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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공물(貢物)을 쌀로 거두어라

1608년(선조 41) ~ 1894년(고종 31)

대동법 대표 이미지

대동법시행기념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양란 이후 조선의 상황

조선은 1392년(태조 1) 건국한 이후 대내외적으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붕당정치를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적 균형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농업생산과 세납을 통해 재정적인 건전성도 유지하였다. 물론 사화(士禍)와 같은 정치적 시련이 있었고 농업이라는 생산기반 자체가 갖는 한계도 나타나고 있지만 큰 체제의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문에 조선의 경제기반은 크게 흔들렸다. 물론 임란이전부터 사회전반에 대한, 특히 세금제도에 대한 개혁론이 대두하고 있었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란 이후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안정을 위해 우선 백성들의 생산기반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공납제를 개혁한 대동법으로 귀결되었다.

2 과중한 부담, 공납

조선의 수세체계는 전세(田稅), 요역(徭役), 군역(軍役), 공납(貢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공납은 백성들이 내는 세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아 많게는 전체 세금양의 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공납은 그 지방의 생산물에 따라 공물이 현물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공납은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리에 따라 각 지역에서 나는 생산물을 공안(貢案)에 등록하고 현물로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안은 연산군 대에 크게 증액되어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났다. 또, 각 지방에 배정된 공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경우, 해당 지역에서는 불가피하게 다른 지역에 가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공납해야 할 물품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실제 공물을 관서에 납부하더라도 각 관서에서 현물의 상태를 빌미로 ‘점퇴(點退)’시킬 경우 백성들은 새로 현물을 구해 바치거나 아예 공납할 때에 부과된 숫자보다 많은 양을 바쳐 점퇴에 대비해야 했다. 이에 백성들은 공납을 전문적으로 대신 담당하는 방납(防納)업자에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일정한 수수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맡겨야 했다. 이렇다 보니 백성들이 실제 부담하는 공납은 많은 대신에 국가에 들어가는 내역은 매우 적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현물을 납부해주는 방납업자와 같은 사람들이 이권으로 대부분을 챙겨가고 있었다. 결국 국가에서 공물을 거둘 경우 10분의 5~6은 방납업자에게 돌아가고 국가의 쓰임에 사용되는 것은 열에 한둘 정도뿐이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3 개혁의 필요성

공납은 본래 지방에서 신하들이 중앙의 왕에게 바치는 ‘예헌(禮獻)’의 의미를 띄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지방 제후는 왕에게 반드시 바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는데, 공납은 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즉, 공납은 지방의 신민들이 국가의 필요에 응하는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공납은 왕에 대한 지방 제후의 의무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시대와 제도는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논리로 지방에서 납부하는 공납을 같은 범위에서 인식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왕실의 수요는 늘어갔고 한번 늘어난 왕실의 수요는 이후에도 줄이기 힘들어 지방에 부과되는 공납의 규모는 계속해서 늘어갔다. 공납의 특성 상 현물을 받아들이다보니 훼손될 위험도 커서 공납에 대한 개선책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또한 지방 자체적으로 공납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율곡 이이(李珥)의 경우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주장하였는데, 공물을 현물로 직접 거두는 대신 토지 1결에서 쌀 1두를 거두어 직접 공물을 구매하는 방식을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안은 실제 활용되지 못했다.

전국적인 공물 개선안이 나타나지 않자 공납은 지방별로 개혁안을 만들어 임시로 사용하였다. 대표적으로 사대동(私大同)이나 반대동(半大同)과 같은 제도가 그것이다. 국가가 아닌 지방 자체적으로 모든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하여 ‘공(公)’이 아닌 ‘사대동’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서울에 납부하는 세액만 대동방식으로 납부한다하여 ‘반대동(半大同)’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공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은 지방의 입장에서는 항상 어려웠기 때문에 대동법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도 대동법과 비슷한 방식의 세금납부 방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태종대 기사에서는 단편적이나마 미곡을 대납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세종대에는 ‘외방에 있는 각관의 공물이 실제 토산이 아닌 경우 농민들은 모두 미곡을 가지고 사다가 상납한다.’라고 할 정도로 공납제를 대체한 제도의 유래는 오래되었다. 대동법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토지결수에 따라 세액을 달리하는 방식도 대동법 이전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성종대 마련된 요역부과 방식을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토지를 기준으로 요역을 부과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동법이 시행되기 직전에도 명의 조사를 접대하기 위해 4결당 포를 거두어 필요한 은과 삼을 구매하기도 하였다. 즉, 토지를 기준으로 세금을 거두는 방식은 대동법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시행되고 있었다. 공납제를 개선하려는 인식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지만 공납이 띄고 있는 상징성 때문에 쉽게 개선하기가 어려웠다. 공납제를 개선하기 위해 중요한 문제는 결국 국가가 공식적으로 공물을 쌀이나 다른 방식으로 대납하는 방식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4 대동법의 시행

