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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

어머니를 가두고 동생을 죽인(廢母殺弟) 비극적 사건

1613년(광해군 5)

1 개요

계축옥사는 1613년(광해군 5) 봄 재물을 노리고 살인죄를 저지른 박응서(朴應犀)를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등이 유혹하여 면죄의 댓가로 거짓 역모를 고발하게 하여, 영창대군과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비호하던 세력을 조정에서 제거한 사건이다. 영창대군은 1614년(광해군 6) 2월 9살의 나이로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살해당하였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사건의 여파로 1618년(광해군 10) 서궁에 유폐되었다. 박응서 등 일곱명의 서자(庶子)가 관련된 사건이라고 해서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불리거나, 주모자로 지목된 서양갑(徐羊甲)의 이름을 따서 ‘서양갑의 옥사[徐獄]’, 고변자의 이름을 붙여서 ‘박응서의 옥사’라고도 불리운다.

2 계축옥사의 배경

고(故) 목사 서익(徐益)의 첩의 아들인 서양갑(徐羊甲), 고 감사 심전(沈銓)의 첩의 아들 심우영(沈友英), 허홍인(許弘仁), 고 정승 박순(朴淳)의 첩의 아들 박응서, 박충간(朴忠侃)의 첩의 아들 박치의(朴致毅) 등이 생사를 같이 할 친구 관계를 맺고 때도 없이 어울려 돌아다녔다. 서얼금고(庶孽禁錮) 법에 묶여서 재주가 있어도 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양강(昭陽江) 가에 같이 살면서 집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고, 시를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서 낙을 삼았다.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도 하고,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 1)부터는 여주(驪州) 강변으로 거처를 옮긴 뒤 각 집안을 합쳐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금장수를 하기도 하고 노비를 추심하러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결국 도적이 된 이들은 1613년(광해군 5) 3월 조령(鳥嶺) 길목에서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하는 사건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었다. 단순 강도사건은 갑자기 역모사건으로 비화한다.

광해군 정권은 초반부터 역모사건을 통해 정치적인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유영경(柳永慶)-임해군(臨海君)-김직재(金直哉)로 이어지는 역옥(逆獄)을 통해 대북파는 정치적 권력을 쟁취해 나갔고, 광해군은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영창대군이 존재하는 한 이런 상황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밖에 없었고, 박응서 등의 강도행각은 도화선에 불과하였다.

3 옥사의 과정

옥사는 박응서가 “은화(銀貨)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하였다.”라고 역모가 있었음을 알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고변은 이이첨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맨 처음 한희길(韓希吉)은 관계된 인물들이 명가의 자제들인 만큼 처리를 주저하고 있던 중에 이이첨이 듣고는 문생인 김개(金闓)와 함께 행상인을 죽여 사형당할 처지의 박응서를 꼬셔서 거짓으로 자백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박응서 입에서 나온 격문(檄文)도 문체가 김개의 작품과 비슷했다고 하고, 김개도 ‘이 옥사에 자신이 가장 공이 높다’고 자부하였고 이이첨도 인정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광해군은 보고를 받고 대신들과 상의하여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철저히 국문하도록 지시하였으며, 박응서는 의금부의 특별 감방에 가두도록 하였다. 곧바로 광해군의 친국이 서청(西廳)에서 열렸다. 박응서는 서양갑·심우영·허홍인·박치의·박종인(朴宗仁)·김평손(金平孫)·김경손(金慶孫)·이경준(李耕俊)·정협(鄭浹)·김비(金秘)·유인발(柳仁發)·서인갑(徐寅甲)·유효선(柳孝先)을 관련자라고 하였고, 이 가운데 서양갑과 박치의가 주모자라고 하였다.

이미 7년 전 여주 강변에서 모여 지낼 때부터 적서차별 때문에 출세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여 반란을 모의하였고, 그 사이 선조가 죽은 직후에는 중국의 사신을 죽이고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고, 1612년(광해군 4)에는 격문을 사대문에 붙여 민심을 동요케 한 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지만 김직재의 옥(金直哉-獄)이 일어나서 실행하지는 못하였다고 했다.

