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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1597년(선조 30)

명량해전 대표 이미지

해남 명량대첩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1597년(선조 30) 9월 16일 명량 해협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압도적 다수의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2 절체절명의 순간: 칠천량해전의 패배와 이순신의 재기용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일본군의 압도적 무력 앞에 조선군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가 한계점에 도달하고 초기에 무너졌던 관군이 재편성되며,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전세는 교착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명군(明軍)이 원군으로 투입되자 전세는 역전되어, 조·명 연합군은 한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을 남해안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었다.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사천해전·당항포해전 등을 통해 일본 수군에 연이어 승리를 거두고, 한산도해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 수군의 서진이 막히고 전라도가 보전될 수 있었는데, 이는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1593년(선조 26) 5월부터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이 지나는 길목인 견내량(見乃梁)을 방어하기 위해 한산도로 이동해 주둔하여, 일본 수군이 거제도 서쪽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러한 전공이 인정되어, 1593년 8월 이순신은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명군과 일본군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들자, 선조는 이순신이 지휘에 소극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이순신과 대립하던 원균(元均)을 용장으로 높게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강화 협상의 결렬로 일본군의 재침이 예상되는 시점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 측에 그와 사이가 나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곧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이를 격파하라는 정보를 흘렸고, 이순신이 이에 신중하게 대처하자 선조는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했다고 하여 그를 파직, 체포하고 원균을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이는 일본 측의 이간책에 말려든 것이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조선 수군을 지휘하게 된 원균은 이후 조정의 지시에 따라 부산포로 나아가 일본 수군과 교전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함대 통솔 및 기본적인 경계에 실패하는 등 잘못된 지휘로 인하여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대패해 본인도 전사하였다. 이로 인해 이순신이 파직될 당시만 해도 전선 130여 척, 병력 13,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 수군은 철저히 괴멸되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주요 장수들이 전사하였으며, 한산도의 통제영(統制營)에 쌓여 있던 물자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칠천량해전을 겪은 뒤 조선 수군에 남아 있던 것은 탈출에 성공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이끌고 있던 십여 척에 지나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장병들도 흩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처참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었다.

칠천량해전의 패전 및 수군의 괴멸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은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기용하여 수군의 재건을 맡기기로 결정하였다. 고문을 받아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고, 설상가상 이순신의 파직·체포로 인해 충격을 받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이순신에게는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 수군을 재건하고, 서쪽으로 진격해 오는 일본 수군을 막아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 주어지게 되었다.

