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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건립

토문(土門)은 두만강인가? 토문강인가?

1712년(숙종 38)

백두산정계비 건립 대표 이미지

함북 경원 한청정계비

국립중앙박물관

1 북방지역이 개발되다

조선은 일찍부터 4군 6진 개척을 통해 북방지역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압록강 중류지역에 자성(慈城), 우예(虞芮), 무창(茂昌), 여연(閭延) 등에 4군, 두만강 하류지역에 부령(富寧), 회령(會寧), 경성(鏡城), 경흥(慶興), 경원(慶源), 온성(穩城) 등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豆滿江) 이남 지역을 조선의 통제 아래에 두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지역은 해발고도가 높고, 교통이 불편할 뿐 아니라, 방어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결국 조선은 4군을 폐지하는 등 주민들을 다른 지역에 이주시키고, 진보와 같은 방어시설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북방지역은 주민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고, 행정력 역시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다 17세기 전반부터 청이 중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두만강 상류와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도 함께 이동하였다. 이에 1650년(효종 1) 함경감사 정세규(鄭世規)는 두만강변에 주민 이주를 건의하였고, 실제 인근 주민이 이들 지역으로 이주하여 경작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었다. 그러자 숙종대 이후부터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었다. 숙종대 제기된 북방대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청과의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청이 정성공의 반란과 삼번의 난, 그리고 몽고족과 러시아의 침입으로 중원에서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심양이나 청의 근거지였던 영고탑으로 돌아갈 것에 대한 대비였다.

이러한 주장은 1682년(숙종 8) 청에 사신으로 다녀 온 윤이제(尹以濟)가 심양, 산해관 북쪽 성곽, 북경의 성문에 무너진 곳이 많은데도 수리하지 않은 것은 청이 퇴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견해였는데, 당시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는 정치권의 입장과 맞물리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지역에 대한 방어시설을 보강하고, 경제적 지원과 주민의 이주를 독려하면서 북방지역에 대한 개발을 장려하였다.

두 번째 주장은 청과 전쟁발생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방어시설을 보강하는 것보다 압록강, 두만강 유역을 적극 개발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여진족이 중원으로 진출한 틈을 이용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를 개발하여 조선 초기에 확보한 강역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남구만(南九萬)은 차유령(車踰嶺) 이북의 백두산 동남쪽에 거주하는 여진족이 이주하여 비어 있으니, 이곳에 주민들의 거주를 허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함경도 내륙의 진보를 강변으로 옮겨 설치하고, 전쟁 발생시 병력 이동을 위해 길주(吉州)와 갑산(甲山)을 잇는 길을 개척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숙종[조선](肅宗)대 초반까지 정부는 북방개발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 변경에 도로를 설치하면 적에게 침공로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주민들이 거주하면 월경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과의 전쟁 위기가 있는 상황에서 북방개발은 계속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1679년(숙종 5)에 남구만의 제안에 의해 설치된 길주와 갑산 사이의 도로는 차단되었다. 그리고 1674년(헌종 15)에 설치된 후주진이 1686년(숙종 12)에 주민들의 빈번한 월경으로 인해 폐지되었다. 이 같은 북방지역 개발을 억제하여 청과의 충돌을 막으려는 정부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백두산 일대와 두만강·압록강 상류지역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채취와 수렵 등 주민들의 경제활동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 빈번한 월경사건의 발생, 분명한 국경선의 필요성이 제기되다

조선과 중국은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대 인구가 적어 조선인과 중국인이 서로 접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백두산 일대와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지역이 개발되면서 조선인과 청인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 1685년(숙종 11)에는 후주첨사가 무기와 배를 제공하고 토졸을 동원하여 산삼을 캐거나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후주첨사는 자살하였고, 처벌받은 수령이 140명이 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리고 1690년(숙종 16)에는 조선인이 청인을 죽이고 이들의 산삼과 재물을 빼앗아 오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또한 1701년(숙종 27)에도 삼수(三水)현감과 변장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이 압록강을 건너 삼을 캐다가 청인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삼 채취 과정에서 월경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월경하는 사람은 효시(梟示)하는 등 처벌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처벌규정을 강화한 것은 청과의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은 산삼채취 이외에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주민의 월경은 계속 발생하였다. 결국 조선은 1706년(숙종 32)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를 따라 서북지역의 조선 국경 내에서는 인삼 채취를 허용하였다.

