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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대표 이미지

철수하는 프랑스 함대를 포격하는 조선군 보루

Une expédition en Corée (Henri Zuber, 1873)

1 발생배경

천주교는 17세기 초 조선에 서학으로 소개되었고, 이승훈(李承薰)이 청에 들어가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함으로써 1784년(정조 8)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 후 1831년(순조 31)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조선천주교회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와 연결되었고, 도방(Pierre Philibert Maubant), 샤스탕(Jacques Honare Chastan) 등 프랑스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천주교는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인해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당하는 등 선교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와 인연이 있는 철종이 왕이 되고,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안동김씨 가문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조선은 천주교의 선교활동을 방관하였다. 이리하여 철종 재위시절에 천주교 신자는 크게 증가하여 신도수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철종이 사망하고 어린 나이의 고종[조선](高宗)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 권한이 집중되었다. 당시 대내적으로는 진주농민봉기 등 민란이 전국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1860년(철종 11)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면서 안팎으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불안한 인심을 수습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書院撤廢)를 단행하여 양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서양세력과 연결된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한편 1860년(철종 11) 연해주를 차지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한 러시아는 조선에 통상과 러시아 상인들이 조선에 거주할 수 있는 이권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몇 명의 병사를 함경도(咸鏡道) 국경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때 천주교도인 홍봉주(洪鳳周), 김일호 등이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 주교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에 대항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승지 남종삼(南鍾三)도 홍봉주, 김일호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주교를 직접 만나기 전에 자신의 심복에게 홍봉주를 미행토록 하였고, 이들이 서양인과 오랜 기간 내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홍봉주, 김일호의 제안이 통상을 통해 이익을 얻고,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는 천주교의 계책이라고 판단하여 이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이리하여 서양선교사 베르뇌 주교 등 9명의 신부와 많은 천주교신자가 처형당하는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페롱, 리델, 깔래 신부는 신도 조철증이 사재를 털어 마련한 선박을 타고 중국 산동성 옌타이로 피신하였다. 이후 리델 신부는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함대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박해 사실을 알렸다.

2 프랑스군의 침공과 강화부 점령

리델신부로부터 조선에서의 천주교박해 소식을 전해들은 로즈 제독은 조선 침공을 계획하였다. 침공에 앞서 로즈 제독은 리델신부를 통역관, 조선인 3명을 물길 안내인으로 데리고 조선으로 정찰원정을 출발하였다. 로즈 제독은 한강(漢江)하구를 발견하고 강화도(江華島)를 답사하여, 조선의 지형지세를 파악하였다. 그리고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방어시설 등을 염탐하였다. 조선은 어영중군 이용희(李容熙)에게 방어토록 하였으나, 프랑스함대의 강력한 대포로 인해 패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함대는 양화진(楊花津)을 거쳐 고양(高陽) 중리강에 도착하여 머물면서, 한양(漢陽) 도성의 일부를 그림으로 그리고 수로를 측량하였다. 조선의 지형, 지리 등을 파악한 로즈 제독은 산동성 옌타이로 되돌아가 해운장관에게 정찰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는 이 보고에서 자신의 병력으로는 한양을 공격할 수 없지만,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강을 봉쇄함으로써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강화도 점령계획을 면밀히 준비한 로즈 제독은 일본 요코하마의 정예부대를 포함하여 막하의 함대 7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발하여, 9월 5일 작약도(芍藥島)에 도착하였다. 이날 조선정부는 영종첨사 심영규(沈永奎)와 중군 김종화를 파견하여 정찰토록 하였으나, 프랑스군의 방해로 승선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강화부유수 이인기(李寅夔)와 중군 이용회로 하여금 갑곶진(甲串鎭)에서 방어토록 하였다.

9월 6일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갑곶진에 상륙하여 주둔하였다. 그리고 9월 7일에는 도즈리 해군중령으로 하여금 강화부(江華府)를 정찰하도록 명령하였다. 도즈리 중령은 1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강화부에 접근하여, 조선군과 교전한 이후 성을 넘어 들어가 성내를 정찰한 후에 주둔지로 되돌아왔다. 9월 8일에는 로즈제독이 전 병력을 이끌고 강화부 남문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반격을 하였지만, 프랑스군의 대포를 앞세운 강력한 화력에 눌려, 결국 강화부는 함락되었다.

강화부를 점령한 로즈제독은 무기고의 화약, 대포, 투구 등 군수품을 발견하고, 이 곳 강화도가 한양의 관문으로 군사적 요충지임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창고에서 은괴 18상자와 고문서를 발견하고, 이것을 약탈하여 주둔지로 운반하였다. 이후에 프랑스군은 한 달간 강화부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운송되는 미곡운반 통로인 한강입구를 봉쇄함으로써 한양을 고립시켰다. 아울러 강화부 인근을 정찰하고, 무기고, 화약고, 관사 등을 방화하였다. 그러면서 선교사 처형을 주도한 3대신을 처벌할 것과 조약 체결을 위한 사절 파견을 강요하였다.