3 패잔병의 수습과 명량해전의 준비

당시 합천의 초계(草溪)에 위치한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은 7월 14일부터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음을 듣고 분통해하고 있던 중, 7월 18일 칠천량해전의 패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방책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도원수 권율에게 자신이 직접 해안 지방으로 가서 상황을 보고 방책을 정하겠다고 제안한 후, 군관 9명과 아병(牙兵) 6명을 이끌고 연해지역을 답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삼가(三嘉), 단성(丹城), 진주(晉州), 곤양(昆陽)을 거쳐 7월 21일 노량(露梁)에 도착하여 거제현령 안위(安衛),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을 만나 패전의 자세한 상황을 듣고, 22일에는 경상우수사 배설과도 만났다. 이후 진주 정개산성에서 머무르며 대책을 강구하던 도중 8월 3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한다는 조정의 명령을 받게 되었다. 다시 정식으로 수군을 통솔하게 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즉시 전라도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군사와 무기를 수집하였으며, 배흥립(裵興立)·송희립(宋希立)·최대성(崔大晟)·안위 등의 주요 수군 장수들도 합류하였다. 당시 일본 수군은 8월 초까지 주변 해역을 소탕하거나 약탈하는 소극적인 활동에 치중하였고, 따라서 이 기간에 이순신은 현장을 돌아보고 패전을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거느린 병사는 8월 8일 순천에 도착했을 때 60명, 다음날 보성에 도착했을 때 12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선 역시 경상우수사 배설이 통솔하여 데리고 온 12척 외에 전혀 추가 보충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수군이 빈약하여 해전이 어려우니 육군에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쟁이 일어난 임진년부터 5, 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전라를 바로 공격치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으니[今臣戰船 尙有十二]” 사력을 다하여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면서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였다. 또한 “전선은 비록 적으나 미력한 신이 죽지 않았은즉 적이 감히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각오를 밝혔다. 얼마 안 되는 수군으로나마 바다에서 싸워 일본 수군을 격멸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순신은 8월 19일 회령포(會寧浦)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을 인수한 후, 20일에는 이진(梨津)으로, 24일에는 어란포(於蘭浦)로 진영을 옮겼다. 한편 일본 수군 역시 8월 중순 육군과 합류하여 남원전투에 참여, 남원성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한 후, 8월 하순부터는 다시 남하하여 해상에서의 작전을 재개, 전라도 서부로 서진해 오기 시작했다. 8월 26일에는 탐망군관(探望軍官) 임준영(任俊英)으로부터 일본 수군이 이미 이진에 이르렀음을 보고받았다. 본격적으로 일본 수군과 다시 바다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날 새로 임명된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전선 1척을 거느리고 합류하여,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전선 13척의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8월 28일 새벽, 8척의 일본 군선이 불시에 어란포에 돌입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후 처음으로 일본 수군과 접촉한 것이었다. 이때 이순신 함대는 이순신이 탄 기함이 선봉에 서서 적선을 해남반도 남단의 갈두(葛頭)까지 추격하였고, 일본 군선은 그대로 도주하였다. 이 날 저녁에는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고, 29일 아침에는 진도의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벽파진은 명량해협을 바로 뒤에 둔 곳으로서, 이순신 함대는 이곳에서 명량해전 직전까지 머물게 된다.

조선 수군은 벽파진으로 옮긴 바로 다음 날인 8월 30일부터 주변에 정탐선을 나눠 보내어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조선 수군 장병들은 일본 함대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고, 벽파진으로 옮긴 이후부터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도 어려웠으며, 추위가 엄습하여 전투력 유지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9월 2일에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순신은 장병들의 공포심을 제거하고 해전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8월 25일에는 거짓으로 적이 온다고 고한 자들을 잡아 처형하여 군심을 안정시켰으며, 9월 7일에는 일본 군선 12척이 벽파진에 접근하자 이들을 먼 바다까지 추격했다 되돌아왔고, 이 날 밤 일본 수군이 야습해올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도록 명령하고, 병사들이 겁을 내자 엄히 명을 내림과 동시에 자신이 탄 배를 돌진시켜 일본 함대의 습격을 좌절시킴으로써 장병들이 지휘관을 신뢰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중양절인 9월 9일에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소 다섯 마리를 잡아 장병들을 배불리 먹여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수군을 재정비하고 장차 도래할 결전을 대비하고 있을 즈음, 일본 수군은 점차 명량해협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9월 14일 임준영은 일본 함대 200여 척 중에서 55척이 먼저 어란포 앞바다에 도착했으며,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사람으로부터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섬멸하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보고해 왔다.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즉시 전령선을 보내 전라우수영 앞에 머물고 있던 피난 선박들에게 육지로 대피하도록 명령하였다.

다음 날인 9월 15일에는 진영을 벽파진에서 명량해협 서쪽에 위치한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이는 적은 수의 전선으로 명량해협을 등지고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날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족히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훈시하면서,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마땅히 군율로써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엄히 약속하였다. 조선 수군의 운명을 가를 결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4 명량해전의 승리: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

9월 16일 이른 아침,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군선이 명량해협을 거쳐 조선 수군이 머물고 있는 전라우수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명량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수군은 전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고, 실제 해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13척의 전선뿐이었다. 이순신은 전선을 인계받은 이후에도 꾸준히 병력을 수습한 것으로 보이나, 병력 역시 결코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아울러 100여 척의 피난선 및 어선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 전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싸움터에 나가면서, 100여 척의 피난선은 후방에 배치하여 성세(聲勢)를 돋우는 데 이용하였다.

