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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첩

백지 임명장, 돈으로 사고 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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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첩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조선 시대에 발행된, 수취자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은 백지 임명장이다. 이름[名]이 비어[空] 있는 문서[帖]라는 의미이다. 협의로는 관직·관작을 수여하는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만을 의미하지만, 포괄적으로는 양역(良役)을 면제해 주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 천인(賤人)이 수행해야 하는 천역(賤役)을 면제하여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가하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 혹은 노비면천첩(奴婢免賤帖), 향리(鄕吏)의 역을 면제하는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 등이 포함된다. 주로 군공을 세우거나 국가에 곡식을 바친 사람에게 대가로 주어졌다.

2 전란과 공명첩의 탄생

조선 시대의 공명첩과 비슷한 형태가 고려 말에도 보이지만, 공명첩이 본격적으로 탄생한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당시 곳곳에서 관군이 무너져 전세가 급박해졌고, 군사를 급히 모집하기 위해서는 군공에 대해 상을 주어 사기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또한 명군(明軍)이 원군으로 오게 되자 군량의 모집이 중대 현안으로 떠올랐고, 이는 백성들이 나라에 곡식을 바치는 일, 곧 납속(納粟)을 장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592년(선조 25) 11월 조정에서는 적을 죽이거나 곡식을 바친 자, 미세한 공을 세운 자들에게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과 면천첩(免賤帖), 면역첩(免役帖)을 상으로 주었으며, 이름을 비워두었다가 응모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이름을 써서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공명첩의 시작이다. 또한 1592년 12월 및 1593년(선조 26) 2월에는 군량을 급히 마련하기 위하여 향리·사족·서얼·공사천(公私賤)에게 납속을 받고, 그들에게 실직(實職) 및 영직(影職: 이름뿐인 관직)의 제수, 면향(免鄕)·면역(免役), 허통(許通), 종량(從良: 천인을 양인으로 만들어 줌)을 허락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는 많은 수의 공명첩이 발급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임진왜란이 마무리되면서 공명첩의 발행이 중지되고 남아 있는 공명첩도 소각되었으나, 이미 전쟁 기간 동안 막대한 수의 공명첩이 민간에 풀린 뒤였다.

일단 종결되었던 공명첩의 발행은 광해군 이후 재정수요의 증가로 납속책이 다시 실시되면서 재개되었다. 광해군은 대대적인 궁궐 영건 사업을 벌였는데, 이는 전란 후 황폐해진 국토에서 나오는 조세 수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필요한 목재와 쌀, 베 등을 얻기 위해 대대적인 납속책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라 다수의 공명첩이 남발되었다. 이로 인해 관직자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군역을 비롯한 각종 역을 수행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조가 즉위하자 광해군대의 무제한적 납속책은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이괄의 난·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을 겪고, 이후 청의 압력으로 명과의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군량 등의 물자를 급히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으로 인한 구휼을 위해 곡식을 모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명첩의 발행이 재개되었다. 재정적 필요에 쫓긴 조정에서는 공명첩의 가격을 인하하고, 납속 대상자를 확대하며, 양인(良人)이 공명첩을 구매할 경우 군역을 면제해주는 등의 조치를 펴 공명첩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공명첩을 통해 물자를 모으는 일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3 기근과 공명첩의 제도화

위기국면이 진정된 효종 연간에는 필요에 따라 몇 차례 공명첩을 발행하였으나, 대대적인 발행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현종·숙종 연간에는 경신대기근(1670~1671)·을병대기근(1695~1696) 등 대규모의 자연재해로 인해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고, 이를 구휼하기 위해 많은 양의 곡물을 수집해야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남한산성·북한산성·대흥산성 등을 수축·보수하였는데, 여기에도 막대한 재원이 들어갔다. 따라서 현종·숙종 연간에는 이전 시기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공명첩이 남발되었다. 특히 1690년(숙종 16)에는 전국적으로 2만 장이나 되는 공명첩을 나누어 판매하는 등 공명첩의 발행 및 판매가 절정에 이르렀다. 전국적으로 공명첩이 발행되지 않더라도, 흉년이 들면 각 도에서 수백 장에서 1천 장에 이르는 공명첩의 발행을 요청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흉년으로 인해 공명첩의 발행 및 판매가 시급해진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공명첩의 판매를 원활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구체적으로는 공명첩의 가격을 전반적으로 인하하였으며, 관작을 둘러싼 명분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납속자들의 기호에 맞추어 더 많은 공명첩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변통하였다. 또한 승통정첩(僧通政帖)을 발매하는 등 새로운 종류의 공명첩을 발행하여 납속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하였으며, 사족뿐 아니라 양인과 천인에게도 다양한 공명첩을 구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공명첩의 공급이 과도하여, 규정된 값을 받지 못하고 공명첩을 헐값에 팔아넘기거나, 심지어는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공명첩을 강매하는 일도 벌어졌다. 또한 가선(嘉善)·통정(通政)·절충(折衝) 등 높은 품계의 공명첩을 사들인 양인들이 군역에서 빠짐으로써 군역을 담당할 인구의 감소를 초래하기도 했다.

