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균역법

균역법

군역 부담을 경감하여 민생 안정을 꾀하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 대표 이미지

균역사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균역법 시행 배경

균역법은 백성들에게 부과된 군역(軍役)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조선 후기 영조(英祖) 시기에 시행된 재정 제도이다. 조선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良人) 남성에게 군역을 부과하였다. 이들은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뉘어 정군은 실제로 역을 담당하고 보인 2명이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많은 병력을 동원해야하는 큰 전란이 발생하지 않아서 군대 조직을 체계적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차츰 약해졌다. 이에 정군들을 병력으로 활용하는 대신 서울에서 진행하는 높은 강도의 토목 공사에 동원하는 등 기타 잡역에 투입하는 비중이 증가하였다.

정군들은 역을 지는 동안 거주지를 떠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생업을 포기해야 했고, 보인으로부터 받는 경제적 지원은 그 손실분을 모두 메우기에 부족하였다. 그러자 직접 서울에 올라가 역을 수행하는 대신 보인에게서 받은 비용을 서울의 다른 이에게 지급하고 자신의 군역을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군역은 고된 일이었기에 대신 역을 수행할 이들은 점차 높은 비용을 요구하였고 정군은 이를 다시 보인들에게 전가하였다. 그러자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보인들이 도망가는 경우가 속출하였고, 보인의 도움 없이 혼자 비용을 부담할 수 없던 정군들 역시 도산하게 되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양인 남성들로부터 포(布)를 수취한 뒤 직접 역을 담당할 이들을 확보하기로 하고, 1541년(중종 36)부터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시행해 나갔다.

이처럼 역을 포로 대신하는 군포제는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본격화되었다.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중심으로 한 오군영 체제가 운용되면서 중앙에서는 군역을 수행할 이들을 직접 모집하였고 양인들에게서 수취한 포를 활용해 비용을 충당하였다. 이처럼 군역이 특수한 직역(職役)이 되면서 양인들은 군역을 지는 대신 일괄적으로 1인당 2~3필의 포를 납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토지가 황폐화되고 인구마저 감소한 탓에 살아남은 이들은 전보다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더욱이 군포는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고 개별 호(戶)에 속한 성인 남성의 수에 따라서 부과할 양이 결정되어서 부담이 고르지 못한 상태였다.

군포의 부담이 커질수록 부정한 방법을 통해 포의 납부를 면제받으려는 이들이 증가하였다. 당시에는 양인 남성에게 일괄적으로 군포가 부과되었는데 양반의 경우 예외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에 교생(校生)이나 원생(院生)과 같이 양반에 준하는 신분을 얻어 군포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양인들이 생겨났다. 반대로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승려나 노비가 되기를 택하면서까지 조세 부담을 피하려는 이들도 증가하였다. 그 결과 숙종(肅宗) 대에 이르면 노비가 양인보다 많다는 지적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평균적으로 한 호당 4~5명 분의 군포를 납부해야했는데, 1명당 2필을 징수한다고 하면 8~10필 가량을 부담해야 했다. 양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모든 부담이 돌아가자 이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는 경우가 속출하였고, 본래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군포는 남아있는 친족이나 이웃들이 부담하게 되면서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에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조정에서는 군포의 징수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2 양역변통논의(良役變通論議)