반면 일본 수군은 200~300여 척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명량해협의 빠른 조류 때문에 전군을 한 번에 투입할 수가 없었다. 명량해협은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반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서 길이가 약 2km 내외이고 가장 좁은 곳의 폭은 300m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최저 수심은 1.9m이고, 해안의 양쪽 25m 이내가 수심 5m 이내에서 매우 급격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노트(knot)로 매우 빠르며,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울돌목’이라 이름 할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아 항해하기 위험한 곳이었다. 따라서 일본 수군은 선체가 크고 전투력이 강한 주력선인 아다케(安宅)는 해협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중소형 군선인 세키부네(關船)만 좁은 수로를 통과하여 조선 수군과 대결하도록 했다. 그 수는 133척 정도였다. 다만 이른 아침에는 명량해협의 조류가 북서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일본 수군은 조류를 등에 업고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이 우수영 앞바다로 나오자,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조선 수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이순신의 대장선은 선두에 서서 각종 총통(銃筒)과 화살을 마구 쏘아 대면서 일본 수군을 공격하였고, 대장선보다 높이가 낮고 크기가 작은 일본 군선들은 이순신의 대장선에 접근하지 못한 채 나왔다 물러갔다를 반복하였다.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라고 부하들을 격려하면서 적과 싸웠다.

이렇게 상당한 시간 동안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버티고 있는 동안, 다른 장수들의 배는 먼 바다로 물러가 교전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대장선과 여타 전선들은 한 마장 정도 떨어져 있었고,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두 마장 이상 떨어져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순신은 배를 돌려 곧장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의 배로 가서 목을 베어 효시하여 다른 배들을 경계하고자 하였으나, 대장선이 전선에서 물러나면 다른 배들은 더 멀리 물러나고 일본 전함들이 더욱 다가와서 전선이 붕괴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신호기를 세워 함선들을 불렀고, 이에 거제현령 안위의 배와 중군장 미조항첨사(彌助項僉使) 김응함의 배가 가까이 왔다. 이순신은 먼저 도착한 안위에게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라 말하였고, 이어서 김응함에게는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마.”라 하였다. 이에 안위와 김응함의 배는 적진으로 돌입하여 교전하기 시작하였다.

안위와 김응함의 배의 합류로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안위의 배가 적진으로 돌입하자, 일본군 장수가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을 내려 3척이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달라붙어서 공격하였다. 안위와 군사들은 기어 올라오는 일본 수군들을 맞아 몽둥이, 창, 수마석(水磨石) 덩어리를 가지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기운이 다해 격군들이 바다로 떨어지는 등 위기에 빠졌다. 이에 이순신은 자신이 탄 대장선을 접근시켜 안위의 배를 공격하던 일본 전함들에 총통과 화살을 마구 쏘았고, 3척에 탄 적이 거의 다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녹도만호(鹿島萬戶)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平山浦代將)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잇달아 와서 함께 공격하니 안위를 공격하던 적군은 전멸하였다. 이때 항복한 왜인 준사(俊沙)가 이순신과 같은 배에 있다가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시체가 바다에 떠있는 것을 보고 안골포(安骨浦)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알리니,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아 일본 수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렇게 격전이 이어지는 도중 조류의 방향이 남동쪽으로 바뀌어, 이번에는 조선 수군에 유리한 흐름이 되었다. 조선 수군의 여러 배들은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총통과 화살을 쏘며 일본 수군을 공격했고, 31척의 전함을 격파하였다. 이에 일본 수군은 후퇴하여 전선에서 물러나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일본 수군이 물러나자 조선 수군은 그대로 정박하려 했으나, 물살이 험하고 바람이 역풍으로 불어 함대를 당사도(唐笥島)로 후퇴시켰다. 이렇게 명량해전은 조선군의 대승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전사하였으며,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를 비롯한 일부 장수들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31척의 전선이 불타 침몰하고 90여 척의 전선이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반면 조선 수군은 전사자·부상자는 있었으나 1척의 전선도 격파되지 않는 비교적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이다. 일본 수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선 수군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순신 스스로도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할 만큼, 명량해전은 기적에 가까운 전투였다.

