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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설치

대궐에 북을 달아 백성의 억울함을 듣다

1401년(태종 1)

1 신문고 제도의 시작

조선 시기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가진 자에게 이를 소송할 수 있도록 대궐에 북을 달아 알리게 하던 제도이다. 등문고 혹은 승문고(升聞鼓) 로 부른 적도 있었다.

신문고는 1401년(태종 1) 7월에 안성학장(安城學長) 윤조(尹慥)와 전 좌랑 박전(朴甸) 등이 “송(宋) 태조(太祖)가 등문고를 설치하여 하정(下情)을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아름답게 여기오니, 원컨대 고사(故事)에 의하여 설치하소서.”라고 올린 상소를 수용해 등문고를 설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 달 후인 8월 의정부의 상계에 따라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은 우선 관청에 해당 사실을 고하되, 해당 관청에서 이를 다스리지 않을 경우 등문고를 두드리도록 하였다. 그러면 해당 사안을 사헌부(司憲府)에서 규명하게 하였는데, 만약 사사로운 일로 무고한 경우에는 반좌율(反坐律: 남을 무고하였을 경우, 무고한 자에게 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는 것)로 논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등문고에서 신문고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후 11월 16일에 신문고가 완성되어 이를 걸고, 26일에 이를 설치한다는 정식 교서를 반포하였다. 교서에 따르면, 신문고로 고할 수 있는 사항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치와 민생 문제, 둘째, 개인적인 억울한 사항, 셋째 반역 음모이다.

첫째, 정치와 민생 문제 같은 경우에는 의정부에 글을 올려도 임금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 북을 치도록 하였다. 이 경우 쓸 만한 말이면 바로 채택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용서해주도록 하였다.

둘째,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해당 관청(서울에서는 주무 관청, 지방에서는 수령과 감사)을 통해 호소하였는데도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는 사헌부에 올리도록 하였는데, 사헌부에서도 이를 해결해주지 않을 경우에 북을 치도록 허용하였다. 이 경우에는 관련 관청에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벌을 내릴 것이며, 중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북을 친 경우[越訴]에는 이것도 논죄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반역 음모나 종친이나 훈구를 모해하는 등의 일인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직접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이 경우에 말한 것이 사실일 때에는 파격적인 상(토지 2백 결(結)과 노비 20명을 상으로 주고 유직자(有職者)는 3등을 뛰어 올려 녹용(錄用)하고, 무직자는 곧 6품직에 임명할 것이며, 공사 천구(公私賤口)도 양민(良民)이 되게 하는 동시에 곧 7품직에 임명하고, 범인의 집과 재물과 종과 우마(牛馬)를 주되 많고 적음을 관계하지 않음)을 주도록 하였으며, 무고의 경우에는 반좌율로 논죄한다고 하였다. 신문고는 순군(巡軍)의 영사(令史) 한 명과 나장(螺匠) 한 명으로 지키게 하였고, 영사가 북을 두드린 사람의 진술을 받고 거주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2 신문고 제도의 문제점과 유명무실화

세 가지 목적을 위해 신문고 설치하였으나, 설치 후의 주된 격고(擊鼓)의 내용은 당시 진행된 노비 변정 과정에 대한 불만이나 개인 대 개인의 노비 송사나 상속과 같은 재산 문제였다. 이 때문에 이러한 노비 변정 문제에 대한 격고를 금지하고 노비 송사 관련 사항에 대한 규칙을 만들었다. 또한 민간의 사정이 위에까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이들이 정책 실행을 방해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

신문고는 세종대를 거쳐 문종대 무렵까지 활발히 이용되었다. 이에 더하여 어가가 행차할 때 그 앞에서 청원하거나 글을 써서 올리는 일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의금부에서 신문고를 두드리는 것을 막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동일한 사안을 가지고 여러 차례 북을 두드리거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북을 두드리는 일 등도 문제가 되었다. 또한 신문고로 해당 관청의 태만이나 오류가 발견되었는데도 이를 처벌하는 일이 적다는 것이 지적된 바도 있었다.

신문고 제도는 의금부 당직청에 신문고를 설치하고, 보고 및 처리 절차, 허위고발 처벌, 고발 불가 사항 등의 규정이 『경국대전』에 수록되면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대 이후로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문고를 두드리는 것을 금하게 되고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었다. 그러다가 1471년(성종 2)에 상언이 지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성종의 의도에 따라 다시금 신문고를 두면서 잠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상언을 하거나 개인적 문제를 가지고 바로 신문고를 치는 등의 사례가 많아지자 폐지 여부가 논의되었다.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어도 신문고를 치는 경우나 징을 두드리며 청원하는 것[擊錚] 등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면서 사실상 거의 유명무실화되었다.

신문고가 잠시 부활한 것은 영조대였다. 1771년(영조 47) 11월, 영조는 국초의 신문고제를 다시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창덕궁(昌德宮)의 진선문(進善門)과 경희궁(慶熙宮)의 건명문(建明門) 남쪽에 설치하게 하였다. 신문고를 칠 수 있는 경우는 격쟁에서처럼 4가지 사안에 한정되었는데, 적첩분별(嫡妾分別), 형륙급신(刑戮及身), 양천변별(良賤辨別), 부자분별(父子分別)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이를 폐지하려고 하였다가 다시 설치하기도 하였다. 폐지하려고 한 이유는 신문고 설치를 계기로 이미 오래된 사안까지 청원하는 일들이 생긴다는 이유였는데, 결국은 같은 이유로 1775년(영조 51) 함부로 북을 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활발하게 이용된 것은 아니었어도 고종대까지도 신문고를 치는 일은 종종 있었다.

3 신문고 제도에 대한 평가

신문고는 태종 대 설치된 이래로 『경국대전』에서 제도화되었고, 조선말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활발히 이용한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때도 있어서 꾸준히 활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신문고는 하정을 상달하게 하고 무질서한 월소의 폐단을 방지한다는 원칙에 기반한 만큼 이것이 운영된 시기에는 임금의 행차 앞에서 바로 글을 올리거나 호소하는 가전신정(駕前伸呈)이나 격쟁 등을 금지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으며, 신문고를 두드리는 사유도 그 대부분이 개인적인 이해나 노비·형옥·재산 문제에 관한 것이 되어 지나치게 두드리는 폐단이 발생하자 결국 이를 금지하거나 엄하게 제한을 두곤 하였다.

이처럼 신문고는 국왕에게 백성들의 하정이 상달될 수 있게 한다는 원칙에서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언로의 확장과 국왕의 친림과 친정의 이상을 실현하는 제도였으며, 원칙적으로는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설치, 운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운영상의 난점, 까다로운 절차로 인해 백성들도 가전신정이나 격쟁을 선호하게 되면서 폐지되거나 유명무실했던 시기가 많았던 제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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