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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공허한 학문(虛學)’에서 ‘참된 학문(實學)’으로

미상

실학 대표 이미지

반계수록 표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실학(實學)이란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주로 ‘공허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비되어 사용되어 왔던 용어이다. 일제 말 이후 한국사 연구자들은 17세기 이후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의 중농학파,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의 북학파 등 조선 사상계의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용어로 실학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실학은 현재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을 통칭하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다.

2 실학의 개념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한 이래, 참된 학문에 대한 추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어떠한 학문이 참된 학문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당연히 그 학문이 전개되고 있던 사회의 특성에 따른 것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의 뜻을 따르는 기독교적 신학이 참된 학문이었을 것이며,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 시기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곧 참된 학문이었을 것이다. 학문과 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참된 학문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이 보다 직접적이었다. 참된 학문은 당시 사회의 가치와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사회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 때 참된 학문은 다른 학문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북송 말기 중국에서 신유학이 새로운 사상적 조류로 등장하면서, 신유학자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축하였다. 신유학의 특징 중 하나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리(理)를 탐구한다는 것인데, 불교와 도교에도 이미 리(理)에 대한 사상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신유학 또한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신유학자들은 그동안 불교와 도교에서 이야기해왔던 리(理)란 공허한 리(空理, 虛理)이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리(理)야말로 참된 리, 즉 실리(實理)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실리를 추구하는 신유학이 참된 학문, 즉 실학(實學)이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실학은 이전까지의 학문적 경향을 잘못된 학문이라 비판하는 새로운 경향의 학문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최승로(崔承老)는 유교를 불교에 견주어 실학이라고 지칭하였다고 하며, 고려 말기 성리학자들 또한 도교와 불교를 허학이라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성리학이야말로 실학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실학은 유교 본연의 경전을 충실하게 연구하는 경학(經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실학이라는 용어가 성리학에서 주로 쓰였던 것이 확인되지만, 반대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실학을 내세운 경우도 있었다. 송대 이학(理學)의 학풍을 비판하였던 명대 나흠순(羅欽順), 서구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며 비실용적인 성리학을 비판하였던 일본 에도시대의 학풍에서는 실학의 반대가 바로 성리학이었던 것이다.

전근대 시대의 용례를 보았을 때, 실학이란 특정한 하나의 학풍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전의 학문 경향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학문 경향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실학이라 규정하였고 이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지칭하고 이전 시대의 학문을 허학이라 비판하는 방법이 유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실(實)을 중시하는 유학의 특성이 있었다는 점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3 실학의 역사

근대 역사학에서 하나의 특정한 학술 경향을 규정하는 용어로 실학을 사용한 것은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국학자들이다. 당시 일제가 식민사학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타율성, 정체성(停滯性), 당파성의 역사로 왜곡하였던 것에 대해 민족주의 국학자들은 실학 연구로 맞섰다.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 민족주의 국학자들은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을 맞은 1934년 정약용의 학문을 정리하면서 실학 연구의 계기를 열었다. 일제의 역사 왜곡에 맞서서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실학이라는 민족적, 민중적, 실용적인 학풍이 있었으며, 이는 1930년대의 현실 속에서 우리 민족이 계승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 국학자들의 작업 또한 본질적으로 일제 역사학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정약용과 실학을 민족적, 민중적, 실용적 학풍으로 규정하였을 때, 조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주자학은 실학의 반대점에서 반민족적, 반민중적, 반실용적 학풍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민족주의 국학자들이 정약용에 주목하기 이전 이미 일제 역사학자들은 정약용을 한반도의 행복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실학에 대한 관심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식민사학의 잔재를 걷어내고자 한 역사학자들은 민족주의 국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 사회를 이끌어내는 가능성이 있었던 실학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17세기의 한백겸(韓百謙), 이수광(李睟光), 김육(金堉) 등이 실학의 선구자로, 그 뒤로 유형원, 이익, 안정복(安鼎福), 박세당(朴世堂), 이중환(李重煥) 등이 실학의 맹아를 틔운 학자들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18~19세기에 이르면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洪大容), 정약용, 김정희(金正喜), 최한기(崔漢綺) 등이 실학의 전성기를 이끈 것으로 파악하였다. 어떠한 학자들을 실학자로 정의할 것인지, 그리고 실학의 각 계열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남인계열의 학자들은 중농학파,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의 낙론 계열 학자들은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로 분류하였다. 또한 실학은 주자학 일변도로 교조화된 성리학으로부터 벗어나서 근대 사회를 지향한 학문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실학의 특징을 탈성리학, 근대지향으로 파악한 이러한 연구 경향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성리학자들도 사용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실학파로 지칭되는 인물들에게서 실학이라는 용어가 학문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학이라는 용어를 규범적인 의미로 사용한 나머지 실학적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학자들까지도 실학자로 파악하였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실학과 성리학을 지나치게 구분한 나머지 성리학에서 실학으로의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실제로 실학자로 규정된 여러 인물들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덕과 의리를 상당히 강조하고 있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새로운 학풍을 실학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후기 학계에 역동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는 점은 공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4 중농주의 학파- 유형원과 이익, 정약용