따라서 숙종 이후 영조·정조 연간에는 공명첩의 남발, 강매, 군역 담당자의 축소 등 폐단을 인식하고 이를 제도화하여 방지하고자 하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우선 군역을 담당할 양정(良丁)의 감소를 막기 위해 가선(嘉善)·통정(通政)·절충(折衝)의 공명첩을 구입한 사람에게는 그 자신의 영화에 그치게 하고 군역을 면해주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들에게는 실직의 제수를 불허하였다. 또한 실직인 찰방(察訪)을 제수하여 매관(賣官)이라 비판받는 찰방첩(察訪帖)의 판매를 불허하였으며, 경외(京外)에 큰 흉년이 든 경우가 아니라면 공명첩을 발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울러 공명첩의 숫자를 제한하고, 공명첩의 발매 때마다 수령들이 백성에게 강매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 이러한 내용은 『속대전(續大典)』 및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반영되어 법제화되었다.

또한 납속책의 다른 방식으로서 흉년시 부민(富民)들에게 곡식을 바치거나 나누어줄 것을 권장하고 그에 대하여 사후에 포상하는 제도인 권분(勸分)이 실시됨으로써, 국가재정상 공명첩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은 낮아졌다.

하지만 영조·정조 역시 공명첩의 발매 자체는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흉년으로 인한 기근은 이 시기에도 심각한 문제였고, 구휼을 위해서는 공명첩의 발매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1731년(영조 7)에는 8,000장, 이듬해에는 6,100장, 1762년(영조 38)과 1763년(영조 39)에는 12,300장의 공명첩을 각 도에 보내어 판매하였으며, 『혜정요람(惠政要覽)』에 따르면 정조 연간에도 1776년(정조 즉위년)부터 1793년(정조 17)까지 18년 동안에만 총 23,310장의 공명첩을 발매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산성의 수리, 사찰(寺刹)의 중수 등을 위해 공명첩을 발급하기도 했다.

이후 19세기에도 공명첩의 발매는 지속되었고, 영조·정조대에 정해진 법규정에 따라 발행 및 판매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도정치기 국가재정의 고갈과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인해 공명첩을 비롯한 납속책 역시 무절제하게 운영되는 폐단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명첩의 발행은 조선 말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4 공명첩의 폐단과 불가피성

공명첩은 본질상 매관매직(賣官賣職)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공명첩의 발매는 사회의 명분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소중히 취급되고 적임자에게만 제수되어야 할 관직(官職) 및 관작(官爵)을 곡식만 내면 무자격자라도 누구나 취득할 수 있다는 현상은 국가 입장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명첩에 대한 비판 여론은 일찍부터 존재하여, 정약용은 돈을 받고 직첩(職帖)을 파느니 차라리 권분(勸分)을 권장하고 진휼에 공을 세우면 봉사(奉事)·직장(直長) 등의 하급 관직을 상으로 주자는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공명첩의 발매에 양정(良丁)의 감소, 명분질서의 문란, 관직의 남발, 강제 판매를 통한 민간 수탈 등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로서는 재정수단으로서의 공명첩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세제의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조선 후기 국가재정은 그다지 넉넉한 편이 못 되었다. 게다가 농업경제를 영위하던 조선시대, 갑작스레 찾아오는 흉년은 평시의 저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위기를 초래했고, 당장 구휼을 실시하여 굶어죽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이라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공명첩의 판매는 구휼에 매우 유용하였는데, 예를 들어 1690년(숙종 16)에는 2개월 만에 공명첩 10,280장을 팔아 43,965석(石) 5두(斗)의 막대한 곡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구휼을 위한 공명첩의 발매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서 정당화되었다.

