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기묘사화

기묘사화

훈구파, 조광조를 모함하다

1519년(중종 14)

1 개요

조선 중종대 새롭게 성리학의 도학주의적 정치이념에 따른 개혁정치를 펼쳐가고 있던 조광조(趙光祖) 이하 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의 사림세력이 1519년(중종 14) 국왕 중종[조선](中宗)과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기성의 훈구세력에 의해 거세된 정치사건이다.

2 시대 배경

조선 성종대 신진 사림세력이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이래 사림세력은 지속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조선 중기 선조대가 되면 드디어 정국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사림정치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이처럼 성종대 이후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사림정치가 정착되는 오랜 과정에서 사림세력과 훈구세력간의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게 되는데 이러한 충돌은 대체로 기성의 훈구세력에 의해 신진의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거세되는 사화(士禍)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연산군대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및 갑자사화(甲子士禍)가 그러하며 중종대에는 기묘사화가 대표적이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대 폐정을 시정하며 또 반정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의 국가이념인 성리학에 입각한 왕도정치를 지향하였고 이러한 방향에 따라 연산군대 무오·갑자사화로 밀려나 있던 사림세력들을 점차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림들이 새롭게 결집되기 시작하였으니 조광조를 영수로 하는 중종대 기묘사림이 그들이다.

3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등장

조광조는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던 아버지를 따라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 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게 된다. 김굉필은 성종대 이후 신진사림세력의 상징적 인물이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이를 통해 조광조는 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정통 계보를 잇게 된다. 당시는 사화 직후로 성리학은 '재앙을 부르는 학문'으로 기피되었는데 조광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리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조광조는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한 후 차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성균관 시절부터 조광조는 이미 ‘사림의 영수’로서 그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무오사화를 겪은 뒤부터 사림이 다 죽어 없어지고 경학이 씻은 듯이 없어지더니 반정 뒤에 학자들이 차츰 일어나게 되었다. 조광조는 소시에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성리를 깊이 연구하고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학자들이 추대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는 기사는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조광조는 1515년(중종 10) 성균관 유생 200인의 추천 및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고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함으로써 본격적인 벼슬길에 나아가게 된다. 안당은 조광조 외에도 김식(金湜), 박훈(朴薰), 김안국(金安國), 김정(金淨), 송흠(宋欽), 반석평(潘碩枰)을 뽑아 쓰는 등 훈구대신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림들을 널리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도학정치를 통해 고대 중국의 하·은·주 삼대의 왕도정치를 당대에 구현하고자 하는 열렬한 이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라는 도학주의(道學主義) 정치이념이다. 성리학은 조선의 국가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유교 일반의 사장(詞章) 학풍이 대세였고 성리학의 본령인 도학적 경향은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였다. 신진사림에 의해 성리학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도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높아져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도학적 성향을 본격적으로 표방하고 발휘한 인물이 곧 조광조요 또 그를 영수로 하는 기묘사림세력이다.

4 기묘사림의 ‘지치주의’ 개혁과 그 성격

조광조의 높은 뜻과 기개를 아낀 중종은 조광조와 긴밀히 연대, 개혁정치를 펼쳐나가게 된다. 기묘사림의 개혁정치의 중심에 중종과 조광조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중종의 조광조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조광조의 말에 대해) 상(上)이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들었고 광조 등이 서로 더불어 논설하기를 성의가 간절하게 하여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소환(小宦)이 촛불을 들고 가자 드디어 물러갔다.”라는 구절에서 잘 알 수 있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가 지닌 급진성은 처음부터 드러났다. 곧 1510년(중종 10)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사망하자 조광조 일파인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은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나 반정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가문 내력으로 인해 폐비되었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며, 더 나아가 신씨의 폐위를 주장했던 반정공신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기묘사림의 개혁정치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기성 훈구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양세력간의 큰 대립이 야기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조광조일파의 개혁정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성리학이념을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이 8도에 실시되었고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성리학적 교화서로서 『이륜행실二倫行實』, 『언해여씨향약諺解呂氏鄕約』 등의 서적이 인쇄, 반포되었다.