실학파는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유형원을 비롯한 중농주의 학파와 박지원을 위시한 북학파가 그것이다. 각 계열 별로 주요 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유형원은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로 꼽히는 학자이다.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부안에 은거하면서 그의 필생의 역작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집필하여 조선 사회의 전면적 개혁을 촉구하였다. 『반계수록』은 무려 20여 년 간의 연구를 통해 탄생한 대작으로, 중국 및 고려, 조선의 각종 법제를 다양하게 고찰한 끝에 개혁안을 이끌어내었다. 전제(田制), 교선지제(敎選之制), 임관지제(任官之制), 직관지제(職官之制), 녹제(祿制), 병제(兵制), 군현제(郡縣制) 등 각종 사회제도에 대해 자세하게 자신의 개혁론을 개진하였다.

유형원이 중농주의 학파로 분류되는 이유는 토지 제도의 개혁을 근본으로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이끌어내려 하였기 때문이다. 유형원은 고대 정전제(井田制)의 정신에 입각한 토지 개혁을 주창하였다. 정전제는 조선의 여러 학자들이 주목하였던 이상적 제도이고 이를 세법에도 반영하기는 하였지만, 유형원과 같이 근본적인 개혁론을 제출한 경우는 없었다.

유형원은 정전제의 이상이 바로 공전(公田)에 있다고 보고 개인의 이욕만을 위한 사전(私田)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 후 이를 귀천의 차별을 두어 재분배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형원은 당시의 토지 제도가 항상 변화하는 인구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 기준이 명확하지 못하여 폐단이 생겨나 몇몇 부유한 가문에만 토지가 집중된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인구가 아닌 토지를 기준으로 삼는 공전제를 실행하여 당시의 여러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유형원은 주장하였다. 또한 토지제도 개혁을 바탕으로 사회의 각종 제도를 이에 맞추어 정비할 것을 촉구하였다. 비록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개혁론이어서 그의 주장이 그대로 정치에 반영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개혁론이 가진 의미와 그 궁극적인 목표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공감하였다.

근기 남인의 학통을 이은 이익은 실학을 조선 학계에 단단히 뿌리내리도록 한 학자로 평가된다. 이익 또한 유형원과 같이 전제 개혁에 주목하였다. 당시 토지가 지나치게 소수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익은 토지 소유의 하한선을 설정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하한선 이하의 토지는 대대로 영세토록 농사짓는 토지로 두어 사적인 매매를 엄금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모든 이들이 조그마한 토지라도 소유하여 농사지을 토지가 없는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익의 아버지와 형은 붕당간의 정쟁으로 인해 희생당한 바 있다. 따라서 이익은 붕당의 폐해에 대해서도 지적하였다. 그는 붕당은 곧 이해관계를 두고 서로 싸우는 데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 파악하였다. 이해관계가 절박하기에 붕당이 심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되면 될수록 붕당 또한 고질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관직의 수가 한정되어 있어 경쟁이 심해지는 것이 붕당의 폐해가 끊이지 않는 이유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는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인 효렴과(孝廉科)나 현량과(賢良科)를 개선책으로 제시하였다.