조선인의 월경행위 뿐만 아니라, 청인들도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청은 만주일대를 봉금지대로 설정하여 출입을 통제하였다. 봉금지대에서는 일정 기간에 제한된 인원만을 들여보내 담비가죽과 산삼을 채취토록 하였다. 그러나 봉금지대를 출입하면서 담비가죽과 인삼을 채취하는 청인들은 불법적으로 봉금지대에서 장기간 거주하였다. 이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조선 경내를 자주 침범하였고, 조선의 파수장졸을 납치하여 풀어주는 대가로 생필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인과 청인 사이의 충돌이 자주 발생하게 되자, 조선과 청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1710년(숙종 36) 평안도 위원군(渭原郡) 주민인 이만지(李萬枝) 등 9명이 월경하여 청인 5명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러자 피살된 청인의 동료는 이들을 추격하여 압록강을 건너 위원군수에게 범인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난동을 부리고, 순라장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은 압록강, 토문강 일대를 조사하여 경계를 정하자고 요구하였다.

3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다

조선인과 청인이 자주 충돌함에 따라 조선과 청은 분명한 경계 설정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한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선 조선의 북방지역 지형에 대해서 파악되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청은 사신 왕래나 범월사건 조사 등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 북방지역을 조사하려 하였다. 1679년(숙종 5) 청의 관리는 백두산의 형세를 조사하기 위해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와서 평안도 북부와 함경도 북부지역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1691년(숙종 17)에는 사신 5명을 파견하여 평안도 의주(義州), 압록강 주변, 백두산 일대를 조사하기 위해 조선에게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차출하여 이들을 인도해 줄 것으로 요구하였다. 또한 1709년(숙종 35)에는 예수회소속 선교사와 이들이 양성한 중국인들을 중심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지대 지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청의 움직임에 대해 조선은 청인의 입국을 저지하거나, 내국인을 통해 국내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철저히 방지하였다. 1698년(숙종 24) 회령개시 시찰을 위해 조선에 입국한 청의 관리가 회령, 경원 일대의 지형을 파악하고 간 일이 있었다. 이때 조정은 이들에게 노정기를 써준 관리를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조선도 『대명일통지』, 『성경지』 등 청의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성경지』에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남지역이 조선의 강역이라는 사실이 기재된 것을 통해 이 지역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청은 여러 차례 국경지대 조사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지형을 파악하자, 조선에 국경선 확정을 요구하였다. 게다가 1710년(숙종 36) 평안도 위원인의 범월사건이 발생하면서 청은 국경 확정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청은 오라총독관 목극등(穆克登)을 국경 확정과 범월사건 조사를 위해 파견하였다. 목극등 일행은 조선측 대표자인 송정명(宋正明)과 함께 범월사건의 살해현장을 조사한 후 평안도 위원의 조사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위원에 도착한 목극등 일행은 압록강 중상류지역과 백두산 일대 답사를 위해 조선측에 선박과 안내자 차출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목극등의 백두산 일대에 대한 지형 조사 시도는 조선 관원의 반대와 비협조, 그리고 청인이 조선 경내에 침입하여 갑산부에 잡힌 사건이 발생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1712년(숙종 38) 2월 청은 정식으로 외교문서를 조선에 보내 국경조사를 위해 목극등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청의 요구를 거부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숙종은 청이 이미 국경지대에 대한 정보를 상당히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청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조선측 지역의 지름길을 가급적 가르쳐 주지 않고, 백두산을 기준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을 조선의 강역으로 확보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 같은 조선의 방침은 백두산 일대의 진보(鎭堡)가 백두산 남쪽 5~6일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상황에서, 파수처를 기준으로 국경을 삼자는 청측의 주장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은 우선 함경도 남·북병사에게 백두산 일대 지형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청국의 『대명일통지』와 『성경지』에 실려 있는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강역이라는 내용을 근거로 청에 대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 남·북병사의 보고가 미흡하였고, 『대명일통지』와 『성경지』가 청국에서 외부 유출을 금지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조정은 구체적인 대응책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목극등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극등은 백두산 남쪽에 주민이 없는 점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고, 백두산 남쪽에 파수처가 있는 것은 청이 책문 밖에 파수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조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조선과 청의 경계는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으로 확정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양국의 경계로 하기로 결정한 후 두 강의 수원(水源)을 확인해야만 했다. 목극등은 조선측 접대사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의 동행을 거부하고, 청측 일행과 역관, 군관을 대동하고 백두산에 올라 압록강과 토문강의 수원을 스스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조선과 청은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는 내용의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록 강의 정확한 명칭과 수원에 대해 양국간의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계비가 세워짐에 따라 양국의 국경이 처음 명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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