1518년(중종 13)에는 성리학적 벽이단론(闢異端論)에 따라 도교식 초제(醮祭)를 관장하는 관서인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추진하였다. 조선초 이래 왕실의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던 소격서 제사의 폐지는 왕실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것이어서 큰 논란이 되었지만 결국 중종은 이를 허락해 주었다. 소격서 혁파건은 조광조일파의 개혁정치가 왕실측의 입장 조차도 고려하지 않는 급진적 성향을 띠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면모로 인해 “기묘년의 화가 이 일에서 싹텄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519년(중종 14)에는 새로운 인재 등용법으로 천거제 형식의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실시하였다. 현량과는 사장에 치중하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한 뒤 대책(對策)만 시험해 선발하는 제도이다. 이는 결국 기성세력이 아닌 신진 사림세력 중에서 인재를 발굴·등용하기 위하여 기왕의 과거제 방식이 아닌 새로운 천거제 방식을 실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시행 결과 김식(金湜), 박훈(朴薰), 안처겸(安處謙) 등 28명의 사림 인재가 선발되었다. 이들은 개혁정치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개혁이 진행되면서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은 더욱 심해졌다. 이는 개혁정치가 시작된 처음부터 이미 예상된 일이었지만 현량과를 통해 사림세력이 보강되면서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은 보다 가시화 되었는데, 반정공신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이 그러하다. 조광조 일파는 중종반정후 정국공신(靖國功臣)을 책봉할 때 그 자격과 선정 과정의 비공정성을 문제삼았는데, 가령 성희안 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 유자광(柳子光)은 친인척인 대신들을 위해 반정하였는데 이러한 류의 공신들이 권좌에 올라 사리를 채우고 있으니 이러한 자들은 위훈(僞勳)으로 공신록에서 삭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 등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과다하게 선발된 문제를 지적하고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바 있으니 위훈삭제론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등장한 이 주장은 대단히 위험스럽게 비추어졌다. 반정공신들은 이미 기성세력이자 원로세력이 되어 있었으니 위훈삭제론은 비록 일부 공신들에 해당되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반정공신세력, 더 나아가 이들에 의해 옹립된 중종의 입지를 근원에서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논의였기 때문이다.

현량과 실시에 이어 동년 10월 25일 대사헌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광조가 앞장서서 위훈삭제 문제를 제기하자, 중종과 훈구대신들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일파의 강경한 주장에 밀려 결국 중종은 2·3등 공신의 일부, 4등 공신 전원, 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 삭탈과 토지 및 노비의 환수를 윤허하게 된다.

처음부터 위훈삭제를 매우 어려워하던 중종의 급작스러운 윤허는 뒤이은 사화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중종은 위훈삭제 처분을 내린 며칠 후 전격적으로 사화를 불러 일으켰다.

5 기묘사화의 과정

홍경주, 김전(金詮), 남곤, 심정 등은 밤에 신무문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시키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곧바로 밀지를 내려 남곤·김전·정광필·홍경주 등 대신을 불러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게 했다. 그들은 즉각 유배되었고 위훈삭제 처분은 취소되었고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중종의 급작스러운 사화 처분에 대해 중종의 이러한 결정을 유도한 인물로 남곤, 심정, 홍경주 3인이 거론된다. 곧 기묘사림들에 의해 소인배로 지목된 남곤, 위훈삭제의 대상이 된 심정, 또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熙嬪) 홍씨(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 등이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며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字)’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안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한 후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참고된다.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조광조는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사사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비호로 능주(현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유배되었다. 이때 성균관 유생 1,000여 명도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사화를 주도한 중종과 구신세력의 입장에서는 일단 사화를 일으킨 이상 그 처벌의 수위를 높여 향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고자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특히 조광조일파에 우호적이었던 일부 대신들 및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적 시위는 오히려 이러한 생각을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결국 중종은 “서로 붕비가 되어 자기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로 서로 의지하고 권세 있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서 후진을 이끌어 궤격이 버릇되게 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가게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신하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죄가 크다.”며 조광조를 사사하였다. 김정·기준(奇遵)·한충(韓忠)·김식 등도 유배후 사사되거나 혹은 자결하였다. 이외에 김구(金絿)·박세희·박훈·홍언필(洪彦弼)·이자(李耔)·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은 유배에 처해졌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었고 현량과도 혁파되었다. 사화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온건적 태도를 보였던 정광필은 좌천되었다.

6 기묘사화의 원인

이처럼 기묘사화는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급격하게 성장한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에 대한 중종 및 기성 훈구세력들의 불만이 반정공신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폭발된 것이다. 당시 사림세력의 지치주의 노선은 과도하게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측면이 많아 기성 정국을 주도해오던 훈구세력과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계 인사 대부분은 30대의 연소배들로서 학문이나 정치 경륜이 일천하였기에 현실적 감각과 정치적 포용력이 부족하였고 이에 훈구세력이 구축해 놓은 기성질서를 과도하게 공격하여 훈구세력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가령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사장 학풍에 익숙한 훈구신의 성향을 끌어안지 못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성리학에 입각한 과도한 도학적 태도로 훈구세력을 백안시하였다.

