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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철폐

누적된 서원의 폐단을 일소하다

미상

1 서원의 성립

서원(書院)이란 유생의 사학(私學)기관으로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풍기는 안향의 고향인데 주세붕이 안향의 옛 집터에 사우를 짓고 학교를 지어 유생이 거처하는 것으로 삼고 곡식을 저축하여 이자를 받는 것으로 경제기반을 삼고 터를 닦을 때 나온 구리 그릇 3백여 근을 팔아 책을 마련하였다. 주세붕은 송사를 다스림에 있어서 교화를 위주로 하여 헐뜯고 비웃던 자들도 점차 감복하였다.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청렴결백하였고 구황에도 능해서 1백여 명 가까운 사람을 구해내기도 했다.

1548년(명종 3) 풍기군수가 된 이황(李滉)은 백운동서원에 대한 지원과 사액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고 국가로부터 서책 등을 지원받았다.

이후 서원은 국가의 보조를 받아 각지에 세워지게 되었다. 명종 대에는 18개소, 선조 대에는 60여개 소가 세워지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서원은 사림의 강학처인 동시에 유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기존의 기능과 더불어 이황·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 소위 문묘오현을 제향하는 서원이 다수 건립되는 등 점차 사림계의 정치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역할 또한 수행하게 되었다.

2 서원의 변질과 영조의 서원 정리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정치의 발달과 더불어 차츰 중앙의 집권세력과 서원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후 숙종 시기 잦은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숙청된 인물들의 정치적 복권을 기도하는 장소로 바뀌어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같은 인물에게 제향을 지내는 서원들이 불필요하게 중복되어 만들어지는 경우들이 늘어났다.

영조 17년에는 탕평정치의 일환으로서 당론적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던 서원의 훼철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4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173개의 서원이 철폐되고 100여 명의 관련 전직 지방관을 처벌하고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생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으나 영조는 법령이 해이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하에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탕평 차원에서 서원 정책 운영과 금령 위반자에 대한 일체의 예외를 두지 않는 강력한 금지 정책은 당론적 이해의 반영 소지를 줄였고 서원의 남설 경향을 둔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35년간 단 2개의 서원이 추가되는데 그쳐 서원의 급격한 증가 경향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시기 철폐된 서원은 전체의 십분지 일, 이에 불과한 것이어서 여전히 남은 서원들이 일으키는 폐단은 존재하고 있었다.

3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서원 철폐

세도정치 시기 이후 고종의 집권과 더불어 실권을 쥐게 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서원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의 하나로 인식하고 이를 추진해 간 것으로 보인다.

고종대 서원 철폐 논의는 고종 원년 4월 대왕대비의 전교로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서원의 면세 결수를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원의 실상을 파악하고 정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후 다시 대왕대비의 전교에 의해 중첩과 사사로이 남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전교가 내려왔다.

이러한 전교들이 즉각적인 서원의 정리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일단은 서원 신설의 금지 정도에서 그쳤다.

대원군 정부 초기의 대대적인 서원 정리계획을 강행하지는 않고 과도한 폐해를 엄금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짓게 된다.

1865년(고종 2) 대왕대비는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만동묘(萬東廟)를 폐쇄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송시열의 유언으로 만동묘를 세웠지만 숙종 때에 이미 대보단(大報壇)을 세웠으니 만동묘와 기능이 중복된다는 명분으로 이를 폐지하기로 하였다.

만동묘는 17세기 중반 대표적인 산림이었던 송시열의 유지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가 민정중(閔鼎重)·정호(鄭澔)·이선직 등의 도움을 받아 건립한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의 원조에 대한 사은의 표시로 명의 의종과 신종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과 함께 관민에 대한 폐해가 극심한 곳으로 이전부터 주목받아왔다.

만동묘의 위세는 대단하여 만동묘의 중수를 위해 자신들의 지역을 넘어서 경상도 상주의 승려들을 징발하기도 하였다. 이에 충청도 관찰사에서 이들을 구금하려 하자 도리어 상소를 올리고 항의를 하는 등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유생들은 이 문제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비록 만동묘가 중복 설치된 측면이 있고 일정정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 바는 있지만 그럼에도 대명의리론의 준수라는 차원에서 만동묘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며 일찍이 정조가 어필을 내려준 바도 있으니 사실상 국가에서 공인되어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만동묘를 사실상 일종의 시범으로서 철폐한 것으로서 향후 서원 철폐를 해나감에 있어서 명분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조야의 빗발치는 요구를 묵살해버렸다.

이후 병인박해(丙寅迫害)와 병인양요로 서원에 대한 정리 작업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1868년 5월부터 재차 서원 정리에 들어갔다. 특히 이 시기에는 미사액서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가 이루어졌다.

서원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의 하나로서 서원에 불법으로 의탁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군정으로 뽑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서원의 원장을 맡게 하여 서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면서 서원들을 대대적으로 철폐되었다. 서원의 건물들을 허물면서 나온 기와와 목재는 건축 자재로 재활용되었고 서원의 재산도 국가로 귀속되었다. 서원에게 주어진 전답은 관아에 귀속되거나 향교에 귀속되었고 노비들도 관노비로 전환되었다.

이후로도 조정에서는 사액서원에서 붕당이 발생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경계하여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정리한다는 경고를 하였다.

최종적으로 대원군은 한 사람에게 제사지내는 서원은 하나만 남겨놓고 만동묘의 예처럼 모조리 철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예조에서 남겨두기에 적합한 47개의 서원을 선정하여 보고하였고 이외의 서원은 모두 정리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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