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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정벌

조선 조총부대의 위용을 떨치다

1654년(효종 5)

나선정벌 대표 이미지

나선정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음역한 것이다. 조선의 제17대 국왕인 효종대 청의 요청에 의해 러시아를 두 차례 정벌한 사건이다.

2 효종대 조·청 관계와 ‘북벌론’

1649년(인조 27) 인조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 17대 국왕으로 즉위하니 효종(孝宗)이다. 선왕 인조[조선](仁祖)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극히 소극적이고 현실 안주적 성향으로 변화, 반청론자들을 멀리하고 측근의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대청 사대에 안주하였지만 젊고 패기 넘친 효종은 부왕과 전혀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두 차례의 호란도 겪었지만 8년간의 인질 기간 동안 청에 이끌려 명·청 전쟁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중국 전역을 두루 다녔고 이 과정에서 청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청이 승리하였으나 정권 교체 직후 청의 국내외 사정은 매우 불안하였다. 이러한 정세를 잘 알고 있던 효종으로서는 언제 다시 생겨날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걱정하였다. 이에 효종은 모든 변수들을 고려하여 우선적으로 군비를 증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부왕인 인조가 친청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에 왕자나 세자 시절에는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게 된다. 물론 이는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당연히 갖게 되는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도 하나로 맞물려 있었다. 결국 효종은 군비 증강과 왕권 강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대청 복수’를 목표로 하게 되었으니 이른 바 ‘북벌론(北伐論)’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조선 왕실은 ‘대청 사대’와 함께 ‘대명 의리’를 병행하였는데 이중에서 ‘대청 의리’가 왕실의 입장이었다면 ‘대명 의리’는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 일반, 그중에서도 사림들의 여론을 이끌고 있던 산림세력이 주도하였다. 이렇게 효종의 ‘대청 복수(북벌론)’ 노선은 산림들의 ‘대명 의리’ 노선과 상통하였기에 북벌론의 구현을 위해 효종은 선왕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새롭게 산림세력과 연합해야 했다.

3 효종의 ‘북벌정책’ 경과

효종은 즉위 후 곧 ‘대명 의리’를 주장해오던 산림과 척화대신을 불러들이게 되니 서인 산림인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와 서인 척화대신 김상헌(金尙憲), 남인 산림 권시(權諰)등이 그들이다.

효종의 개혁정치 표방에 고무된 이들 사림세력은 인조대 핵심 구신인 김자점의 비리를 공격하였고 이러한 변화에 위협을 느낀 김자점은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에 효종이 선왕대의 구신을 몰아내고 북벌을 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인조 릉〔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제시하였다. 청이 곧 사신을 보내 조사했으나 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元斗杓) 등의 활약으로 김자점(金自點)의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은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을 제거하고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의 아들 숭선군(崇善君)을 추대, 역모를 일으켰는데 이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김자점 일당이 모두 제거되어 조정 내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종래 중앙 군영의 병권은 대체로 국왕의 훈척신들이 장악해왔는데 효종은 이러한 관행을 깨고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박경지(朴敬祉) 등 무과 출신의 참신하고 실력 있는 무장들을 중용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이완은 어영대장에 이어 훈련대장에 올라 효종대 북벌 정책의 핵심 역할을 하였다.

효종은 북벌의 핵심 군영으로 인조대 군비증강을 위해서 설치된 어영청에 주목하였다. 어영청의 군사는 애초 7천명에 불과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해 재정 문제를 극복, 3배수인 2만 1천명으로 증액되었다. 어영군은 1천명씩 21개조로 나뉘어 관리되었는데 도성에 항상 1천명의 어영군이 상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어영청은 핵심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에 필적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국왕의 친위병인 금군(禁軍)을 기병화(騎兵化)했으며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군액을 6백명에서 1천명으로 증액하였다. 또한 최강의 중앙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기 위해 군액을 1만명으로 증원하고자 했으나 급료병인 훈련도감군의 증원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어 현실화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수비대인 수어청을 강화하였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남한산성에 대포 3백문을 설치하였으며 강화도에는 행궁을 수축했다. 또 능마아청(能亇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병법을 교육하였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을 제작하고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화포 제작 등의 무기도 개량하였다. 한편 인조대 설치 이후 유명무실한 상태에 놓여 있던 영장제(營將制)를 실시,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군비증강 결과 조선군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는데, 이는 1654년(효종 5)과 1658년(효종 9) 두 차례 청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나선정벌(羅禪征伐)시 조선군의 활약상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때 조선군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조총부대를 파견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효종 즉위 초 이래의 군비증강의 결과라는데 이견이 없다. 또한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확충하였다.

4 효종대 조·러 관계와 청의 파병 요청

17세기에 이르자 러시아인들은 흑룡강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그쪽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인근 원주민들과의 분쟁과 청 군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듬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우수리강 하구에 성을 쌓고 송화강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였다. 이에 청에서는 영고탑에 있는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해내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따라서 청에서는 조선에 조총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5 제1차 나선정벌

1654년(효종 5) 2월 청은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선인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3월 10일까지 영고탑 지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효종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포수(砲手) 100명과 화병(火兵) 등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 군사와 합류하였다. 이들은 곧장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에는 왈가(曰可) 지방에서 배를 타고 후통강으로 내려갔다.

4월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하였다. 러시아군은 7일 만에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승리한 조선군은 5월 16일 회군을 시작하여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6 제2차 나선정벌

그 뒤에도 러시아군은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였고, 이에 대한 청 군사의 출정은 계속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 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서게 하였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 군사와 합류, 흑룡강으로 나아갔다. 6월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맞닥뜨렸다. 러시아 군대는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진격하였고 육상으로도 군사를 진군시켰다. 이에 대해 청나라 군사는 감히 맞서지 못했지만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러시아군은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인해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러시아 군의 피해에 비하면 미미하였다. 이들은 청의 요청으로 얼마간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조선으로 개선하였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이 간접적으로 빛을 발한 결과였다.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지만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북벌을 준비하던 조선군의 사격술과 전술을 대변하는 것이다.

7 효종대 이후 ‘북벌 정책’의 포기

이처럼 효종은 치세말 북벌정책이 난관에 부딪히자 송시열을 통해 북벌정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동분서주하였다. 1659년(효종 10) 3월 효종은 근시를 물리치고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를 행하였는데, 이때에도 효종은 ‘신하들 모두 내가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있소. 천시와 인사의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니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기회를 봐서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 저들은 무비에 힘쓰지 않아 요동과 심양 천리 길에 활을 잡고 말을 타는 자가 전혀 없으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할 수 있을 것이오.’라며 변함없는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2개월여 만에 효종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10년간을 오로지 북벌에만 매달리다가 41세 한창의 나이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때 효종은 귀밑의 종기를 제거하기 위한 침을 맞고 급서하였는데, 이즈음 효종과 서인세력의 갈등이 극히 고조된 상태에서 효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던 점, 또 효종의 죽음 이후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산림세력이 효종의 유지였던 북벌을 미련 없이 중지하였던 점에서 효종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효종에게 ‘북벌론’은 단순한 이념적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라 양란후 위기에 봉착한 조선의 국력을 강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는 젊고 열정적인 국왕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반면 집권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는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에 의한 예치국가 조선을 꿈꾸었으니 이러한 동상이몽은 오래갈 수 없었다. 결국 효종의 죽음과 함께 서인들은 예정된 북벌 파기의 수순을 밟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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