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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

남인과 장희빈, 권력을 장악하다

1689년(숙종 15)

1 17세기 서인과 남인의 갈등 심화와 숙종의 ‘환국’ 시도

기사환국은 1689년(숙종 15)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국 동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송(禮訟)이다. 현종 즉위 초의 1659년(현종 1) 1차 예송은 효종의 사망 이후 효종에 대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복상문제가 화두가 된 것으로 허목(許穆),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은 3년상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의 서인은 1년상을 주장함으로써 서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은 실각하여 허적(許積)을 비롯한 소수의 남인만이 참여하는 속에서 서인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사망을 계기로 예송이 다시 일어났는데,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어야 할 상복을 9개월로 주장했고, 허목 등 남인은 1년 상복을 주장했다. 이 예송에서는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예송에서 드러나듯이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숙종[조선](肅宗)은 강력한 왕권 추구의 의지를 보였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 안정을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환국’이라 하는데,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숙종 초반은 2차 예송의 승리로 남인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였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남인의 정적으로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숙종 역시 남인의 집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경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환국의 형태로 드러났는데,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 갑술환국(甲戌換局)이 그것이며, 그 주도 세력 역시 서인-남인-서인으로 변화되었다.

2 기사환국의 전주곡 : 경신환국과 남인의 축출

숙종은 정권 초기에 집권한 남인을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축출한 뒤에, 다시 서인을 재집권시켰다. 경신환국은 허적을 중심으로 한 남인이 권력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숙종이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 숙종의 태도에 자신감을 얻은 서인계열은 김석주(金錫胄)의 밀객인 정원로(鄭元老)를 앞세워 허적의 아들인 허견(許堅)을 역모사건의 주모자로 지목하였다. 그 내용에 의하면 허견과 복선군(福善君)이 만난 자리에서 허견은 “주상의 춘추가 젊으신데, 몸이 편찮으시고 세자가 없으니 불행한 일이 있으면 대감이 임금 자리를 면하려 해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복선군의 대답은 없었고, 허견은 다시 “이제 나라가 장차 망하려는데 반드시 잘 해야 할 것이며, 당론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라는 역모를 염두에 둔 발언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원로는 평소 국왕이 허적을 신임하여 무고죄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밝힌다고 하였다. 국문 결과 복선군과 허견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고, 이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숙종은 허견을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고 복선군은 종실의 예우를 갖추어 교수형(絞首刑)에 처한다고 발표하였다.

허적은 역모에 특별히 관련된 흔적은 없었지만 허견의 부친으로써 아들의 일에 대해 역모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예조참의 유창(兪瑒)은 “역적 허견이 그 아비와 같이 꾀하지 아니하고서 여러 재상을 부추겨서 도체찰부를 다시 설치하였겠습니까? 날마다 날랜 무사(武士)와 역사(力士)를 모아서 무거운 것을 들어 힘을 겨루게 하여 그 중에 가장 우수한 자를 선택한 것은 장차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이며, 허적이 아는 바가 아니고 허견이 홀로 이를 하였겠습니까?”

라고 하여 허적이 허견의 역모에 연관성이 있다는 뜻을 피력하였고 결국 숙종은 허적의 사사(賜死)를 명하였다.

남인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휴(尹鑴) 역시 처형을 당하였으며 이 옥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5월까지 종친 세력과 연결된 100여 명이 넘는 남인은 갖가지 죄목으로 처벌되었다. 왕권 강화의 의지를 지니고 있던 숙종의 결단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정국이 뒤바뀌는 환국이 진행된 셈이었다. 서인정국으로의 변화와 함께 숙종은 서인계열 김석주를 원훈으로 삼아 공신 책봉을 단행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50여년에 걸친 서인의 숙원사업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남인은 상당수 축출되었지만, 장희빈(張禧嬪)의 존재가 서서히 부각되고 실세한 남인이 왕실과 연계를 맺게 되면서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3 기사환국의 단행 : 서인의 몰락과 남인의 재등장

숙종은 즉위한 뒤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를 왕비로 맞았지만, 1680년(숙종 7) 10월에 사망하자, 1681년(숙종 8)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혼례를 치르고, 계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무렵 숙종은 궁중 나인이었던 장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대비 명성왕후(明聖王后)는 장씨를 궁 밖으로 쫒아냈지만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궁중으로 돌아왔으며 숙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었다. 급기야 1686년(숙종 12)에는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책봉하였다.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인현왕후는 모두 서인 노론계열 출신이었다. 그에 반해 장희빈의 가계는 남인과 연루되어 있었다. 장씨의 종숙부인 장현(張炫)은 역관 출신으로 당대 재력가였다. 그는 경신환국 당시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 옥사에 연루되었던 혐의를 받고 유배를 간 경력이 있었다.

이처럼 장희빈은 남인 계열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서인계열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당시 서인계인 부교리 이징명(李徵命)은 “장씨는 장현의 친척이며, 장현은 복창군과 복선군에 빌붙은 자로 귀양을 간 인물인데, 그의 근족을 가까이 둔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함으로써 남인계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5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였던 인현왕후 대신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서인계의 불안은 숙종의 뒤이은 조치로 더욱 증폭되었다. 왕자가 출생한지 석달도 안된 시점에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한 것이 그것이었다. 숙종은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지금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서 명호를 정하려 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바치고 물러가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숙종의 뜻밖의 발언에 대해 신료들은 난색을 표하며, 다른 날 중궁에게서 별 소식이 없다면 국본이 자연스럽게 정해질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몇 년을 기다릴 것을 청하였지만, 숙종은 세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이를 반대한 인물들은 서인 노론계의 관료대신으로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해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이었다.