드디어 1613년(광해군 5) 봄 은상(銀商)을 죽이고 6, 7백 냥을 얻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뇌물을 써서 선전관(宣傳官)이나 내금위(內禁衛)·수문장(守門將)·훈련대장 등의 관직을 얻고 3백여 인의 사람들과 돈으로 결탁하고 대궐을 습격하여 반란을 성공시키고 관직을 나누어 가질 생각이었다고 진술하였다.

김비·박치인·심우영을 시작으로 공모자들도 속속 체포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공모자들의 일가친척과 하인들도 붙잡혀 와서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박응서가 주장한 역모의 가담 여부를 부인하였으며, 박응서가 주장한 내용도 대부분 조리 있게 반박하였다.

하지만 박응서는 역모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김건(金腱)·신윤선(辛胤先)·김자점(金自點)·신경식(申景植)·기수격(奇秀格)·권순성(權純性)·성익진(成益振) 등 친구 7명을 더 끌어들였다.

4월 28일에는 주모자로 지목된 서양갑이 의금부로 잡혀왔고, 마찬가지로 주모자로 지목된 박치의를 전국에 수배하였다.

주모자 서양갑도 조령에서의 살인사건은 ‘아비를 죽인 반노(叛奴)에 대한 복수’를 박응서가 부탁하여 저지른 일일뿐이며 역모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러자 관련자나 관련자 주변인에게 형신(刑訊)하거나 압슬(壓膝)하기 시작하였지만 대부분 자복하지 않았다.

낙형(烙刑)으로 고문의 수위도 높아졌고, 바른 대로 공초하면 별도로 처리해 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했지만 승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홍인의 처 선이(善伊)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역모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허홍인의 노비 덕남(德男)도 형신을 가하자 ‘흉악한 모의와 비밀스러운 계책’을 의논한 바가 있다고 자복하였다. 이렇듯 주변인에게서 자복을 받아내어 관련자로 지칭된 사람들을 압박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련자의 어머니나 어린 자식들도 심문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자식이 보는 앞에서 그 어미를 고문하여 자백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5월 4일 심우영의 14세 아들인 심섭(沈燮)이 한차례의 형장에 “서양갑이 괴수가 되어 여주(驪州)와 이천(利川)의 군사를 가지고 서울을 공격하려 하였다.”라고 자복하였고, 심섭에게는 이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관련자로서 심문을 받아오던 심우영·박종인도 승복하였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후로 관련자가 인정하면 곧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사건의 방향이 영창대군과 그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법대로 처리하자는 의견이 매일 같이 제기되었다.

5월 6일에는 주모자로 지목된 서양갑이 같이 고문을 받던 어미와 형이 모두 죽고 난 상황에서 가해지는 형신을 견디지 못하고 역모에 대한 것을 승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양갑은 오히려 주모자는 본인이 아니라 김제남이라고 주장하였고, 선조의 고명대신(顧命大臣) 허성(許筬)·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한준겸(韓浚謙)·서성(徐渻) 등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사건은 점점 확대되었고 김제남의 관련성도 확고한 것으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자복한 서양갑도 같은 날 바로 환형(轘刑)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파직상태였던 김제남에게는 당연히 관작이 삭탈되는 조치가 내려졌고, 서양갑이 자복하면서 언급한 사람들도 줄줄이 잡혀 와서 의금부 옥사만이 아니라 전옥(典獄)까지 죄인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붙잡혀 온 사람들이 거짓으로 이름을 댄 사람까지 체포되면서 옥사는 처리된다기 보다는 날을 거듭할수록 자꾸 확대되는 모양새였다.

영창대군 보호를 고명한 선조(宣祖)의 글을 받은 일곱 신하는 이미 죽은 자까지도 사판(仕版)에서 삭제되는 조치가 내려졌고, 오래도록 고문을 받아온 사람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으며 역모에 연루되었음을 인정하면 곧바로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자복 없이도 다른 사람의 말만으로도 죄상이 인정된다고 해서 사형을 당하게 되기도 하였고 고문과정에서 죽은 사람에게 추가로 형을 집행하는 일도 있었다.

5월 16일 고명대신 박동량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역모에 관련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과거 영창대군 군방의 사람들이 선조가 병환에 시달린 이유를 본인의 사촌 누이인 의인왕후에게 돌리고 무당과 함께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었다.

