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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택하다

1680년(숙종 6)

1 개요

1680년(숙종 6) 3월 시작된 경신환국(庚申換局)은 당시 집권당이었던 남인(南人)이 서인(西人)에게 축출당한 정치적 사건을 말하며,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한다. 환국이란 갑작스럽게 정국이 바뀐다는 뜻으로, 역사적 용어로는 숙종 대에 일어난 경신환국,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을 지칭한다. 환국은 정파 간의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존의 정치질서가 무너진 상태에서 어느 한 당파가 정국을 좌우하게 되는 상황을 상정하기 때문에 남인과 서인간의 연립정권이 운영되었던 앞 시기와 비교할 때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특히 숙종 연간의 정치상황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붕당간의 이념・정책 대결이 심화된 시기였기 때문에 일제시기 식민사관에 의해 ‘당파성론’을 언급하는 주요 증거로 활용되었다. 붕당정치의 긍정적 의미와 성리학적 정치이념에 대한 이해 수준의 심화로 현재는 식민사관이 많이 극복되었으나, 여전히 환국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영조(英祖)와 정조[조선](正祖) 대의 탕평정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배경을 제공하는 기재로 설명이 된다. 즉 붕당간의 대결이 극심해지면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하는 캐스팅보트를 국왕이 쥐게 되었고, 자연스레 군주의 성인적 면모와 능력에 의지하는 탕평정치가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국을 붕당정치론의 연장선에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경신환국의 경우 왕실 또는 국왕의 권위확립의 차원, ‘훈척’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 등의 변수를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환국의 시기에는 붕당정치의 틀로만은 수용할 수 없는 다양한 정치 현상이나 정치 집단들이 등장한다. 또한 환국을 기존의 설명대로 붕당정치의 이상 속에서만 평가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붕당간의 치열한 이념 대결의 양상은 현대의 가치로 평가하면 집권욕으로만 비추어져 부정적이지만, 당대 사대부들의 관념상으로는 정치 이념과 이에 따른 정책과 시무의 대결이므로 붕당정치의 쇠퇴기나 변질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두 번의 예송과 숙종의 즉위

숙종[조선](肅宗) 은 현종[조선](顯宗)의 뒤를 이어 1674년(숙종 즉위) 8월 23일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선의 19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숙종의 즉위는 현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인한 것이었으며, 당시 숙종의 나이도 14살 밖에 안 된 다소 불안한 상태였다. 이때에는 제 2차 예송(禮訟)인 갑인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이 집권한 상태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연립정권을 구성한 남인과 서인은 1차 예송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별다른 충돌이 없다가 효종(孝宗)이 승하하고 그의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개월 수에 대한 이견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정태화(鄭太和) 등 서인은 왕도 일반 사대부의 예와 같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효종이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동생인 둘째 아들이므로 조대비는 이에 맞춰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윤휴(尹鑴) 등의 남인의 경우 왕의 예는 사대부가와는 다르게 적용하여 왕통을 이은 효종이 장자의 대접을 받아 조대비가 3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에서는 서인의 설이 채택되어 서인 주도의 정국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1670년(현종 11) 즈음부터는 국왕이 남인인 허적(許積)을 지극히 예우하여 국가와 군사에 관한 대소사를 일임하고, 관직을 제수할 때는 꼭 그의 의견을 듣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서인이 주도하던 정국은 서서히 남인 중심으로 옮겨갔는데, 여기에는 김우명(金佑明), 김좌명(金佐明)을 중심으로 한 청풍 김씨 외척의 힘도 컸다. 청풍 김씨 집안은 기본적으로는 서인이었지만 송시열 등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남인과 제휴하여 정국의 구도를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허적이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에 다시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벌어졌는데, 이는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역시 조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하는지를 두고 논쟁한 것이다. 서인은 1차 때의 입장을 이어서 효종을 차자(次子)로 보고 9개월 설을, 남인은 장자로 보고 1년 설을 주장하였다. 기해예송 때 서인의 입장이 승인되었다면 이때에도 동일한 원칙인 서인의 9개월 설이 채택되어야 했으나 김우명과 김석주(金錫胄) 등이 남인의 설을 지지하고 있었고, 현종 역시 남인의 영수인 허적을 신임하고 있던 상황이라 지난번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2차 예송의 결과로 남인 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었다.

2차 예송이 마무리 될 때쯤에 현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숙종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원상이 되어 국정의 현안을 처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주 유학 곽세건(郭世楗)이 상소를 올려 잘못된 예론을 주장한 송시열이 현종의 묘지문을 쓰는 것이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이에 대해 송시열을 두둔하거나 다시 잘못된 예를 논하는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숙종이 남인들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자 서인들이 사직을 청하기 시작하였지만 숙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이들의 사직을 바로 수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점차 조정은 남인 차지가 되어갔는데, 허목을 이조참판에 제수하면서 조정은 온통 남인들로 채워졌다는 당대 사관의 평가가 이러한 분위기를 말해준다.