숙종은 서인 노론계의 우려를 뒤로 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하였다. 숙종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 서인계열은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여 국가의 화가 조석에 미칠 것이다.”라고 두려워할 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1일 송시열이 국왕에게 올린 소는 정계에 큰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송시열은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생긴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송시열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송(宋) 때의 일화를 언급하였는데, 철종(哲宗)은 10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는데, 제왕은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왕자의 원자 칭호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뜻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자 숙종은 명 황제는 황자를 낳은 지 4달 만에 봉호한 일이 있음을 언급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명의 예를 들어 국본을 일찍이 세우기를 청했어야 하는데, 송시열의 소장은 불만이 가득하다. 태자 책봉을 싫어하는 뜻이 강하고, 그 뜻을 조작하고 설계한 것은 더욱 위험하다.”고 분노하였다.

이 송시열의 상소는 서인들의 일망타진을 노리던 남인과 숙종에게 호재로 작용하였다.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 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켰다.

이 사건은 서인에서 남인 정국으로의 변화 환국을 의미하였고, 남인이 다시 집권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어 숙종과 남인들은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고, 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목창명(睦昌明)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윤휴를 비롯하여 경신환국에서 화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신원되었다. 장희빈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 의정(議政)을 부여 받았으며, 장희빈의 부친인 장형에게는 1689년(숙종 15)에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칭호가 주어졌다.

숙종은 이 외에도 서인에 대해 가혹한 응징의 조처를 단행하였다. 그 첫 번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출향이었다. 숙종은 두 신하를 종향하자는 논의는 50년간 지속되었지만 선왕도 윤허하지 않았고, 선비의 국론이 정하여지지 않아 무고가 많고, 모욕하며 투기하고 이간하는 계책이 많아 국가가 혼란스러운데, 단지 한때의 숭상하는 것만을 쫒아서 하였던 것은 진정한 덕이 아니니, 출향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두 번째는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폐출한 것이었다. 숙종은 성종대 폐비 윤씨의 투기가 드러나자 성종이 종사를 위해 폐출을 단행하였던 사례를 들며 민씨는 윤씨보다 더하므로 폐서인 시키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는 일 등을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대해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을 비롯하여 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하기도 하였다. 결국 숙종은 폐비 문제를 주관대로 처리하였고, 1690년(숙종 16)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시켰다.

세 번째 송시열의 사형이었다. 당시 예조판서 민암, 권대운 등 남인은 송시열을 문외 출송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형을 적극적으로 촉구하였다.

그 결과 숙종은 같은 해 6월 송시열에게 사사의 명령을 내렸다. 송시열은 제주에서 돌아오는데, 중전을 폐한 것과 오두인과 박태보가 간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먹지 않고, 정읍현(井邑縣)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다.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남인을 재집권시켰으며, 동시에 남인은 서인에 대한 보복성 행위를 가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상황이 역전이 되었을 경우에도 또 같은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4 ‘환국’의 재등장 : 갑술환국과 남인의 몰락

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남인들 역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집권함은 물론 서인에게 보복하는 기회로 삼았다. 숙종은 원자정호 등의 일시적 의도는 실현하였지만 이런 과정에서 남인에게 전권을 독점시켰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환국, 즉 갑술환국으로 드러났다.

기사환국이 일어 난지 5년 후인 1694년(숙종 20)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의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김만기(金萬基)의 적장손인 김춘택(金春澤),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赫), 유명일(柳命一)의 아들 유복기(柳復基) 등 노론가 자제들은 비밀 자금을 모으고 궁중의 환관, 궁녀와 내통하여 폐비의 복위를 꾀하려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그들의 일당이었던 함이완(咸以完)의 고변으로 전모가 드러났다. 우의정 민암은 이 사건을 담당하면서 이를 기화로 노론을 일망타진하고자 하였다. 결국 옥사는 크게 확대되어 많은 서인들이 연루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노론 김춘택을 중심으로 남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서인의 재집권을 꾀해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는 환국의 음모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얼마 후 서인 김인(金寅)의 고변이 발생함으로써 상황은 역전되었다. 장희재(張希載)가 돈으로 김해성(金海成)에게 뇌물을 주어 꾀어내어 숙원 최씨의 숙모로 하여금 그녀를 독살하려 하며, 윤희(尹憘), 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민암, 오시복(吳始復), 목창명(睦昌明)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고변하였다.

숙종은 숙빈최씨(淑嬪崔氏)에 대한 독살설과 남인의 역모설이 담긴 고변을 듣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4월 1일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민암이 함이완과 수작하여 옥사를 확대하여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문을 집행한 대신 이하는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로 출송하며 민암은 절도에 안치할 것을 명하였다.

이처럼 숙종은 갑작스럽게 환국을 단행하였고, 이것은 기사환국의 처사를 뒤집는 것이었다. 이 일로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 남인이 물러나고, 영의정에 남구만, 훈련대장에 신여철(吳始復), 병조판서에 서문중(徐文重), 이조판서에 유상운 등 서인이 대거 기용되었다. 김수흥, 김수항 등의 관작도 회복되었고, 송시열 역시 복관되었다. 남인들은 기사환국 당시 처벌받은 서인보다 더 많은 수가 처벌받았고, 두 번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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