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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서원 설립

서원의 시대가 열리다

1543년(중종 38)

백운동서원 설립 대표 이미지

영주 소수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 서원의 효시

경상남도 영주에 있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은 조선 서원의 효시로, 최초로 정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서원은 전국 각지에 세워지며 학문 활동의 중심지이자 지방 사림의 정치적 근거지로 기능하였다.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이 있기 전까지 서원의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2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설립

경상남도 영주의 소백산 자락, 마치 거북이 엎드린 듯한 영귀봉(靈龜峰) 아래, 죽계(竹溪)와 소나무가 우거진 풍광이 수려한 곳에 한 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조선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백운동서원이며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의 성리학자 안향(安珦)을 기리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안향을 배향한 서원이 풍기군에 건립된 이유는 바로 안향이 이곳 풍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안향은 순흥부 출신이며 본관 또한 순흥이었다. 그러나 세조대에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순흥 또한 역도의 고장이라 하여 쪼개어져 풍기, 영주 등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소수서원은 영주시 순흥면에 속해 있다.

주세붕은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 먼저 안향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지었다. 그 일 년 뒤인 1543년에는 사당 앞에 서원을 지었으니, 바로 백운동서원이다. 이는 남송의 대학자 주자(朱子)가 설립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뜬 것이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이라 이름한 연유에 대하여, 백록동서원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과 산과 언덕과 강물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주세붕이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뜬 것은 단순히 서원의 이름 뿐만은 아니었다. 서원의 설립 목적 또한 향촌의 교화와 성리학의 보급이라는 주자의 목적을 본뜬 것이다. 주세붕은 서원의 설립 과정을 스스로 정리하여 『죽계지(竹溪志)』라는 기록으로 남겼는데, 여기에는 서원 설립의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사실 백운동서원의 설립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주세붕이 부임한 1541년에는 풍기 지역에 큰 가뭄이 있었고 이듬해에도 큰 기근이 연이어 닥쳤기 때문에 풍기 지방의 당시 경제 사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따라서 백성들을 쥐어짜 무리한 공역을 추진하였다가는 민심이 이반할 우려가 있었다. 당연히 서원 건립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안향의 제사는 성균관에서 지내고 있는데 사당을 다시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 둘째, 마찬가지로 이미 학교가 있는데도 서원을 다시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셋째, 기근을 당하였기 때문에 알맞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서원은 선현(先賢)에 대한 제향(祭享)과 후학(後學)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서원 건립 반대의 일차적인 논리는 서원의 기능을 대신하는 기구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현을 위한 제사는 이미 행해지고 있으며, 향교에서 교육을 이미 담당하고 있으니, 서원 건립은 일종의 중복 투자라는 것이다. 또한 기근이 들어 서원 건립을 위한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도 주된 이유였다.

주세붕은 다음과 같이 서원 건립 반대 논리를 반박하였다.

‘주자께서 남강에 일년 머무르는 사이에 백록동서원을 수리하고 또 선현들의 사당을 세우기를 여러 번 반복하셨다. 이때는 금(金)의 오랑캐가 중원을 함락시켜 크게 어지러운 때였고 또한 기근까지 겹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께서 서원과 사당을 세운 것이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으니, 백성이 사람이 되는 까닭은 바로 교육에 있기 때문이다. 사당을 세워 유덕한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하게 하는 교육이 난을 그치게 하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세붕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후학에 대한 교육이 단순한 의례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향촌을 교화시켜 결국 국가를 위한 천년만년의 대계(大計)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주자의 예를 들며 당장의 기근을 구하고 난을 그치게 하는 것보다 서원 건립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렇게만 보면, 주세붕이 마치 이상에만 사로잡힌 맹목적인 몽상가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세붕이 기근 구제를 위한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서원을 세우기 위해 터를 닦는 와중에 구리 수백 근을 캐내어 밑천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업을 통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고을의 황빈(黃彬)이라는 인물이 벼 70석을 내어 건립을 도왔다고 하니, 서원 건립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초기 풍기 지역의 사림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주세붕이 벌이는 사업을 그리 달갑지 않게 바라보았던 듯하다. 백운동서원이 경상도 내의 모든 유생들에게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이 자리 잡아 향촌 사회의 교화에 효과를 보기 시작하고, 이후 사액을 받아 그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지방 사림 또한 서원 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1546년(명종 1) 안향의 후손 안현(安玹)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백운동서원은 한층 더 발전하였다. 안현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서원의 운영 방책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3 조선 최초의 사액, 서원의 시대를 열다

백운동 서원은 지방 사림의 근거지이자 풍속 교화의 중심지로 화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백운동서원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 1549년(명종 4) 풍기군수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스승으로 꼽히는 이황은 성리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향촌 사회의 교화에 그 뜻을 두고 있어, 1556년(명종 11)에는 예안 지역에 실시하기 위한 향약(鄕約)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서적, 노비, 토지 등을 내려주기를 요청하여 서원을 국가에서 지원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1550년(명종 5) 5월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왕명을 받들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라 지었으며, 국왕 명종(明宗)이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서책과 함께 하사하였다. 비로소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이 되어, 조선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된 것이다. ‘소수(紹修)’란 바로 ‘이어서 닦는다’는 뜻으로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서 닦도록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의미로 서원의 편액을 하사한 것이다. 1633년(인조 11)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을 배향하였다.

소수서원이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서원 건립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였다. 각 지방에 서원이 건립되어 교육과 교화, 그리고 정치의 중심지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림의 시대와 함께 서원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수서원은 대표적인 서원의 위상을 유지하여,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되지 않는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현재에는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고, 명종 친필 편액과 편액이 걸린 강당,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안향의 영정(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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