3 조선군의 반격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위정척사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항로(李恒老)를 동부승지와 공조판서로 등용하였고, 병조판서와 군영대장 등을 소집하여 프랑스군을 방어할 계책을 세웠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를 처벌하는데 공이 많은 훈련대장 이경하(李景夏)를 기보연해순무사에, 이용희를 순무중군에, 그리고 이항로의 제자인 양헌수(梁憲洙)를 순무천총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신관호(申觀浩)에게 병력을 주고 한강 하구를 방어토록 하였다. 이 밖에 경기부좌윤 정규응(鄭圭應)을 경기지방 소모사로 파견하는 등 각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9월 15일에는 흥선대원군이 4개 항목의 양이보국책(攘夷保國策)을 반포하여 프랑스군에 대한 항전의지를 전국에 공표하였다.

9월 9일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순무영의 선봉이 된 이용희와 양헌수는 양화진, 양천(陽川), 김포(金浦)를 거쳐 통진부(通津府)에 도착하였다. 이용희는 우선 로즈제독에게 프랑스선교사가 조선에서 불법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잘못을 지적하고, 지금 프랑스군이 조선을 침략한 죄를 추궁하는 내용의 격문을 보냈다. 이러자 로즈제독은 무고한 천주교인을 살해한 조선을 비난하고, 그 책임자인 3대신의 처벌과 조약체결을 위한 전권대신 파견을 요구하였다.

9월 13일에 흥선대원군은 봉상시 봉사 한성근(韓聖根)을 순무영 초관에 임명하여 광주별파진 50명을 데리고, 문수산성(文殊山城)을 방어토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강화도의 요충지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빼앗기면 강화도를 회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양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9월 19일에 문수산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조선군을 공격하였고, 한성근을 비롯한 조선군은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문수산성을 점령함 프랑스군은 건물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9월 20일에 양헌수는 프랑스군 모르게 강화도에 들어가, 프랑스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지역주민인 이만규(李晩奎)를 통해 인근의 지리를 파악하였고, 강화도내의 적당한 장소로 정족산성(鼎足山城)을 선정하였다. 10월 1일 양헌수는 강화도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양헌수가 정족산성에 도착하였을 때, 승려 13명이 나와 영접하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정족산성 안으로 들어와 전등사의 기물을 부수고 인근을 정찰한 뒤 돌아갔으며, 다시 올 것 같다고 양헌수에게 전해주었다. 다음날 양헌수는 성을 순찰하고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프랑스군이 다시 공격할 것에 대비하였다.

한편 리델신부는 천주교도 최인서(崔仁瑞)로부터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 입성했다는 사실을 듣고, 이를 로즈제독에게 통보하였다. 로즈제독은 이 정보를 듣고, 전등사(傳燈寺)를 다시 공격하기 위해 올리비에 대장과 병사 150명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길 안내와 통역을 위해 리델 신부가 같이 가도록 하였다. 올리비에 부대는 강화도를 점령할 때부터 별다른 조선군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경무장을 하고 전등사로 출발하였다. 이 같이 프랑스군이 정족산성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양헌수부대에게 전해졌다. 양헌수는, 영군초관 김기명(金沂明)과 포수 161명을 남문에, 권설초관 이렴(李濂)과 포수 150명은 동문에 매복시키고, 권설초관 이대흥(李大興)에게 경군 101명과 향군 56명을 주어 서문과 북문을 지키도록 하였다.

프랑스군은 낮 12시경에 공격을 시작하였다. 조선군은 사정거리가 100보밖에 되지 않는 화승총이 주력 무기였지만, 지형상 이점을 이용하여 반격하였다. 전투는 오후 1시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 프랑스군은 부상자가 30여 명이 발생하고, 화약이 부족하자 무기를 버리고 퇴각하였다.

4 프랑스군의 퇴각과 병인양요의 결과

9월 8일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통상과 항해를 위해 조선의 풍습, 생산물, 산업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강화도를 정찰하였다. 9월 11일 로즈제독은 순무영에서 받은 격문에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조선의 답변을 기다리며 9월말까지 체류하고 있었다. 조선정부가 아무런 답변 없이 무력대응을 준비하자, 로즈제독은 11월 초순에 철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강화도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많은 건물을 불태웠다.

그러나 정족산성에 파견한 올리비에 부대가 조선군에게 패하자, 로즈 제독은 즉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로즈 제독은 강화부를 점령했던 9월 8일에 약탈한 은괴와 서적, 외규장각 의궤(儀軌) 등 문화재를 함대에 선적하였다. 그리고 10월 5일 아침 6시에 함대를 이끌고, 갑곶진을 떠나 덕진진(德津鎭) 앞바다를 거쳐 부평 일대로 나아갔다.

프랑스군의 퇴각 소식을 들은 양헌수부대는 강화부에 입성하여 지역민을 안심시켰다. 조선정부도 양화진을 제외한 한강변에 주둔한 병사와 성문의 방어병을 철수하고, 강화도에 파괴된 건물과 군기를 수리하였다. 10월 20일 양헌수는 부대원을 이끌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직접 출정병을 위로하였고,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프랑스군이 퇴각한 이후 조선은 서양의 재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개편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여 우리의 강물이 더럽혀진 것은 천주교도 때문이었으니, 그들의 피로 더럽혀진 것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양화진 근처(오늘의 절두산(切頭山))에 새로운 형장을 만들어 1871년(고종 8)까지 천주교도들을 처형하였다. 또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서구열강과의 통상 및 교류를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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