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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죽음으로써 임금에 대한 충절을 다하다

1456년(세조 2)

1 개요

사육신은 단종[조선](端宗)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했던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의 여섯 신하를 가리키며, 이들이 계획하였던 상왕 복위 모의 사건을 가리켜 사육신 사건이라고 통칭한다. 사육신은 원래 육신(六臣)이라고 지칭되었는데, 이는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서 비롯되었다. 육신을 사육신이라고 한 것은 생육신(生六臣)과 구별하기 위해서인데, 생육신 개념은 숙종대 단종의 복권과 추숭 이후에 나타난 후대의 개념이므로 사육신도 이때 이후 등장한 개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조[조선](世祖)의 집권 이후 단종은 오랫동안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복위시키려 했던 사건도 공식적으로 이름 붙이지 못하고 사육신 사건이라고 불리었다.

2 사건의 배경

문종[조선](文宗)이 즉위한 지 2년 남짓 만에 어린 세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단종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단종 즉위 초의 정국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대신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대신들은 당시 왕권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국왕의 숙부들을 경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세력이 강성하였다. 결국, 수양대군은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왕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핑계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유교의 성현인 주공(周公)을 자처하며 조카를 도와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계유정난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 10월 10일 자신을 따르던 무인들을 동원하여 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먼저 김종서의 집을 방문하여 그를 살해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단종의 처소 및 도성의 성문과 주요 요충지를 장악하였다. 그런 다음 왕명으로 여러 재상들을 차례로 불러 자신들과 대립하고 있던 황보인, 조극관(趙克寬), 이양(李穰), 민신(閔伸) 등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안평대군과 그 아들을 체포하여 강화도에 안치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 일파는 주요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정권을 장악한 뒤, 단종을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惠嬪) 양씨(楊氏)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자신의 친동생이지만 자신과 대립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역모로 몰아 유배 보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수양대군은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수양대군은 단종 3년 6월 세종의 후비인 혜빈 양씨와 그 아들인 한남군(漢南君) 이어(李 〈玉+於〉), 영풍군(永豊君) 이천을 비롯하여 상궁 박씨, 금성대군 이유 등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모두 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몇 차례에 걸친 반란 모의에 대한 고발을 거쳐 이들을 지방에 귀양 보내는 것이 결정되자 단종은 스스로 자신의 왕위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전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흔들리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해 거사를 도모하였다는 그의 명분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집현전(集賢殿) 출신의 문신 일부를 중심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을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3 사건의 가담자와 육신의 개념

단종 복위 모의 사건이 단지 여섯 명의 신하들에 의해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집현전 출신의 문신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무신들과 단종의 외척들의 가담하였다. 이들 가운데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은 모두 세종 20년에서 29년을 전후하여 집현전에서 관직생활을 했다. 그 중에서도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은 모두 정묘년(세종 29, 1447) 문과중시(文科重試)의 동방(同榜)이었다. 그리고 하위지와 성삼문은 박팽년의 부친인 박중림(朴仲林)의 제자로서 집현전에 들어가기 전부터 교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박팽년, 유성원, 이개, 하위지는 단종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 직후 세조가 집현전을 혁파한 것을 보아도 이 사건의 모의가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의 참여자 중에서 성승(成勝), 유응부, 박쟁(朴崝)은 무반 출신의 관료였다. 성삼문의 부친이었던 성승을 중심으로 성승과 같은 중추원 소속이었던 동지중추원사 유응부, 첨지중추원사 박쟁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세종 때부터 성장한 원로 무신으로서 세조의 집권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이다. 세 번째로 단종 복위 모의 세력을 구성하는 인물들은 권자신(權自愼) 등이다. 권자신은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우이자 단종의 외숙이다. 그는 단종의 외할머니가 되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단종과 연락했다.

사육신 사건이 발각되자 세조는 그것을 계기로 사면령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서 규정한 사육신 사건의 가담자를 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먼저 이개와 그의 도당으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박중림·김문기(金文起)·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허조(許慥)·박대년(朴大年)의 이름이 올랐고, 이들이 장신(將臣)인 성승·유응부·박쟁·송석동(宋石同)·최득지(崔得池)·최치지(崔致池)·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성삼고(成三顧) 등과 결탁하였으며, 권자신·윤영손(尹令孫)·조청로(趙淸老)·황선보(黃善寶)·최사우(崔斯友)·이호(李昊)·권저(權著)와 연결하여 몰래 궁금(宮禁)에 연통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복위 모의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자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자신의 어머니이자 단종의 외할머니인 아지(阿只)는 단종과 복위 세력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의 여종인 불덕(佛德)과 봉보부인의 여종이었던 아가지(阿加之)는 무녀 용안(龍眼)과 판수 나가을(羅加乙)에게 청하여 ‘상왕께서 금년에 복위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는 말을 끌어내기도 했다.

