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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교린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1392년(태조 1) ~ 1879년(고종 16)

사대교린 대표 이미지

조선 전기의 대외관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큰 나라는 섬기고, 이웃과는 사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대는 중국과의 관계를, 교린은 중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지칭한다.

2 사대교린이라는 말의 의미

사대교린(事大交隣)이란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로서, 그 근원은 중국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사대교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대교린이라는 말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고대 서주(西周) 시대에는 주왕(周王)이 각지에 제후들을 봉건(封建)하고, 제후국들이 주왕에게 조공(朝貢)을 바침으로써 주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가 유지되었다. 주왕은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것으로 설명되었으므로, 주왕에 대한 제후들의 조공은 당연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770년 이민족의 침입으로 주 왕실이 동쪽으로 옮기는 등 그 힘이 쇠퇴하여 춘추시대(春秋時代)로 이행하자 주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는 붕괴하였다. 이제 주 왕실이라는 중심이 미약해진 상황에서 새로이 성장한 열국(列國)들 사이에는 새로운 국제사회가 성립하였고, 여기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규율할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교린(交隣)의 이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당시의 교린이란 사대자소(事大字小), 즉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주는[字小] 것을 이상적인 형태로 여겼다. 맹자(孟子) 역시 “이웃 나라[隣國]와 사귀는[交] 데 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오직 어진 사람[仁者]이라야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운 사람[智者]이라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 하여 교린의 도를 어진 사람[仁者]이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事小]과 지혜로운 사람[智者]이 큰 나라를 섬기는 것[事大]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춘추시대 열국은 현실적인 세력관계의 강약에도 불구하고 예(禮)에 따라 소국이 대국을 섬기고, 대국은 소국을 돌보아줌으로써 열국간의 상호 공존 및 결속을 도모하는 것을 교린의 도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교린이 사대(事大)와 자소(字小)를 포함하는 것이며, 대등한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라 현실적 역량이 서로 다른 국가간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개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중국 내의 열국간의 관계를 규율하던 교린이라는 개념과 그를 구성하던 사대·자소라는 단어는 춘추전국시대가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국인 중국과 그 이웃나라들의 관계에 대해 확대 적용되었다. 즉 대국인 중국은 이웃나라들의 군장(君長)을 왕으로 책봉(冊封)하여 그 나라를 보살피고, 이웃나라들은 중국을 대국으로 인정하여 사대하고 조공을 바침으로써 명목상 그 신하로 자임하는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사상과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사상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책봉-조공은 교린의 이념으로서의 사대·자소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한 것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그 외연과 내포를 변화시켜 갔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중국과 주위 국가들과의 관계가 책봉-조공의 명분에 맞게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국이 열세에 처했을 때는 유목민족들이 세운 국가와 정치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신하를 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본적인 대외관계는 사대와 자소를 기본으로 하는 책봉-조공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침입해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3 사대교린의 조선적(朝鮮的) 이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는 이웃 나라와 사귄다는 의미를 가진 교린의 일부분이며, 따라서 두 단어는 원래 상호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사대와 교린이 명확히 구분되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사용된 사대와 교린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삼국 시대부터 책봉-조공관계를 통해 중국과 밀접한 교류를 해 왔으며, 특히 고려 시대부터는 사대라는 단어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를 설명해 왔다. 반면 최승로는 중국에 대한 외교를 사대로, 중국 이외의 국가들에 대한 관계를 교린으로 지칭하기도 하였으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교린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사대와 교린이 상호 대립적인 개념으로 병칭된 것은 조선 시대부터였다. 조선 초에는 “사대하기를 정성으로 하고 교린하기를 신의로 한다.”거나, “사대교린의 도리를 다한다.”는 등의 표현이 등장하였다. 또한 외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역원(司譯院)이나 승문원(承文院)은 ‘사대교린’을 그 임무로 규정받고 있었다.