5 승리의 원인 및 이후의 영향

수적으로 압도적 열세에 처해 있었음에도,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전선과 무기체계가 우월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은 비전투원인 격군(格軍)을 안전하게 보호하였으며, 일본 군선보다 갑판이 높아 일본 수군들이 쉽게 갑판으로 올라와 백병전을 치를 수 없는 구조였고, 선체 역시 일본 전선에 비해 튼튼했다. 그나마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일본 수군의 대형 전함 아다케는 명량해협의 거센 조류로 인해 명량해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이는 조선 수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군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해전을 치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이순신의 대장선이나 안위의 전선은 일본 전선에 의해 포위되어 전투를 치렀지만 상당 시간 버텨낼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 수군이 배 위로 쉽게 올라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함의 대소를 막론하고 화포를 장착하지 못하여 조총이 유일한 화포로서의 구실을 했던 일본 수군에 비해 조선 수군은 총통 등의 화포를 장착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일본 전함에 대해 압도적인 공격력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조선 수군이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다는 점이다. 명량해전 당시 참여한 조선 수군 장수들 중에는 임진왜란 초 이순신과 함께 해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명량해전 직전까지 규합된 병력 역시 원래 수군에 속했던 정예 장병들로 여겨진다. 이순신은 이들을 빠른 시일 내에 재편성하고 사기를 북돋워, 다수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셋째, 의병 및 주변 피난선들이 적극적으로 조선 수군에 협조하였다. 이들은 조선 수군의 성세를 북돋우면서, 군량미 등의 군수물자를 지원하였으며, 연해 지역에서 일본군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하수(馬河秀)와 같은 인물들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넷째, 조선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전술이다. 이순신은 빠른 시일 내에 흩어진 수군 장병과 전함을 모아 전투가 가능한 수준의 선단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칠천량해전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던 부하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노력하였으며, 실제 전장에서는 항상 최선봉에서 일본 수군과 싸움으로써 솔선수범하였다. 또한 명량의 지형지물과 조류에 주목하여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전략적 요충지를 전장으로 선택하고, 이에 맞는 전술을 수립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다양한 요인들이 맞물리면서, 조선 수군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명량해전에 거북선이 참전했다거나, 명량해협에 쇠사슬을 가설하여 일본 수군을 막았다는 등의 주장도 있으나,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명량해전이 전체적인 전세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일본 수군이 서해안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북쪽으로 고군산도(古群山島)까지 북상하면서 물자와 인력을 모았고, 그 사이에 일본 수군은 잠시 명량해협을 통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해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뒤인데다가 겨울이 다가와 서해안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져, 일본 수군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웅천까지 철수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이 명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銳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라 한 바와 같이, 명량해전은 칠천량해전 이후 거침없이 서진하던 일본 수군을 저지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를 통해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칠천량해전으로 인해 패배감에 젖고, 존폐를 위협받을 정도였던 조선 수군이 다시금 재기하여 존재감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도 명량해전의 큰 의의이다. 또한 해전을 통해 서해안의 제해권을 지켜내어, 이 지역을 근거로 조선 수군이 비교적 단기간에 전력을 재건할 수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명량해전은 임진왜란 전체에서도 중요한 전투였으며,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이는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및 조선 수군의 분투가 없었으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명량대첩은 이순신의 여러 승리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승리라는 점에서 이순신의 위대함을 전하는 사례로 기억되었다. 이후 명량해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거둔 “대첩” 중 하나로 후세에 전해졌으며, 1688년(숙종 16) 이를 기념하는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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