공납제의 문제는 임진왜란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국가 재정에서 흡수하는 부분보다 방납업자에게 새나가는 비용이 더 많아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개선해야만 했다. 이러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공납제 개혁안은 광해군대 들어 실제 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동법 시행이 논의되던 시기 당시 중앙 정부의 정책담당자들은 민생의 안정을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생산기반이 파괴되었고 광해군대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세금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공납제에 대한 개혁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등장한 것은 대동법 외에도 호패법이 등장하고 있었다. 재정정비와 민생의 안정 외에도 군 병력을 포함한 인적 자원을 파악하여 징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공납문제였다. 군역문제는 지속적인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공납문제 보다 시급한 개혁을 요구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공납문제를 개혁한 대동법이 군역제도에 대한 개혁 보다 먼저 광해군대에 시작되었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 직후 이원익(李元翼)과 한백겸(韓百謙)의 건의로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경기도에 한정되어 시행된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바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4년(인조 2) 이원익의 건의로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으나, 1625년(인조 3)에는 이괄의 난과 세곡 운반의 어려움, 대토지 소유자의 반대 등으로 인해 충청도와 전라도에 시행된 대동법은 폐지되었다. 당시 심한 흉년이 들어 상황이 어려운 측면도 있었지만 정책담당자들이 대동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란을 겪자, 공물운반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는 구실로 서울에서 받는 공물만 쌀로 내게 하고 나머지 각관의 자체 경비와 각관에서 집행하는 공물에 대해서는 기존방식을 고수했다. 그 결과 민간에서는 이전보다 대동법이 시행된 이후 세액의 양이 더 늘었다는 불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인조대 시행되었던 대동법에 대한 논의는 광해군대 경기도에서 시행되었던 경기대동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전국적인 시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논의는 두 번에 걸쳐 실패로 돌아가고 세 번째 논의 끝에 시행되었다. 당시 대동법은 병자호란 직후의 혼란한 국가 상황 아래에서 대동법이 국가재정을 부족하게 만드는 세법이라 생각하는 관료들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효종 즉위 후 김육이 우의정에 제수되고, 대동법 시행을 찬성하는 조익과 이시방이 각각 좌의정과 형조판서에 임명되면서 대동법을 추진하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당시 김육이 올린 상소를 통해 김육이 대동법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수 있다. 김육은 당시 상소에서 “대동법은 세금 부담을 고르게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니,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면 백성들이 안정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하였다. 특히 충청도는 임진왜란 이후 가까운 곳에서 부족한 재정을 확충한다는 논리에 따라 다른 지역에 비해 공물을 포함한 세금의 액수가 지나치게 과중했다. 따라서 충청도의 경제적 사정 속에서 대동법을 추진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결국 1651년(효종 2) 충청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했던 것은 전국적인 범위로 확대 시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이는 경기도에 시행되었던 대동법과 성격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특히 당시 만들어진 「호서대동절목」은 다른 도에서 시행되었던 대동사목의 표준이 될 정도로 철저한 준비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충청도에서는 각각 토지 1결 당 10두씩 거두었는데 봄·가을로 각각 5두씩 나누어 징수하였다. 그리고 산간지역은 운송의 폐단 때문에 쌀 대신 면포 1필로 납부하도록 했다. 그리고 향촌에서 소비되는 비용을 별도로 설정하여 이전에 암묵적으로 거두었던 비용을 명목으로 확정하였다.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성과를 거두자 전라도에서도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었다. 김육은 1657년(효종 8) 상소를 올려 전라도 53개 고을 중에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바라는 곳이 34개 고을이고, 어찌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곳이 16개 고을이고, 시행하기를 바라지 않는 곳이 13개 고을이라는 조사 결과를 근거로 전라도 대동법의 시행을 청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궁궐에서 필요한 공납을 대부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었다. 대동법을 시행하기 이전에 전라도의 경우 공물가는 결당 80두에서 100두까지 거두어졌으므로 호서지역보다 결당 10배 가까운 부담을 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서지역의 공물변통을 보고 호남지역의 백성들이 옮겨갈 정도로 대동법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다보니 호남지역의 대동법 시행에도 힘이 실리게 되었다. 호남지역의 유생들이 호서에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왜 호남에는 시행하지 않는지에 대해 상소를 올리는 지경이었다. 당시 호남지방에서 대동법의 시행에 반대하고 있던 자들은 토호를 중심으로 한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들이었다. 이들은 대동법이 시행될 경우 백성들로부터 공물가를 추가로 징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었다. 인조 초기에 대동법 시행을 호남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대동법 시행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호의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후 호남지역의 대동법은 1658년(효종 9) 호남 연해 27개 고을에서 시행되었고 1662년(현종 3)에 전라도 산간지역에 대동법이 확대되었다.

대동법이 확대되면서 실제 세액의 감소가 눈에 띄게 나타났고 관료들도 점차 대동법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갔다. 대동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대동법의 효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대했던 신료들도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서와 호남지방의 대동법 시행으로 대동법은 대세가 되었고, 1677년(숙종 3)에는 경상도에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삼남지역 전체에 대동법이 확대되었다. 또한 함경도에도 대동법과 유사한 상정법(詳定法)이 1666년(현종 7)에 시행되면서 17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확대되었다.

5 대동법의 의미

1708년(숙종 34) 황해도를 끝으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기존의 공납제가 안고 있던 현물납의 모순은 일정 부분 극복되었다. 토지에 그 기초를 두고 지방에서 사용하는 예산도 모두 전결세화하여 1결당 12두 씩을 거두는 현실적인 세납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쌀로 거두는 원칙을 세우고 지역에 따라 면포나 동전으로 거두게 하면서 현물로 불가능했던 표준가치로의 전환이 가능해졌다. 이를 통해 재정의 규모를 합리적으로 산정할 수 있어 국가 재정의 파악이 계량적으로 가능해지는 역할도 했다. 지방에서 사용하는 세액과 중앙 정부로 상납하는 내역이 명확하게 공식적으로 변하였기 때문에 이전과 다른 재정 운영이 가능해 진 것이 대동법의 재정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명확한 세액이 정해지고 특산품이나 현물로 공납을 하지 않다보니 세납의 편리함과 더불어 추가 비용이 생기지 않아 부담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동법이 시행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아직 대동미 외에 추가로 거두는 명목이 존재했고 관서별로 현물을 추가로 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대두되었고 암묵적으로 시행되고 있던 공납제의 개선을 공식적으로 정부가 인정하고 법제화 시키면서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던 공납의 자의적 운영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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