아가지는 자신의 남편인 이오(李午)를 끌어들여 단종이 권자신에게 칼을 내릴 때 역할을 하도록 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시녀 춘월(春月)과 충개(蟲介)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처럼 사육신 사건은 단종을 지지하는 여러 세력과 인물들이 힘을 모아 추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후대에 일반적으로 사육신 사건이라고 지칭될 정도로 사육신을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사건임에도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명의 충신’이라는 이미지가 이 사건을 설명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 때문이다. 사육신이 아직 충신으로 복권되기 이전 후대의 사람들은 육신전과 같은 야사를 통해 당시의 사건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육신전이 기술하고 있는 사건의 내용과 관점이 후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육신전은 성종 때의 문사 남효온이 지은 것으로, 다섯 명의 집현전 출신 문신과 한 명의 무신에 대한 전기 형식으로 복위 모의 사건을 설명하였다. 이 글은 복위 모의 사건에 대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으며 후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의 영향 때문에 단종 복위 모의 사건은 사육신을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4 복위 모의의 내용

복위 모의 내용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연회에 참석한 세조를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당시에는 세조를 조선 국왕에 책봉하는 조칙과 고명을 가지고 명 사신이 와 있었고,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연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연회에 별운검(別雲劍)으로 참여한 성승, 유응부, 박쟁이 세조를 척살하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연회에 별운검이 시립하는 계획은 취소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거사를 실행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세조를 살해하려는 계획은 모의가 발각된 뒤 박팽년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드러났다. 박팽년은 성승 등이 운검(雲劒)이 되었기 때문에 세조를 죽일 기회가 생겼다고 대답했는데, 실록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부기되어 있다. ‘대개 어전에서는 2품 이상인 무반(武班) 2명이 큰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侍立)하게 되어 있다. 이날 임금이 노산군과 함께 대전에 나가게 되고, 성승·유응부·박쟁 등이 별운검이 되었는데, 임금이 전내(殿內)가 좁다고 하여 별운검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성삼문이 승정원에 건의하여 없앨 수 없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다시 전내를 살펴보게 하고, 드디어 별운검이 들어가지 말게 하였다.’

한편, 단종 복위의 모의자들은 대신들 가운데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할만한 인물로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을 생각하고 있었다. 성삼문이 정창손의 사위인 김질(金礩)과 접촉한 것은 그러한 의도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보인다. 또한 단종 복위 모의 세력은 세조 정권의 중신 가운데 제거해야 할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해 놓고 있었다.

성삼문은 김질에게 모의에 참가하도록 권하면서, 좌의정 한확(韓確)은 북경(北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우의정 이사철(李思哲)은 본래부터 결단성이 없지만 정창손은 정직하다는 인망이 있다고 했으며, 윤사로(尹師路)·신숙주(申叔舟)·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같은 무리는 먼저 제거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박팽년의 인척으로 거사에 참여하였던 김문기(金文起)는 당시 도진무(都鎭撫)가 되었으므로 자기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모의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김문기는 거사를 모의하면서 “그대들은 안에서 일이 성공되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다 한들 그들을 제재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는 말을 했다.

이처럼 단종 복위 모의는 단지 연회 석상에서 세조를 참살하는 계획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조 정권에서 제거해야 할 인물들의 살생부를 작성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도성을 장악하는 의논을 하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협력할 대신을 물색하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5 사건의 발각과 처벌

세조 2년 성삼문 등의 주도로 추진되던 단종 복위 모의는 김질(金礩)의 고발로 인해 실행되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연회에서 세조를 죽이기로 한 거사가 실행되지 못하자 그 다음날 김질은 자신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를 찾아가 그간에 있었던 논의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날로 주요 관련자들은 모두 잡혀 와서 세조로부터 친국을 받고 의금부(義禁府)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뒤에 체포된 인사들에 대한 심문은 의금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실록에는 의금부에서 이루어졌던 심문 과정에 대해서 특별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육신전에서는 이들이 심문 받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는데, 육신의 충성심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단종 복위 모의에 참가한 이들에 대한 처벌은 먼저 의금부에서 심문 결과를 가지고 형률의 해당 조항에 비추어 그 처벌 내용을 임금에게 보고하면 세조는 보고 내용에 따라 그대로 따르거나 몇 가지 내용을 수정하여 판결을 하며 그 판결에 따라 형이 집행되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의금부에서는 모의가 발각된 지 사흘 만에 이들에게 적용할 형률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에 따르면 단종 복위 모의는 ‘모반’과 ‘대역’에 해당되어 주모자와 가담자의 구별 없이 참여한 이에게는 모두 ‘능지처사’의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가족들 또한 연좌되어 처벌을 받게 되는데, 해당자의 아버지와 16세 이상 아들은 교형에 처하여 죽이게 된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은 공신의 종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재산은 모두 몰수하게 된다.

