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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전권

시전 상인을 보호하라

미상 ~ 1791년(정조 15)

1 금난전권의 등장

조선 시대 서울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시전은 궁궐에 물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시전 상인들은 독점이라는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다. 시전 상인들은 시전 상인 이외의 다른 상인들을 난전(亂廛)으로 규정하면서 난전의 상업행위를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내에 하나의 물종에 하나의 상인만 존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지하던 금난전권은 점차 현실적인 벽에 부딪쳐 유지되기 힘들게 되었고 통공(通共)정책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후기 통공책으로 금난전권이 철폐되기까지 금난전권은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2 시전 중심의 서울 상업

서울은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기본을 두고 건설되었다. 이에 따르면 궁궐의 뒤에 시전(市廛)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조선 초기 서울에서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못하고 궁의 동쪽으로 비켜간 자리에 시전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서울은 불안한 초기 정치상황 때문에 수도가 개경으로 다시 옮겨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시전을 중심으로 개경과 같은 안정적인 도시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안정적인 시전의 발달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궁궐의 수요를 충분히 공급할 정도의 상업이 확립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은 안정적으로 시전을 건설하기 위해 1405년(태종 5) 개경에서 다시 한양으로 환도 한 이후, 1412년(태종 12)에서 1414년(태종 14)까지 세 차례에 걸친 공사를 진행하여 총 2,027칸의 시전을 건설했다. 이 때 건설한 시전행랑에는 중국의 예에 따라 표를 세워 시명(市名)과 판매물종을 기록하였다. 판매하는 물종에 따른 건물 배치 및 조정은 성종대까지 지속되었다. 1474년(성종 5)에 이르러서야 시전 상인들이 물종에 따라 판매하는 행랑을 잡고 관서에 물건을 공급하는 형태의 성립이 일단락되었다.

시전 상인들은 잡다한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달리 새로 만든 행랑에 입주하여 상업활동을 하도록 허가받았다. 시전이 형성되면서 시전은 상세(商稅), 책판(責辦), 잡역(雜役)을 부담하게 되었고, 왕실이나 관청은 반대급부로 필요한 물품을 안정적으로 수급 받았다. 그러나 시전에서 장사를 할 수 있는 상인은 일부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시전에서의 상업활동은 시안(市案)이라는 장부에 등록한 상인들만 가능하였고 독점적으로 관청이나 궁궐에 필요한 물품을 정해진 품목대로 조달하며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대신 관에서는 시전 상인에게 독점적 상업권을 주는 대신 부족한 공물을 마련하거나 외국 사신의 접대물품을 조달하고 또는 각종 잡역이나 국장(國葬)에 관련된 요역(徭役)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 시안에 오르는 일은 큰 제약 요건이나 자격 요건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시안에 수록된 항목은 1453년(단종 1)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시전의 행랑 규모를 칸 수와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이름, 그리고 수공업자들을 서울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던 한성부에서 기록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시안의 원형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도 시적(市籍)을 만들어서 시전제도를 유지 운영하였는데 조선에서도 이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부터 시안제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시안은 영업권을 규정하는 장부라기보다는 상업세를 부과하는 장부로서 기능이 훨씬 컸다. 이렇게 특권적 상업을 보장하면서 시전을 운영하는 업무는 평시서(平市署)에서 전담하였고 시전의 질서 유지는 한성부(漢城府), 형조(刑曹), 사헌부(司憲府)에서 관장하였다. 궁궐이라는 큰 소비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서울의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3 서울 상업의 재편과 난전의 증가

시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서울의 상업은 임진왜란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유지되었던 시전 상인들의 특권과 관서에 지는 부담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반면에 시안에 등록되지 않았던 사상(私商)들은 국역부담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시전 상인들의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되었던 것은 훈련도감 군인들의 상업활동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에 군영이 창설되면서 나타난 훈련도감의 군병들은 월급만으로는 가족까지 부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군병들은 쌀이 아닌 면포로 급료를 받을 경우 면포를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바꾸기 위해 시장에서 교환해야 했다. 관에서는 이들의 형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상업활동을 암묵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대신 군병들의 외모를 기록하고 시패(市牌)를 지급하여 다른 사람이 함부로 훈련도감 군병인 것으로 사칭하여 상업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정도에서 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상권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인들이 시전 상인들이 점포를 개설한 곳에서 동일하게 상업활동을 하는 경우 문제가 불거졌다. 또한 군병들의 상행위가 정해진 자리 외에 장사가 될 것 같은 자리를 골라 물건을 파는 난전 형태의 상업으로 발전하면서 시전 상인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었다. 이런 경우 시전 상인들은 손해를 입게 되므로 군병들의 상행위를 금지시켜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이후 1675년(숙종 1) 새로 창설한 정초군(精抄軍)들이 시장에서 상업활동을 하도록 허용되면서 시전 상인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결국 시전 상인들의 이익 감소가 심각해지면서 관에서는 시전 상인 이외의 사상들이 상업활동을 하는 규정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를 을묘사목(乙卯事目)이라 하는데 훈련도감의 군병들이 상전(床廛)을 열거나 직접 제조한 물건으로 손에 지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면 판매활동을 금지시켰다. 일면 시전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에 훈련도감 군병들은 시위를 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했고, 결국 훈련도감이 시전 상인의 불법적인 난전 단속에 대해 처벌권을 갖도록 다시 사목을 개정하였다. 하지만 시전 상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철시투쟁까지 전개하였고, 결국 시전 상인들의 주장대로 장사하는 훈련도감 군병들도 평시서 시안에 등록하게 하여 시전 상인과 같이 역을 지우는 내용을 올려 숙종의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훈련도감 군인 이외에도 사적인 상업활동을 하는 사상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시전 상인들의 이익이 침해되는 현상은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4 금난전권(禁難廛權)의 형성