여기서 사대는 명백히 중국에 대한 관계를 의미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데 반해, 교린은 비교적 다양한 대상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교린이라는 말은 조선이 스스로와 대등한 지위로 대우하였던 일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및 지금의 오키나와(沖繩)에 있었던 류큐(琉球) 왕국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조선과 상하관계를 맺고 사신을 파견하여 교역하는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의 지방 세력들[倭人] 및 조선의 군사적·정치적 영향력 하에 있던 여진족들[野人]과의 관계에서도 사용되었다. 즉 교린은 원래 사대와 자소를 포함하여 이웃 국가와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관계를 지칭하는 사대가 별도의 개념으로 분리되고, 나머지 국가 및 세력과의 대등관계와 상하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대와 교린이 별도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사대에 비해 교린이라는 단어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잘 정착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의 기본 법전이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禮典)에는 사대가 별도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교린이라는 항목은 없고, 다만 대사객(待使客) 항목에서 중국 사신의 접대의례 및 일본·류큐·여진 사신에 대한 접대절차를 함께 규정해 놓고 있다. 즉 법제적으로는 교린이 사대와 대비되는 위상을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1471년(성종 2) 신숙주(申叔舟)에 의해 편찬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는 “교린·빙문(聘問)하고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아야만 그 예절을 다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일본 내 여러 세력의 실상을 파악하여 각각의 세력에 맞게 접대·대처할 수 있도록 일본에 대한 교린 관계의 사실을 집대성하였다. 또한 1554년(명종 9)에 어숙권(魚叔權)에 의해 편찬된 『고사촬요(攷事撮要)』의 서문에는 사대·교린을 중심으로 책을 구성했음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내용에도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항목과 함께 왜인(倭人)과 야인에 대한 접대에 관한 항목이 별도로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왜인·야인과의 관계를 교린이라는 말을 통해 지칭하게 되었고, 그 제도 역시 내실을 갖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조선 전기 사대교린의 전개