세조는 의금부에서 올라온 형률 적용의 보고를 받고, 최종 판결을 내려 처벌을 명령하였다. 그의 명령은 율문의 규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친자식이라도 15세 이하면 죽이지 않고 종으로 삼는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모두 교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연좌인들은 공신의 집에 종으로 준다는 규정 대신 국경지방의 작은 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을 멀리 귀양 보내어 안치시키는 대신 작은 고을의 노비로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당시 세조는 형률의 적용을 더욱 가혹하게 조정했던 것이다.

세조는 사육신 사건의 주모자들에 대해서, 친자식들은 모조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사육신을 비롯하여 모의 가담자 중 주모자에 해당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6월 8일 곧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6월 8일 성삼문 등 모의의 주모자들은 백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형에 처해졌으며, 머리는 3일 동안 저자에 효수되었다.

심문 도중 죽은 박팽년과 체포되기 전에 자살한 유성원과 허조에 대해서도 따로 시체를 거열하고 목을 효수하였다.

6 사건 관련자들의 복권과 추숭

사육신 사건의 연루자들은 모반과 대역의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극형에 처해졌고, 그 가족들은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으며 재산도 몰수되었다. 조선 왕조의 정통이 세조의 직계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그들은 반역자의 굴레를 벗기 어려웠다. 하지만 세조 정권 성립 당시부터 세조 정권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단종을 보위하다가 죽음을 당한 이들을 충신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이 공공연히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사육신 사건 연루자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그 절의를 추숭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중종 12년 경연 때에 정순붕(鄭順朋), 기준(奇遵) 등은 성삼문·박팽년 등이 노산군을 복위시키려 한 것에 대해, 그 죄는 처벌해야 하지만 절의는 처벌할 수 없으므로, 그들을 난신으로 버려두지 말고 절의를 숭상하여 후세에 권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사사되고 사림이 패퇴하면서 더 이상 이러한 주장이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후 인종[조선](仁宗) 때 경연에서 시강관 한주(韓澍)가 육신에 대해 당대의 난신이나 후세의 충신이라는 평가가 있다고 하였고, 선조 때 김성일(金誠一)이나 조헌(趙憲)이 육신의 복작(復爵)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박계현(朴啓賢)은 임금에게 육신전을 볼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는데, 육신전을 읽은 선조는 진노하여 그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도 세조의 후손인 조선의 국왕은 사육신 사건을 반란 사건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박계현은 경연 때에 선조에게 육신전을 볼 것을 권유하였는데, 육신전을 읽은 선조는 진노하여 그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의정 홍섬(洪暹)이 들어와 만류해서 겨우 그만두게 하였다.

이후에도 효종 때 전 판서 조경(趙絅)이 육신의 절개는 칭찬할만하다고 하면서 그 집에 정려할 것을 청하였고,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과 박팽년을 지역의 사당에 배향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숙종대에 들어와서 허적(許積)은 노량진의 육신묘를 봉식하자고 청하였고, 강화유수 이선(李選)은 상소하여 육신의 죄명을 씻어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육신에 대한 추숭은 숙종 17년에 와서야 실현되었다. 숙종은 능행에서 돌아오면서 노량진을 지나다가 육신의 무덤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이어서 성삼문 등 육신을 복관(復官)하고, 무덤 가까이 건립되어 있던 육신 사당에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러한 명령이 내려가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찬반의 논란이 벌어졌는데, 결국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이 명령은 확정되었다.

숙종은 육신의 복관과 민절사의 사액을 결정하고 비망기를 내려 절의(節義)의 숭상을 강조하였으며, 후대의 임금은 선왕의 잘못을 숨겨주어야 한다는 반대 주장에 대해 세조 또한 육신에 대해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을 인용하여 육신의 복관이 세조가 남긴 뜻을 잇고 세조의 성덕을 빛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영조 때에는 사육신에게 시호가 내려졌다. 성삼문은 충문(忠文), 박팽년은 충정(忠正), 이개는 충간(忠簡), 하위지는 충렬(忠烈), 유성원은 충경(忠景), 유응부는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영조는 단종이 추복된 지 1주갑이 되는 것을 기념하여 장릉(莊陵)을 봉심하고 창절서원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엄흥도(嚴興道)를 그 서원에 배향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육신과 삼상에게 시호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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