구휼 이외의 경우에도 공명첩의 발매는 국가 입장에서 편리한 재정확보 수단이었다. 금융·화폐경제가 일반화된 현대와는 달리, 조선 시대에는 긴급한 재정수요가 생겼을 때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방식을 취할 수가 없었고, 추가 예산의 편성도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명첩의 발행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공명첩의 불가피성 및 그 폐단을 인식한 위에, 조정에서는 앞서 본 바와 같이 공명첩을 통해 실직을 제수하거나 군역을 면제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또한 꼭 필요한 상황에 한해서만 공명첩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공명첩의 발행은 진휼청(賑恤廳)이나 각 도의 관찰사 및 감진어사(監賑御史), 재정이 필요한 해당 관청에서 발매를 요청하면 국정 최고기관인 비변사(備邊司)에서 여러 대신들이 모여 가부를 의논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얻은 뒤에야 인사 담당기관인 이조·병조에 명령을 내려 발행하게 된다. 발행된 공명첩은 지방으로 보내져 최종적으로는 수령에 의해 지방민들에게 판매되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또한 팔지 못하고 남은 공명첩은 비변사가 수거하여 없애버리고 장부에 기록하는 사후조치를 취하여 허가되지 않은 공명첩이 유포되는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5 일반 백성들에게 공명첩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공명첩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반대급부로 받았을까? 공명첩을 통해 사족들은 높은 명호(名號)를 통해 가문의 위세를 높이고, 나아가 실제 관직에 제수되기를 원했으며, 서얼은 허통(許通)되어 일반 사족과 마찬가지로 관직에 오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랐고, 일반 백성들은 군역에서 빠지기를 기도했으며, 천인들은 양민이 되고자 하였다. 즉 공명첩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일부 사족들은 많은 곡식을 바치고 실직을 제수 받거나 자급(資級)을 올려 받았고, 일반 양인이나 천인들도 공명첩 발급 초기에는 군역·천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공명첩은 기본적으로 실직이 아니라 명예직을 파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명첩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공명첩 구매자에 대한 실직 제수는 엄격히 제한되었고, 공명첩으로 얻은 관작에는 ‘납속(納粟)’ 혹은 ‘가설(加設)’이 붙어 정식 관작과 구별되었다. 이는 일반적인 임명장과 달리 공명첩에는 ‘납속(納粟)’·‘가설(加設)’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으며, 호적에도 직역에 ‘납속(納粟)’·‘가설(加設)’을 반드시 기재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공명첩을 구매한다 해도 향촌에서 유세할 수 있었을 뿐, 이로 인해 출세할 수는 없었다.

아울러 공명첩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 군역을 져야 했던 양인층이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실직을 제수 받지 못하고 군역과도 무관한 노직(老職) 가선(嘉善)·통정(通政) 공명첩이었다. 공명첩 발급이 제도화된 영조대 이후 일반 양인은 공명첩을 구매하더라도 일반적인 신역(身役)만을 면제받을 수 있었을 뿐, 군역은 결코 면제받지 못하였다. 또한 공명첩으로 얻은 관작 및 신역의 면제는 1대에 한하는 것이었고, 자손에게 세습되지 않았다. 신분 상승도, 군역 면제도 불가능한 공명첩은 당시 백성들에게 큰 매력이 없었던 것이다. 공명첩이 신분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한 원인이기는 했으나, 그 영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공명첩을 파는 경우는 대부분 흉년으로 인해 구휼곡을 모으기 위해서인데, 흉년에 곡식을 털어 공명첩을 구입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후기로 갈수록 공명첩을 구매하려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지방관들이 할당된 공명첩을 억지로 팔아넘기는 일도 늘어났다. 현존하는 공명첩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이 있는데, 이는 공명첩을 사들이고도 자신의 이름을 써넣지 않은 것이다. 즉 그만큼 공명첩의 가치가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관점에서 공명첩은 유용한 재정보충 수단이었으나, 백성의 입장에서 공명첩은 신분 상승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가 강제적으로 부과하는 부담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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