이 이야기 또한 옥사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요소가 되어 모든 화살이 김제남과 영창대군 나아가 대비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능참봉과 내관이나 나인들이 잡혀와 심문을 받게 되었고 관련 무당을 색출해 내기 위한 조사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옥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김제남의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졌지만, 김제남에 대한 조사는 계속 미루어지던 상태였고, 그나마 김제남은 단식하면서 억울함을 내비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5월 23일부터는 김제남의 아들인 김내(金琜)와 김규(金珪)에 대한 형문이 시작되었고, 다음날에는 계속 거부해 오던 김제남에 대한 처리문제를 광해군이 직접 언급함으로써 결론이 임박하였음을 드러내었다. 25일 위리안치의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유배 대신 처형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욱 거세어졌다. 결국 28일 사사(賜死)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곧바로 다음날에는 영창대군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라는 결정이 내려졌으며 30일에는 이에 대한 전교가 있었다.

김제남은 6월 1일 서소문(西小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리고 김제남의 아들 세 명과 사위 한 명도 모두 장형(杖刑)으로 죽었다.

하지만 양사, 홍문관, 대신, 종친부는 폐서인된 영창대군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죄를 물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또한 광해군이 계속 거절하는 듯하였으나 6월 21일에 우선 궁궐 밖 여염집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이로써 영창대군은 죄인으로 확정되는 모양새가 갖추어 졌으며, 김제남을 죽인 것과 더불어 옥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고 하겠다. 7월 15일 세자가 백관들과 함께 하례하자 광해군이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그간의 옥사의 성과를 교서의 내용으로 정리한 것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옥사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된다. 한 달쯤 뒤인 7월 24일 영창대군을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린다. 물론 그 사이에도 각종 국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역적으로 확정된 이들의 처첩과 일가친척 등의 처리문제도 논의 후 집행하였다. 영창대군은 8월 2일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

이 무렵부터 형문을 받는 사람들도 급격히 줄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옥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아직 잡아들이지 못한 주모자 박치의를 잡아들이는 사안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처단해야 한다는 요구도 중단되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겨서 옥사는 지속되었고, 김제남의 막내아들 김선(金瑄)이 해가 바뀌어 나이가 찼다고 해서 잡아들여 국문하는 지경이었다.

끊이지 않고 지속되던 옥사와 영창대군에 대한 처별 요구는 결국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것으로 모두 종료되었다.

당시 정항은 9살이던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으며 주는 밥에도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먹지 못하게 해서 굶겨 죽였다고도 하고,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하여 태워죽였다고도 한다.

4 계축옥사의 결과

가장 중요하게는 영창대군이 살해되었고, 그 외조부인 김제남이 사사(賜死)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시발점인 은상 살해사건의 가담자들 자체가 서출이라고는 해도 유력 집안의 자제들인데다가 역모사건으로 비화하는 와중에 선조의 고명을 받은 일곱 명의 신하가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대비의 아버지가 주모자라고 해서 옥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원이 조사를 받았으며,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처리된 인원과 사적으로 관계가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처벌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조정의 많은 신료들이 유배를 가거나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이미 즉위 초반 대북파에 의해 유영경 등 소북인사들이 축출된 데다가 계축옥사로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몰락하게 되면서 대북파에게 정치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이미 계축옥사 중에 광해군의 직접적인 지시로 왕자의 난 때 방석(芳碩)의 생모인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처치한 절목을 실록에서 상고하라고 지시가 있었으며, 처리가 늦어지자 여러 차례 독촉한 바가 있었다.

이는 광해군 스스로가 인목왕후의 처리문제를 고심한 것이며, 은연중에 옥사를 대비 인목왕후와 연결 짓고자 하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영창대군, 김제남, 유릉 저주 사건 등 계축옥사의 주요 내용과 어느 것 하나 대비와 무관한 것이 없다보니 결국 계축옥사 자체가 대비의 폐출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비는 서궁으로 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격식을 낮추는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이 모든 옥사의 출발점이었던 박응서는 살인죄를 저지른 범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목숨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관직으로 복귀되었고, 공로에 대한 상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모든 것이 바뀌어 박응서는 물론 계축옥사와 이후 폐모론에 연관된 주요 인사들은 반정 직후 처단됨으로써 모든 결과가 뒤집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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