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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예제(禮制) 논쟁이 정치 투쟁으로

1659년(효종 10) ~ 1674년(현종 15)

예송 대표 이미지

경국대전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요

예송은 조선 17세기 현종~숙종대 시차를 두고 일어난 효종 상(喪)(1659년, 효종 10)과 효종비 상(喪)(1674년, 현종 15)에서 인조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남인 정파간의 두 차례에 걸친 예설 논쟁이다. 표면적으로는 서인·남인간의 왕실 전례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한 대립이었지만 실제로는 서인의 성리학풍과 남인의 탈성리학적 육경고학풍이라는 학문적 성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 이념논쟁이었다.

2 16세기 예학의 발전

조선 중기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의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심성론(心性論)이 발달하게 되었다. 심성론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심성론에 기반한 사회윤리론인 예학의 발달을 유도하게 되었다. 곧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사회윤리론으로 구체화한 것이 예학이었던 것으로 성리학이 조선화하는 과정에서 예학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6세기말 이황이나 이이와 같이 뛰어난 사림학자들이 등장하여 이기론에 기반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 심성론 논쟁이 있었고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예학 또한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이 시기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의 질서는 근원에서 크게 와해되었고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예학의 현실적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퇴계학파의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 율곡학파의 송익필(宋翼弼)·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 등이 이기심성론과 함께 예학을 연구, 이 시기 수많은 예서들이 쏟아지게 된 것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보여 준다. 이렇게 예학적 기반이 조성된 위에서 17세기 조선 사회를 뒤흔든 양차의 예송이 일어나게 된다.

3 17세기 조선 사회의 변화와 예송의 발생

17세기 초 광해군대 대북정권은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지만 계축옥사의 후유증과 반명분적 실리외교 등으로 사림세력의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서인과 남인세력은 정치적으로 연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대 대북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서·남인 연합 정권은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워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다가 후금(청)의 공격을 받아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조선](仁祖)는 중과부적의 형세 하에서 끝내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으며 그 와중에 첫째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에 볼모로 잡혀 가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9년간 심양에 체류하면서 청의 유력 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조·청 양국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소현세자의 이러한 행동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결국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는 9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였으나 인조를 위시한 조선 조정의 냉대 속에 석달 만에 급서하고 만다.

당시 소현세자는 세자빈 강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니 당연히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야 했지만 인조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또한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씨를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첫째와 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이 살아남았다. 호란의 여파는 조선왕실에도 큰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사망하고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를 하였다. 효종은 주화파를 몰아내고 자신의 스승이자 서인의 대표적 산림이었던 송시열을 등용하게 된다. 효종은 양란을 거치면서 근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조선사회의 질서를 다잡기 위하여 성리학의 명분론을 재차 강화시키는 방향을 취하였고 이를 위해 송시열로 대변되는 척화파 사림과 결탁하였던 것이다.

효종과 척화파 사림의 새로운 사상적·정치적 노선은 북벌정책으로 드러났다. 효종대의 북벌정책은 유교의 ‘존주론(尊周論)’에 입각하여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청에 대해서는 복수설치하자는 명분론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명분론은 예치론(禮治論)과 맞물려 있었다. 유교성리학의 사회윤리론이 예학이었고 이를 국가의 통치윤리로 구체화한 것이 예치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6세기 이래 발달해온 조선예학은 17세기 양란 이후 조선이 택한 명분론적인 사상·정치적 방향과 맞아 떨어짐으로써 최선의 발전 토양을 제공받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현종~숙종대 조선사회를 뒤흔든 양차의 예송, 곧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일어나게 된다. 예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예치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예학적 대립이 곧 정치적 대립으로 화하게 된 것이 예송이었던 것이다.

4 1차 예송 : 1659년(효종 10) ‘기해예송’

즉위 후 10여 년간 북벌정책에 매달리던 효종은 1659년(효종 10)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이때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자의대비는 인조비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사망한 후 1638년(인조 16) 인조 계비에 책봉된 조창원(趙昌遠)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로 자손을 두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붓아들 효종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입게 되었다.