물론 이러한 급진성에 대해 사림세력의 영수였던 조광조가 조심성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곧 “세상에서 전하기를 ‘정암이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 않고 과격한 습성을 길러 내서 마침내 화의 그물을 스스로 취하였다’하나 이는 정암을 모르는 자이다. 선생이 일찍이 성수침(成守琛)·허백기(許伯琦) 등과 더불어 시사를 논할 때 근심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있었으니 시세를 모르고 망녕되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다만 김식과 같이 매우 조급하고 과격한 사람됨이 화의 기틀을 이루었고 후진들이 나이가 어리고 일을 좋아하여 따라 붙은 자가 또한 많아서 선생이 이미 그 징조를 알았으나 또한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간혹 이름과 실재가 맞지 않는 자들이 벼슬할 길을 잘못 얻은 경우도 있으니 기묘년의 화는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는 기록은 조광조가 개혁의 완급을 조절하려는 노력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기묘사림 전체의 분위기가 과격하고 원칙주의적인 방향으로 흘렀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광조를 존경하였으며 기묘사림을 이어 선조대 사림정치의 초석을 다진 이이와 이황의 평가는 기묘사화에 대한 후대인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곧 “사림이 일어나니 간혹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이어 진출하게 되어 논의가 대단히 날카로워지고 일을 수행하는 것이 급진적이었다. 광조가 ‘일을 급박하게 수행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마땅히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하고 매양 동류들 가운데 일좋아하는 사람들을 억제하곤 했다. …… 옛 사람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도를 행하기를 구했고, 도를 행하는 요점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이다. 아깝게도 문정공 조광조는 현철한 자질과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건질 만한 재주를 가졌으나,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기도 전에 너무 갑자기 요직에 올라 위로는 임금의 마음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권문세가의 비방을 막지 못하여 충성과 간절함을 바야흐로 다했는데도 참소하는 입들이 이미 열려 몸이 죽고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은 천품이 매우 높았으나 학력은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 그가 소격서를 없애자고 논한 한가지 일로도 볼 수 있다. 군신간의 의리가 어찌 그럴 수 있으리요. 이것은 정암의 지나친 부분이다. 임금을 요·순처럼 만들고 백성에게 요·순의 은덕을 입히려는 것은 군자의 뜻이기는 하나 당시의 사세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기묘년의 실정은 여기에 기인된 것이다. 당시에도 정암은 일이 실패할 것을 깨닫고 자못 스스로 억제하려 했으나, 사람들이 도리어 비난하고 심지어는 창끝을 돌려 서로 공격하려고 하였으니, 정암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을 뿐이다.(『퇴도언행록』)”

7 기묘사화 이후의 사림정치

기묘사화로 조광조일파의 도학적 지치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난 이후 중종 치세 중·후반기 정국에서는 지치주의 운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림정치가 크게 패퇴하였다. 기묘사화의 여파는 계속 이어져 1521년(중종 16)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에 의한 신사무옥(辛巳誣獄) 사건이 일어났다. 곧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일파를 두둔하다 파직된 좌의정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남곤·심정 등을 비판하자 그의 사주를 받은 송사련이 안처겸의 모친상에 모인 조문객들의 명부인 조객록(弔客錄)을 근거로 하여 안처겸 일당이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한 것이다.

이로써 안당·안처겸·안처근(安處謹) 3부자를 비롯하여 권전·이정숙·이충건(李忠楗)·조광좌(趙光佐)·이약수(李若水) 등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었다. 훈구세력의 정치적 우위가 더욱 분명해지면서 다시 훈구세력 내에서도 세력 분기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곧 차기 왕위 계승후보자를 둘러싸고 척신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소생인 세자(후의 인종[조선](仁宗))의 보호를 내세운 대윤계, 또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소생인 경원대군(후의 명종[조선](明宗))의 보호를 내세운 소윤계의 대립이 갈수록 치열해져갔다.

이처럼 기묘사화 이후 사림정치가 패퇴하고 훈구세력간의 대립, 또 새롭게 등장한 척신세력간의 다툼 등으로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크게 보면 조선사회는 기묘사림들이 제시한 지치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향약의 보급으로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가 정착되어 갔고 『소학小學』, 『이륜행실二倫行實』,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 등이 널리 보급되었다. 또 중종 말에는 안향을 모신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조선 최초의 서원으로서 건립되었고 이후 전국적인 서원건립운동으로 확산되어갔다. 기묘사림이 그토록 강조해마지않던 성리학이념이 조선사회에 서서히 뿌리내려가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중종대를 사림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이자 기반 조성기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명종대를 지나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림정치의 정착과정에서 기묘사화의 주역 조광조도 신원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영의정에 추존되고 문정공의 시호가 하사되었다. 선조대에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추숭되다가 1610년(광해군 2년) 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李滉)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서 문묘에 종향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