3 숙종대 초반의 정치구도와 척신세력

예송에 초점을 두어 정국을 설명하면 남인과 서인의 구도로 당시의 정국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당시 정국은 단순히 붕당간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때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을 나눠보면 송시열과 송준길을 중심으로 하여 이유태(李惟泰),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산당(山黨), 김좌명(金佐明)과 서필원(徐必遠), 이경석(李景奭), 정태화(鄭太和) 등의 한당(漢黨), 원두표(元斗杓), 이후원(李厚源), 이시백(李時白) 등의 대신들을 위시한 일반 관료군, 허적(許積), 오정창(吳挺昌) 등의 남인계 관료군 이렇게 4개의 세력이다.

이러한 세력 구성에 포함되지 않는 또 하나의 정치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왕실과 가까운 종실세력과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 세력이었다. 숙종은 어릴 때부터 ‘삼복(三福)’이라 불렸던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을 총애했기 때문에 이들은 종친임에도 정국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외가인 남인인 오정창(吳挺昌) 형제들, 외척인 청풍부원군 세력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인 삼복은 청풍 김씨인 김육(金堉)이 인평대군의 묘지명을 써준 계기로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다.

김석주가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2차 예송 때에 남인을 지지한 이유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인계 관료인 허적도 이들의 배려 속에 출사를 하여 현종대 후반과 숙종대 초반의 정국을 남인 주도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따라서 숙종대 초반의 정국은 삼복 형제와 청풍김씨 외척, 남인 관료군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국이었다.

그런데 갑인예송의 여파로 송시열이 지나치게 수세에 몰리고 남인들이 큰 세력을 형성해가자, 외척 김석주 측은 남인들을 적절히 제어할 필요를 느꼈다. 숙종마저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서인 산당 계열을 다시 조정에 부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외척 세력은 남인 관료군들과는 물론 삼복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종친 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복창군과 복평군이 궐내에서 궁녀와 간통했다는 일을 김우명이 상소한 것이었다.

또한 숙종이 한때 병환이 있어 후사 문제를 두고 조정이 뒤숭숭할 때 호위군과 병권의 장악 문제를 두고도 외척과 종친 세력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4 경신환국의 발생과 서인의 재집권

1680년(숙종 6) 3월 19일 숙종은 허적의 조부인 허잠(許潛)에게 시호를 더하여 내려주는 것을 기념하는 잔치에 필요한 물품들을 넉넉하게 내려 주라고 명했다.

이날따라 비가 왔기 때문에 숙종은 배려하는 차원에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름을 친 천막을 보내주라고 했다. 그런데 숙종은 허적이 이미 허락도 받지 않고 왕실 물품인 유악을 먼저 가져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숙종은 크게 화가 났다. 숙종은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 신여철(吳始復)을 불러서 유혁연을 해임하고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총융사로 삼는 급작스러운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철원에 귀양을 가 있던 서인 인사 김수항을 사면하고 남인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을 파직시켰다. 더불어 그 동안 허적에게 쌓였던 불만들을 표출하며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붕당간의 화합에 힘쓰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였다는 비판을 하였다.

허적은 더 이상 정승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숙종의 불신임이었다. 숙종은 허적에게 사직을 권하였고, 마침내 허적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또한 같은 날 허적의 세력인 윤휴와 민암(閔黯)의 삭탈관작과 귀양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숙종은 별다른 지시 없이 허락을 하였다.

4월 3일에는 영의정에 김수항, 좌의정에 정태화, 도승지에 남구만(南九萬)을 임명함으로써 서인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삼복형제와 나머지 남인들에 대해서도 유배와 삭탈관작의 조처가 행해졌다. 약 보름에 걸친 이 일은 표면적으로는 숙종이 왕실을 가볍게 여긴 허적의 태도에 화가나 단행한 인사개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숙종의 정국 주도 의지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서인계 인사들이 조정에 대거 진입한 뒤 정원로(鄭元老)에 의한 ‘삼복의 변’이 고변되었다. 그것은 삼복형제와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이 숙종이 지난 번 환후로 고생할 때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정원로에 따르면 허견과 삼복형제는 숙종이 병환을 앓는 와중을 틈타 도체찰사부 소속의 이천(伊川) 둔군(屯軍)을 특별히 훈련시켰다고 하였다. 도체찰사부는 현종 때에 필요성이 없다하여 폐지되었다가, 윤휴와 허적의 건의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이 기관에 통폐합시켜 군권을 일원화 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허적이 깊이 관여한 도체찰사부가 그의 아들의 역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면, 허적의 죄는 물론 윤휴와 유혁연, 이원정 등 남인 관료들의 죄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허적이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숙종은 최종적으로 이들을 방귀전리(放歸田里), 위리안치(圍籬安置), 감사정배(減死定配) 하는 것으로 처분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사사되었다.

이 사건의 고발자는 정원로였으나 이 역모를 애초에 눈치 챈 사람은 김석주와 김만기 등의 외척세력이었다. 즉, 숙종 초년에 형성된 종친과 외척 세력의 균열이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드러난 것으로 경신환국에서 척신 세력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곧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의 분립이 진행된다. 그 중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송시열과 ‘삼척(三戚)’으로 불렸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연합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9년 뒤 다시 남인계의 후궁 장희빈이 낳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이 때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사사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는데, 경신환국으로 사사된 허적과 윤휴는 다시 복권된다. 그리고 다시 5년 뒤에는 장희빈이 사사되면서 갑술환국이 일어나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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