정약용은 실학을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호 이익의 문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 학풍을 익혔다.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던 행정 관료로서, 뛰어난 실무 능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실로 방대하고도 뛰어나 후대 연구자들의 실학 연구가 그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정도였다.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끝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여 권의 대저술을 남겼다. 정약용 또한 토지개혁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양반과 부호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소작농과 유민으로 전락해가는 당시 상황 속에서 그는 토지 개혁을 통해 지주제도의 폐해를 없애고자 하였다.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두 단계로 나뉘는데,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작성된 토지개혁론에서는 여전론(閭田論)을 주장하였다. 여(閭)는 자연적인 지형을 기준으로 획정된 하나의 구역을 뜻한다. 한 여의 가구수는 대략 30가구 내외로 한다. 여 여섯이 합쳐지면 이(里)가 되고, 이 다섯이 합쳐지면 방(坊)이 되며, 방 다섯이 합쳐지면 읍(邑)이 된다. 여에는 여장(閭長)이라는 지도자가 있어 엄격하게 지휘한다. 여의 토지는 해당 여의 여민(閭民)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장으로 땅주인에 구별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에만 따른다. 여장은 농경에 종사한 개개인의 노동량을 기록하고, 가을이 되면 세금과 여장의 봉급을 제외하고 수확물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다.

이보다 뒤에는 거의 완전한 정전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국가에서 공전 1구를 매입하고 사전 8구에 해당하는 백성들이 공전 1구를 공동 경작하게 하여 해당 수확물만 공세로 납부하게 하고 사전의 수확물은 자기의 소유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고대 정전제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전제 그 자체를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토지개혁을 통해서만 조선 사회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파악하였던 것이다.

5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노론 낙론 계열의 북학파는 북경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북학을 주창하였다.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기치를 내걸고 특히 상공업의 육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중상주의 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박지원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용후생을 강조하였다. 이용이 있고서야 후생이 가능하고, 후생이 있고서야 바로 정덕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박지원이 이용후생에 주목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의 주장은 항산(恒産)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을 이은 것이며, 경제와 사장(詞章)이 의리의 전제조건이라는 홍대용의 주장과도 통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실학의 주체를 사(士)로 설정하였다. 사의 학문이 농공상의 이치를 포괄해야 하고 농공상의 일도 사가 있어야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여,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사의 책무를 단순히 학문과 정신 수양에만 두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수레 도입을 주창하는 등, 청으로부터 배워 상공업을 촉진시키자고 주장하였다.

박제가 역시 경세제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용과 후생 가운데 하나라도 소홀하다면 정덕을 해친다고 하여 이용과 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박제가는 농업 생산력의 증진뿐만 아니라 상업과 유통 및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많은 학자들이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하였던 상업에 주목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수레・선박・도로 등의 기반시설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 진다면 마음의 공부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실학과 조선 사상계를 지배한 성리학과의 관계는 아직 더 밝혀야하지만, 유형원, 이익 등 남인 계열의 학자들과 박지원, 박제가 등 노론 낙론 계열 학자들의 목표는 분명하였다. 바로 조선 사회의 오래된 병폐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앙 정계에 있는 관료들도 사회 개혁이라는 목표에는 동의하였지만 이들은 그리 급진적인 개혁론을 내놓을 수 없는 위치였다. 유형원이나 이익, 정약용 등은 정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에 오히려 중앙 정계에서 내놓을 수 없는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비록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을지언정, 홍대용, 박지원 등의 북학 또한 신선한 주장이었음에는 분명하다. 논란이 지속되고 있긴 하지만, 실학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을 지칭하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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