양인 남성에게 부과된 군역의 과중함은 효종(孝宗) 대부터 이미 수차례 지적되어 왔다. 1659년(효종 10) 당시 병조참지(兵曹參知)였던 유계(兪棨)는 성인 남성은 사대부의 자제라 할지라도 모두 고르게 군포를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양역 부담의 불균등 문제를 해소해 보고자 하였으나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의 반대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이후에도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주축으로 군제 개편을 통한 군비 감축으로 양인들의 부담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군포 부담의 과중함과 불균등함을 개선하려는 양역변통논의는 숙종 초부터 본격화되었다. 1677년(숙종 3)에 양인 남성 1인 당 포를 부과하는 대신 매 호마다 호포(戶布)를 부과하자는 논의가 등장했다. 4년여 간 논쟁이 지속되었는데 대신들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1698년(숙종 24)에 다시 숙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양역 개선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역시 관료들 간의 논쟁만 이어질 뿐 성과를 얻지 못했다. 1703년(숙종 29)에 비로소 영의정 신완(申玩)의 주도로 양인의 군역 부담을 개선하기 위한 기구인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이 설치되었고, 오군영을 과거의 오위제(五衛制)로 복구하면서 군제 개편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군포 부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영조가 즉위한 이후 양역변통논의가 재점화 되었다. 영조는 1734년(영조 10) 1월부터 각 도의 양역 부담 실태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고 1742년(영조 18)에는 폐지되었던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다시 설치하면서 양인의 호구 조사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1748년(영조 24)에 전국의 양인 남성의 수와 각각 부담하고 있는 군포의 수량을 조사하는 작업이 완료되어 해당 내용을 기록한 『양역실총(良役實總)』이 간행되었다. 이를 토대로 전국의 군포 부담 상황을 파악하게 된 영조는 기존에 1인 당 부과했던 군포 2필을 1필로 경감할 경우 현재보다 50만 필의 세수(稅收)가 부족하게 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앙의 재정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한 대신들은 군포를 1필로 줄이려는 영조의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를 지지하면서 개혁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750년(영조 26)부터 양인 남성 1인에게서 1필의 군포만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여 부족해진 군포를 보충할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1751년(영조 27) 9월에 공식적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공포하였다.

3 균역법의 시행과 의의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영조가 시행한 균역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군포 부담을 경감하라는 항목이다. 기존에 16개월마다 2필을 납부하던 것을 12개월에 1필을 수납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수군(水軍)으로 등록되어 쌀을 12두(斗)씩 부담하던 이들에게는 4두를 경감해 주도록 하였다.

둘째는 군포를 감액하면서 줄어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다. 일단 기존의 병력을 대폭 감소시켜 군역을 지던 이들이 군포를 납부하도록 바꾸었다.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리고자 한 것이다.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다른 관청에서 보유한 재원을 옮겨오거나, 어염세(魚鹽稅)나 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거두도록 하여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또한 부유한 양인의 자제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위조하여 군포를 기피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일일이 적발해 내는 대신 선무군관(選武軍官)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 대가로 포 1필씩을 징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이러한 계획은 시행 반 년 만에 큰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새로 양역을 지게 된 선무군관들이나 어염세, 선세를 거두고 있던 궁방(宮房) 등에서 불만을 토로해왔다. 결국 영조는 기존의 균역법 내용을 다시 보완하여 1751년(영조 27) 9월에 균역법을 공포하게 되었다.

기존에 각 궁방이나 아문이 점유하고 있던 어염세, 선세를 중앙 기관에서 수취하게 되면서 특정 기구의 특권을 없앤 것이나, 상층 양인들에게까지 군포 부담을 확대하고자 했던 것은 균역법의 긍정적 측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종래에는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던 군포 부담을 1필로 확정한 것 역시 양인들 간의 부담을 균등하게 한 성과가 있었다. 균역법 시행 이전에 양역실총을 작성하면서 전국의 양인 남성의 수를 일괄적으로 파악하려 했던 것 역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균역법은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미흡한 부분이 있다. 양인들의 군포 부담을 줄이고자 액수 자체를 조정하긴 했지만 양인들이 부담해야 하는 양역의 규모는 줄이지 않아서 여전히 과다 징수의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군포를 1필로 감했으나 군포의 근본적인 성격을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시일이 지날수록 잡다한 명목의 추가적인 징수가 생겨났고 부담을 피해 도망가거나 이미 사망한 이들의 군포는 면제되는 대신 다른 양인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말았다. 더욱이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면서 발생한 재정상의 어려움은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다. 균역법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또 다른 사회적 혼란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호하게 균역법을 제정, 공포하면서 백성의 부담을 덜고 균등한 조세 부담을 꾀하였던 영조의 노력은 균역법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높이 평가받아야 할 대목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