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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박해

두 포도대장의 경신년 천주교도 탄압 기도 사건

1860년(철종 11)

1 우호적인 분위기의 형성

경신박해가 일어난 1860년(철종 11)을 전후로 해서 조선에서는 주요한 천주교 탄압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1866년(고종 3) 병인박해가 그것이다. 이 사건들은 국내 정치세력 간의 대립, 천주교 신앙과 조선의 전통 사상과의 갈등, 외국 세력 진출에 따른 불안감 등이 빌미가 되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숫자의 천주교도들이 순교하는 희생이 발생하였다.

경신박해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기 쉽지만, 당시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포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1849년(철종 즉위) 왕위에 오른 철종은 원래 온건한 성품인데다가 당시의 집권세력인 안동김씨(安東金氏)도 비교적 유화정책을 썼으므로, 천주교는 조용한 가운데 착실하게 교세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정부 차원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는 일은 없었으며, 도리어 지방관에게 천주교도를 고발하였을 때 그들이 다른 잘못을 만들지 않았다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배교자의 밀고가 있었음에도 오히려 불안을 조장한다고 고발자에게 형벌을 가하고, 교우촌을 약탈한 포졸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돌려주게 하는 등의 일이 벌여졌다.

1858년(철종 9) 10월 17일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이를 축하하여 18일에는 구환곡(舊還穀)과 증렬미(拯劣米), 요역을 경감하였고, 경죄수(輕罪囚)는 일체 아울러 석방(釋放)시키고 중죄수는 보석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잡과(雜科)의 초시인(初試人)을 합격시키는 등의 조치도 이어졌다. 그리고 19일에는 보방(保放)한 중죄수를 전부 영원히 석방시키도록 전날의 명령을 바꾸었다. 이때 이전에 귀양 갔거나 옥에 갇혀 있던 천주교도 10명가량이 풀려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풀려나는 과정에서 그 대가로 배교를 요구하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어느 때보다도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세자(領洗者)의 숫자는 늘어났고, 배교자도 차츰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59년(철종 10) 9월말 콜레라가 서울에 유행하였다. 전염병은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그 희생자가 40만에 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선교사 기록은 물론이고 실록의 여역 관련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여역은 1859년과 1860년(철종 11)에 걸쳐 두 차례나 크게 유행하여 큰 피해를 발생시켰고, 민심도 크게 흔들렸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병으로 희생되는 참혹한 상황은 상대적으로 종교에 더욱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베르뇌(Berneux,S.F.) 주교가 불과 몇 주일 만에 서울에서만 1,500여 명의 고해성사를 할 정도였고, 불과 두 달 사이에 예비신자가 800명이나 늘어났다.

2 경신박해의 발생과 의의

그렇게 천주교가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인 상황에서 포교를 진전시키고 있을 때, 경신박해가 발생했다. 1859년(철종 10) 12월말 우변포도대장 신명순(申命淳)과 좌변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신명순은 1859년 2월 14일, 우변포도대장 임태영은 8월 28일에 좌변포도대장으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이 두 포도대장 중 신명순은 신유박해 때 좌변포도대장으로 있던 신대현(申大顯)의 손자였고, 임태영의 아버지는 임성고(任聖皐)였는데 기해박해 때는 좌변포도대장, 병오박해(丙午迫害) 때 우변포도대장으로 있었다. 포졸들을 먹여 살리려고 이런 일을 자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족관계를 고려하면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런 소식은 베르뇌 주교에게 급보로 전해졌고, 다시 다블뤼(Daveluy,M.N.A.) 주교에게도 전달되었다. 급보가 말해주는 것만큼 재난이 크지 않았지만, 옥에 갇히고 약탈당하고 마을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교인들은 산골로 도망하였다. 한동안 숨어 지내던 베르뇌 주교는 이것이 조선 조정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서울 집으로 돌아와 프랑스 선교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물건을 보호할 수 있었다.

신명순과 임태영의 기대 그리고 요청과는 달리 천주교도의 체포는 대규모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의 약탈과 방화 등 불미스러운 만행이 야기되고,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당시의 세도가문인 안동김씨이면서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인 김병기(金炳冀)는 정조 이후 순조, 헌종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를 탄압한 임금들에게 전부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천주교인 체포 문제에 반대하였고, 형조판서 김병운(金炳雲) 은 형조에서 죄인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였고 기해박해 때 대왕대비의 하교 를 인용하며 천주교인의 재산·가구·식량을 약탈하거나 약탈하게 내버려 둔 것에 대해서 포도대장을 비난하였다.

포도대장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냥 풀어준다면 실책을 자인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천주교인들을 마음대로 처형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외국인 선교사를 찾아내어 문제를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 포졸을 지방으로 보내 수색을 확대되었다. 몇몇 신도를 붙잡아 심문하여 선교사들의 조선식 이름이나 여행, 생활, 성사 집행 방식 등을 알아내기는 했지만, 약탈만 되풀이 되었을 뿐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은 신명순과 임태영은 포도대장의 자리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허계(許棨)와 신관호(申觀浩)가 임명되었다. 더 이상의 천주교도의 체포도 금지되었고,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도들도 조금씩 방면하다가 8월 7일 투옥된 교인들이 철종의 명에 의하여 모두 석방됨으로써 9개월간에 걸친 옥사가 종식되었다.

경신박해는 사실상 신명순과 임태영 두 명의 포도대장에 의해 주도된 천주교도 박해 사건이었으나 조정 차원으로 문제가 확대되지 않아 여타의 박해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신박해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특히 관찬사료에 경신박해와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판단된다.

이후로 신명순과 임태영은 포도대장으로 다시 임명된 바 있다. 이것은 이 둘이 소위 경신박해 과정에서 저지른 일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실각할 정도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해프닝에 불과한 경신박해이지만, 고종대에 일어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천주교 탄압 사건인 병인박해에 앞서 철종대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가 착실히 포교되어 가는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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