조선은 건국하면서부터 새로이 중원의 패자가 된 명에 대한 사대를 천명하였다. 이는 현실적으로 초강대국인 명과 맞서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조선 내부에서도 천하의 종주(宗主)인 명 제국과 바람직한 사대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지향하였던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유교적 원칙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건립하면서, 밖으로 명과의 관계에서는 천자(天子)인 명 황제의 충실한 제후국으로 처신하면서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조선은 여진족이나 일본을 비롯한 주위 세력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중심이 된 안정적인 관계를 확립하려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고려 말부터 큰 문제가 되어 왔던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태조 이성계 때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북방의 여진족들을 조선의 영향권 안에 붙잡아두면서 북방으로 영토를 개척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이러한 구상은 국초(國初)부터 순탄치 않았다. 1392년 건국한 이후 조선에서는 명에 사신을 보내어 태조 이성계의 즉위 및 조선의 건국을 알리고 태조를 조선국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이 여진족과 결탁하여 요동을 넘본다거나, 조선에서 보낸 표문(表文)에 불손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태조의 책봉을 거부하였다. 명과의 사대관계를 정립하고자 한 조선에서는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면서 책봉을 요구하는 한편,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축이 되어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이 제거된 이후 태종이 즉위하고, 명에서도 명 태조가 사망하면서 양국 사이의 위기는 누그러졌고, 명 내부의 제위계승분쟁 과정에서 영락제(永樂帝)가 승리하자 조선이 기민하게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의 관계는 크게 안정되었다. 그러나 명과의 관계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명은 조선에 군마(軍馬), 매, 공녀(貢女), 환관(宦官) 등 다양한 인적·물적 부담을 강요하였고, 조선 출신 환관들이 조선에 칙사(勅使)로 와서 갖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또한 조선과 명이 동시에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면서 여진족 문제로 명과의 관계가 긴장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명에서 태조 이성계를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것을 해명·정정하기 위한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가 양국 간의 오랜 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명과 사대관계를 정립하는 데 성공하였고, 조선과 명의 관계는 비교적 큰 충돌 없이 임진왜란 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은 태종 이후 모든 왕이 명의 책봉을 받았으며,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책봉하지 않는 왕비와 세자도 책봉의 대상에 포함되었고, 명에 연평균 3.3회의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는 다른 나라들보다 명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뜻한다. 명과의 관계에서, 조선은 어디까지나 성심(誠心)으로 사대하는 것을 기본적인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명에 대한 사대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무력 충돌이 없었던 데 반해, 일본 및 여진족을 대상으로 한 교린이 확립되는 데에는 수차례의 전쟁이 동반되었다. 개국 초부터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를 비롯한 일본의 다양한 세력들과 활발히 교섭하는 한편, 왜구를 평화로운 통교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물질적 대가를 제공하는 회유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조선 건국 후 왜구의 수는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1419년(세종 1) 대마도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 및 기근으로 왜구가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조선에서는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여 대마도를 조선의 영향권 내에 확고하게 끌어들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대마도와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등 통교체제를 정비하여 일본의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치적으로 분권화되어 있던 일본의 정세를 고려하여 조선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부르며 조선국왕과 대등한 지위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적국항례를 지향하였으며,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의 지방 세력과는 조선이 상위에서 사신 파견 및 교역을 허가하는 상하관계를 견지하였다. 또한 현재의 오키나와에서 독립적인 왕국을 유지하던 류큐와도 대등한 지위에서 관계를 맺고 교류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집대성되었다. 이렇듯 일본의 여러 세력들과의 관계가 정립되면서 왜구 문제가 해결되었고, 조선은 일본·류큐와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여진족과 조선은 개국 전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동북면(東北面)의 세력가로서 여진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태조가 무장으로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여진족과의 관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조선은 이후에도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을 대여진정책의 핵심으로 여겼다. 건국 이후 조선은 여진족들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여진족 추장들에게 관직을 주고 상경(上京)시켜 시위(侍衛)하게 하는 한편 물질적 대가를 지급하여 우대하였고, 변경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생필품을 구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조선 경내에 들어와 살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명의 회유책을 받아들여 명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조선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여진족들을 군사적으로 복속시켜 변경의 평화를 유지하고 여진족들을 조선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에서 대소(大小) 13차례에 이르는 여진 정벌이 단행되는 등 무력 충돌도 벌어졌다. 조선은 이 과정에서 4군(四郡)과 6진(六鎭)을 설치하여 압록강·두만강 이내를 영토로 편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에 인접한 지역에 거주하는 여진족들은 조선에 입조(入朝)하여 조공을 바치고 회사품(回賜品)을 받아갔으며, 일부는 조선에 귀화하거나 집단 단위로 6진에 거주하기도 하면서 조선의 변경을 지키는 번병(藩屛)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 사대교린 정책의 결과, 조선은 명에 대해서는 충실한 제후국으로 처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외의 주변 세력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은 무로마치 막부와 류큐 왕국에 대해서는 동격으로 대우하였으나,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의 지방 세력 및 여진족 부족들에게는 조선이 자소(字小)할 것이니 그에 보답하여 자신이 명에 대해 하듯 조선에 사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때때로 정벌(征伐)이라는 군사적 수단이 동원되기도 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명과 외교적으로 대립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창출하고자 했으며,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로서 우월한 문화를 바탕으로 주위 지역에 덕화(德化)를 베풀고, 그에 감화를 받은 주위 지역에서 앞을 다투어 사절을 보내어 오는 구도를 지향하였다. 사대·교린은 조선의 이러한 지향을 유교적인 이상을 표현하는 언어로 분식(粉飾)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로 접어들어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로 조선 전기의 사대교린 정책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남쪽으로는 일본이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맞이하면서 다시금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명의 해금(海禁) 정책이 이완되면서 동중국해에 다시금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과 일본의 관계도 삼포왜란(三浦倭亂)·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을묘왜변(乙卯倭變) 등으로 인해 삐거덕거리게 되었다. 결국 일본과의 교린관계는 무로마치 막부를 대신하여 일본을 재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인해 파탄에 이른다. 북쪽의 여진족과의 관계 역시 다수의 여진족들이 조선보다는 명에 조공하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쪽을 선택하고, 여진족 사회 내부의 정치적·경제적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건주여진(建州女眞)·해서여진(海西女眞) 등 유력 집단들과 조선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갔다.