난전이 시전 상인들의 이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커지면서 난전을 법적으로 강력하게 금지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난전을 금지하는 소위 ‘금난전권’이 그것이다. 본래 시전 상인 이외에는 도성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 불법이었지만 관계기관의 묵인 아래에서 난전은 별다른 제지 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난전에 대한 법적인 금지조치는 1668년(현종 9)에 형조와 한성부의 금제조(禁制條)의 난전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시안에 등록된 시전 이외에는 도성 안에서 상행위를 금지시키고 있다. 조선 초기에 완성된 『경국대전』의 형전(刑典) 금제조에 난전에 대한 규정이 별도로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임란이후 조선 후기의 시전 상황이 크게 변화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법적인 조항이 마련되기 이전에도 훈련도감 군병들이 허가받지 않고 도성에서 장사를 하는 행위에 대하여 사헌부나 형조의 금리가 출동하여 이를 단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훈련도감 군병들 외에 사상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활성화 되면서 법적인 금지조치를 내려야 할 정도로 시전 상인들의 이권은 크게 침해당하고 있었다. 도성에서 난전을 금지하는 정책은 구체적으로는 난전의 물건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인 속공권(屬公權)과 난전을 잡아들일 수 있는 착납권(捉納權)으로 구성되었다. 난전을 하다 걸린 상인들의 물건을 압수하고 상인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따라서 힘없는 백성들이 난전을 하다 적발될 경우 그 처벌은 매우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권한은 18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시전으로 확대되어 난전을 단속하고 있었다. 정조가 1792년(정조 16)에 난전법이 불과 100여 년 내외의 일이라고 회상하는 언급을 통해 시전이 난전을 전면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면 난전을 단속하는 권한을 시전 상인들이 어느 시기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난전을 단속하는 권리는 처음부터 시전 상인들에게 주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처벌하는 최초의 기록에 따르면 시전 상인들이 사상을 발견하고 서울의 시전을 관할하는 권한이 있던 사헌부, 한성부, 평시서와 같은 관서에 고발한 이후 관서의 관원들이 난전을 잡아들여 처벌하고 있다. 시전 상인들의 경우 자신의 이익을 침범하는 사상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1639년(인조 17) 면포를 허가 없이 팔던 정대민(丁大民), 손사립(孫士立)을 면주전의 행수 등 19명이 잡아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면포 4필을 압수하고 상행위를 저지하였다. 하지만 시전 상인이 이들을 직접 처벌하지는 못하고 한성부에 사상들을 잡아 호송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17세 초반만 하더라도 시전 상인들은 적극적으로 난전을 다스리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난전을 관서에 고발할 수 있는 권한만 갖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체포되어 옥에 갇힌 이들은 죄질이 가벼운 죄수들과 함께 풀어주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어 난전 행위를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17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난전의 처벌을 시전 상인들이 직접할 수 없었고 그 처벌 수위도 비교적 가벼웠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난전을 하는 상인 가운데 궁가나 세력가와 결탁한 경우가 있어 시전 상인들이 함부로 체포하거나 장사를 금지시킬 수 없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1671년(현종 12) 조정에서는 시안에 등록하지 않고 장사하는 난전에 대해서는 시전 상인이 고발하지 않아도 형조, 한성부, 사헌부에서 직접 단속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시전 상인들의 불만을 없애려고 했지만 난전은 서울 상업에서 거스를 수 없는 양상으로 확대되어 갔다. 돼지고기를 취급하는 저육전의 경우 1712년(숙종 38)에 겨우 6~7곳만이 등록되어 운영되었고 그렇지 않은 난전의 경우 7~80곳에 달했던 것은 당시 서울 상업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난전의 폭발적인 증가는 관서에서 통제하는 관리만으로는 난전을 다스릴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에 관서에서 난전을 관리하는 대신 비교적 국역부담의 규모가 큰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시전에 난전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육의전을 중심으로 국역을 부담하는 시전에서는 시전에서 발생하는 각종 불법행위를 자체적으로 규찰할 수 있었다. 또한 시전 상호 간에 벌어지는 분쟁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처결권한을 행사하여 시전을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시전이 관서의 처분 없이도 자체적으로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은 이후 1786년(정조 10)에는 모든 시전 상인들에게 부여되었다. 난전을 하는 상인들 중에는 도고(都庫)로 불리는 비교적 규모가 큰 상인들도 있었고 권세가나 궁궐과 연계를 맺어 힘이 있는 자들이 시전 상인들의 이득을 갈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난전을 금지하는 권한을 시전 상인에게 부여하다보니 백성들이 생필품마저도 구하지 못할 정도로 서울의 상업이 위축되고 있었다. 특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물건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에 난전에 대한 금지령을 철폐하는 통공책이 지속적으로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시전 상인들의 요구로 통공책은 다시 철회되었다.

17세기 이후 서울 상업의 흐름을 종합해 볼 때, 서울의 상업은 한 개의 물종에 한 개의 시전만으로 운영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난전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금난전권으로 시전 상인들은 독점적인 상업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난전의 형성은 금난전권의 확대만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은 결국 육의전을 제외하고는 난전을 금하는 권한을 폐지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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