때문에 경복궁 영건 초기부터 조정에서는 원납전 강제 징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원납전 징수를 자발성에만 의존할 수 없었던 조선 정부는 원납전을 많이 낸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경복궁 내전 영역이 완성되어 공역의 대상이 외전으로 확장되는 단계인 1866년(고종 3) 10월 원납전 1만 냥 이상을 낸 사람들에게 시상을 하였다. 이 때 대상이 된 사람들은 모두 53명으로 많게는 10만 냥부터 적게는 1만 냥까지 내었다. 시상의 내용은 상응하는 관직이나 관품을 주는 것이었다. 실직(實職)을 주는 것은 매직(賣職)이라고 했는데 관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히 많은 원납전을 바친 사람이 대상이었고, 실직이 아닌 관품만 주는 것을 매관(賣官)이라 했는데, 이는 나머지 대부분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형식의 시상은 이후에 1867년(고종 4) 4월에도 한 차례 더 시행되었으나, 관직과 관품을 무한정 제수하는 데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시상은 한시적으로 시행되었다.

계속해서 원납전을 꾸준히 거두어들임으로써 원납전을 납부한 사람들의 불만은 점차 누적되어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70년(고종 7) 8월 영의정 김병학이 전후 원납인을 6품으로 올려주자는 계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서 원납전은 경복궁 중건 이후 영건도감이 철파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속되었다.

원납전이 영건도감 재정 수입의 주요부분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영건 재정을 충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건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원납전 이외의 다른 재원을 마련하여야 하였다. 원납전으로 거두어들이는 액수가 줄어든 1866년(고종 3) 11월에 원납전 이외의 재정 수입으로 강구된 방안이 당백전(當百錢) 주조였다. 호조에서는 당백전의 자호를 “호대당백(戶大當百)”이라 짓고 주전에 필요한 세칙을 정하여 올렸다. 그로부터 한 달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당백전이 주조되어 12월 1일부터는 통용되었다.

당백전을 주조한 목적은 경복궁 중건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당백전은 군영을 비롯하여 국가 재정 전반에 폭넓게 지출되었다. 당백전은 화폐의 실질 가치의 증대는 없이 명목 가치만 높게 한 것이었으므로 자연히 경제 질서에 혼란을 야기하였다. 원납전 징수와 당백전 발행의 폐단이 계속되었고, 이에 대해 장령 최익현(崔益鉉)은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원납전 징수는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이 거의 사라지고 고종이 실권을 장악할 무렵인 1873년(고종 10) 10월 29일에 가서야 철파되었다.

4 경복궁 중건의 정치적 의도

고종 초년의 공식적인 권력은 수렴청정을 하였던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있었다. 신정왕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실질적으로 국왕을 지명하고, 어린 국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는 방식으로 제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때 신정왕후는 경복궁 중건을 명하면서 총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맡김으로써 흥선대원군에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연간에 한 번도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고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막후에서 상당한 실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 영건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영건도감을 통하여 재정 부분을 비롯하여 영건도감에 관련된 유력한 인사들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직함이 없었던 흥선대원군의 기반과 위상은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섭정이 아닌 현왕의 아버지라는 지위만으로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흥선대원군은 영건 사업이 마무리되고, 고종이 성장함에 따라 점차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전혀 받은 바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역량도 갖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종은 재위 7년이 넘어가면서 점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다.

궁궐 경영과 관련하여 고종의 성장을 보여주는 징표가 1873년(고종 10)의 경복궁 내부에 건청궁(乾淸宮)을 영건했던 일이다. 건청궁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이 퇴조하는 상황에서 고종 스스로의 뜻으로 영건하였다. 고종이 건청궁을 세운 목적은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경복궁 내부에 독자적인 “궁”을 건립함으로써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고 왕권 강화를 이루기 위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루어진 경복궁 중건으로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은 조선 전기의 경복궁보다도 훨씬 더 장대한 규모로 재탄생했다. 궁궐은 기본적으로 국왕의 생활과 국무를 처리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미 창덕궁과 경희궁이 존재하는 가운데 경복궁을 다시 지은 것은 사실상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역대 국왕들에 의해 경복궁 중건에 대한 관심은 표명되어 왔으나,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를 실현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결국 흥선대원군이 세도정권에서 왕권으로 권력을 환원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리고 고종의 성장과 함께 실질적인 권력은 고종에게 돌아갔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