5 조선 후기 사대교린의 변용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쳐 조선의 사대교린은 중대한 위기를 겪었다. 16세기 후반 일본 내부의 정세가 크게 변동하면서 조선은 대마도를 제외한 여타 일본 세력들과의 교섭이 어려워졌고, 일본이 재통일된 뒤 일어난 임진왜란은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단절시켰다. 또한 1609년 일본의 사쓰마번(薩摩藩)이 에도 막부(江戶幕府)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허가 아래 독립국이었던 류큐 왕국을 공격하여 속국으로 삼았고, 이는 16세기 중반부터 소원해져 가던 류큐와의 교린관계를 실질적으로 단절시켰다. 임진왜란 이후 새로 집권한 에도 막부가 대마도를 앞세워 벌인 교섭 끝에 1607년 조선에서 일본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파견하고, 1609년 대마도와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음으로써 일본과의 교린관계는 회복되었지만, 그 형식 및 내용 차원에서 조선 전기의 교린관계와는 큰 차이점을 갖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과 7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였고, 명은 이후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앞세우면서 조선에 대하여 이전 시기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기존의 사대관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어서 17세기 초 여진족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명과 대항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명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청은 명의 충실한 제후국을 자처하던 조선에 압력을 가해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 하였고, 조선이 이에 저항하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무력을 통해 조선을 복속시켰다. 또한 1644년 명이 멸망함으로써 전통적인 사대의 대상이었던 명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조선은 청과 새로운 사대관계를 확립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거쳐, 조선 후기의 사대교린은 조선 전기와 그 대상 및 내용이 크게 달라졌다. 우선 사대의 측면에서는 중화의 중심으로 조선에서 인정했던 명이 멸망하고, 기존에 기껏해야 교린의 대상, 그것도 조선이 우위에 서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대상이었던 여진족이 주축이 된 청과 사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교린의 측면에서는 청에 편입된 여진족 및 일본에 복속된 류큐 왕국이 조선의 교린 대상에서 제외되고, 오직 일본만이 유일한 교린의 대상으로 한정되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를 집대성한 『통문관지(通文館志)』와 『동문휘고(同文彙考)』에는 사대는 곧 청에 대한 관계이고, 교린은 곧 일본에 대한 관계로 개념이 확고히 정립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비해 사대의 대상이 한족(漢族) 왕조에서 이민족 왕조로 바뀌고, 교린의 개념이 “(유일한) 이웃 나라 일본”과의 관계로 명확해진 것이다.

청과의 사대관계는 명에 대한 것과는 달리 조선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청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더욱이 이전까지 야만시했던 청에 사대해야 한다는 굴욕, 병자호란의 원한, 천하의 종주이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해 주었던 명에 대한 배신행위가 된다는 문제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조선은 청과의 사대관계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1644년 명의 멸망으로 중원(中原)을 정복하기 전까지 청은 조선에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고, 명을 치기 위한 원병을 보낼 것을 명령하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에 대한 반감은 커져 갔다.

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이 중원의 주인이 된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져, 과중한 공물의 양을 줄여주는 등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면서도 1650년대 흑룡강(黑龍江) 유역에 진출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조선에 조총수를 요청하여 나선 정벌을 단행하는 등 때에 따라서는 조선에 대해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소현세자의 급사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중심으로 하여 북벌론이 전개되었다. 효종대의 북벌론은 청이 중원 대륙을 확고히 장악해 가는 국제정세와 국내의 사회경제적 상황 등의 문제로 좌절되었으나, 이후에도 조선은 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17세기 후반 내내 북벌론은 중요한 의제로 남아 있었다.

1680년대 이후 청이 중원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고 몽골·티베트 등지에 세력을 뻗치는 등 전성기에 접어들자, 현실적으로 북벌론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청에서도 때때로 양국 사이에 범월(犯越) 문제나 백두산 정계비 건립 문제 등의 현안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강희제(康熙帝)가 조선에 대하여 더욱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조선에 대해 강압적 태도를 취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적극적인 북벌론은 수면 아래로 잦아든 대신 송시열(宋時烈) 등을 중심으로 명나라의 정통을 잊지 말자는 존주론(尊周論)이 강화되었으며, 조선이야말로 멸망한 중화의 정통을 잇는 존재라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대두되기도 했다. 또한 18세기 후반에는 청의 융성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北學)이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기까지 하였다.

조선은 청에 평균 연 3회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바치는 공물 및 방물(方物)의 양은 시대가 지날수록 청에서 줄여주었다. 사대관계의 각종 제도는 명대와 비교해 기본적으로는 비슷했으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명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은 청의 조공국들 중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사대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명에 대한 사대와 청에 대한 사대를 동일시하지 않고, 청을 중화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오래도록 견지하였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교린은 대마도와는 상하관계를 유지하고, 일본을 대표하는 에도 막부와는 대등관계를 맺는다는 이원적인 체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 전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으나, 대마도와 에도 막부 이외의 통교자가 사라졌고, 대마도가 양국 사이를 중개하는 유일한 중개자가 되어 통교체제가 일원화되었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즉 에도 막부와 조선 양측은 양국 관계를 조선국왕과 “일본국대군(日本國大君)”, 즉 에도 막부의 쇼군 사이의 대등한 관계로 규정하였으며, 대마도의 소씨(宗氏)를 양국관계의 유일한 중개자로 삼아 통교·교역을 일원화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 사신의 상경(上京)을 엄금하였으며, 외교적인 현안은 동래부(東萊府)와 대마도의 왜관(倭館)을 통해 처리되었다. 대마도에서는 관수(館守) 등의 상주 인원을 파견하여 조선과의 일상적인 교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막부에서는 조선 관계 사안을 대마도가 처리하도록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마도에 승려를 파견하여 조선과의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를 감독하도록 하는 이정암윤번제(以酊庵輪番制)를 통해 대마도의 자의적 행동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일상적인 교섭이 왜관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조선에서는 일본 막부에는 통신사를, 대마도에는 문위행을 각각 파견하고, 일본에서는 대마도를 통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에 대응하는 대차왜(大差倭)와 문위행에 상응하는 소차왜(小差倭)를 파견하였다. 양국 간의 직접적 교류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조선에서 에도 막부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였다. 조선 전기에도 통신사가 파견되기는 했지만, 조선 후기만큼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중요시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에 통신사는 총 12회 파견되었으며, ‘통신사’라는 명칭이 확립되고 파견이 정례화된 1636년 이후만 해도 9차례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에도 막부 쇼군의 습직(襲職)을 축하하는 목적에서 파견되었는데, 정치적 교류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양국의 친선을 도모함과 함께 선진 문화를 전파한다고 생각하였고, 일본에서는 통신사를 통해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통신사가 지나는 연로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나, 통신사 접대를 위해 일본은 막대한 재정 부담을 지기도 했다. 이와 같이 통신사가 의례적인 사절로서의 측면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조선에서 대마도에 파견하는 문위행(問慰行)과 대마도에서 조선에 파견하는 차왜(差倭)는 수시로 파견하는 외교사절로서 실질적 현안의 처리를 맡았다.

조선이 일본을 유일한 교린의 대상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대한 멸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일본 역시 자신들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는 일본형 화이의식(華夷意識)을 갖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조선에서 보내온 통신사를 조공사절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실질적으로도 양국 사이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는 2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평화롭게 지속되었다. 19세기가 되면 1811년 통신사가 일본의 막대한 재정 부담 등의 이유로 대마도까지만 방문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이후 장기간 통신사 파견이 정지되는 등 양국의 관계가 비교적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왜관 및 문위행·차왜 등을 통한 전통적인 교린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6 사대교린의 종말과 의미

이렇게 일정한 변용을 겪으면서도 장기간 지속된 조선의 사대교린은 19세기에 다시 한 번 위기를 겪게 되었다. 서양 세력이 동아시아에 진출하여 주권 국가(Sovereign State) 간의 평등한 관계를 골자로 하는 유럽식 외교 질서와 근대적 조약 체제를 강요하면서, 전통적·유교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고 있던 사대교린 정책과 충돌하였던 것이다. 게임의 룰이 바뀌면서 청은 전통적인 사대관계에 입각하여 조선을 조공국(Tributary State)으로 대하기보다는 근대적 국제법상의 속국(Vassal State)화하려 하였고, 일본은 조선과의 전통적인 교린관계 대신 근대적 틀에 입각한 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이권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조선 역시 이에 대응하면서, 서양 열강들과 근대적 조약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외교 질서에 편입되어 갔다. 결과적으로 국제관계를 규율하는 질서가 변화하면서 조선의 사대교린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조선의 대외관계, 나아가 조선을 둘러싼 국제관계를 살펴보는 데 사대교린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은 현실적 세력의 강약 및 유교적 이념에 따라 이웃 나라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념·정책으로서의 사대교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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