처음에 국상이 나자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특히 전지평 윤휴(尹鑴)는 『의례주소(儀禮註疏)』 참최(斬衰) 조항 중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명명한다.’는 구문에 따라 참최3년복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비록 둘째이나 적자로서 왕이 되었으니 장자로 보아야 하며 또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하므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논의가 분분하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서인 산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에게 복제를 상의하게 되는데, 이때 송시열은 『의례주소』 중에 ‘천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장자가 죽고 차장자가 후계자가 되면 장자와 같은 복을 입는다.’고 하였지만 그 아래에 또 ‘사종지설(四種之說 :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이 부기되어 있으니 이에 의하면 효종은 사종지설중 ‘서자(庶子 : 여기서의 서자(庶子)는 첩자(妾子)가 아닌 중자(衆子)의 의미임)가 승중(承重)한 경우에는 3년을 입지 않는다’는 경우, 곧 체이부정(體而不正 : 적자(嫡子 : 體)이나 장자(長子 : 正)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은 불가하며 기년복(朞年服 :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답하였다.

정태화가 깜짝 놀라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는데, 누가 감히 이 설을 인용하겠는가? 국제(國制 : 『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설을 쓰겠다.’고 하였다. 결국 정태화의 뜻대로 영돈녕부사 이경석·영의정 정태화·연양부원군 이시백·좌의정 심지원·원평부원군 원두표·완남부원군 이후원 등은 모두 국제를 시왕례(時王禮 : 현재의 예)로서 찬성하였고 여기에 송시열·송준길도 합의하여 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윤휴는 계속 이전의 주장을 고집하였고 해를 넘겨 1660년(현종 1) 3월에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효종은 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왕위에 오른 ‘정체(正體)’인데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지 못하는 자와 동등하게 되었다’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복제를 3년복(자최 : 齊衰 3년복)으로 변개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윤휴는 허목에게 ‘『의례주소』의 뜻이 매우 분명하니 효종이 ‘정(正)’이 아니라는 설은 첩(妾)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사례(士禮)는 천자제후례(王禮)에 적용할 수는 없다. …… 이미 왕이 된 자에게 강복(降服)하는 것은 ‘이종비주(貳宗卑主 : 宗統을 둘로 나누어 왕을 낮춤)’의 잘못에 다름 아니다. (송시열 등이) 둘째아들을 서자(庶子)로 대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는 취지의 글을 보내어 호응하였다.

그 뒤 4월에는 또 호군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을 논척하였는데, 삼사가 함께 일어나 논죄하여 상소는 불태워지고 변방에 유배되었다.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주장이 일자  우상 원두표(元斗杓)도 여기에 동조, 5월에 차자를 올려 삼년복 개정을 청하기도 하였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윤휴·허목·윤선도·원두표 등의 남인세력은 『의례주소』 참최장을 근거로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장자로 보아야 하며 이에 3년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중에서도 특히 윤휴는 3년복은 말할 것도 없이 왕에게는 어머니도 신하가 된다는 입장에서 가장 무거운 복인 참최삼년복을 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송시열 등 서인세력은 『의례주소』 중 장자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사종지설에 따라 효종이 둘째아들로 통을 이은 경우, 곧 ‘체이부정’에 해당하며 서자(庶子)일 뿐이니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정태화가 서인의 예설을 위험시하였던 것은 인조의 적자인 소현세자는 죽고 없지만 그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은 1656년(효종 7) 귀양에서 풀려나 1659년(효종 10)에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에 책봉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송시열의 예설에 따르면 효종이 변칙적으로 왕위에 올랐고 원칙대로라면 경안군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현종초 기해예송으로 인해 왕실의 위험인물로 떠올랐던 경안군은 우연인지 모르지만 1665년(현종 6)에 사망하게 된다.

이처럼 서인의 예설은 현종대 왕실에게 매우 위험하게 비쳐질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었고 이에 정태화를 위시한 여러 대신들은 무난하게 국제인 『경국대전』 중 장자·중자를 막론하고 기년복을 한다는 조항을 내세워 기년복으로 서둘러 복제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대신들은 국제를 내세워 기년복을 결정하였지만 사람들은 송시열의 예설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된 것, 곧 서인측의 예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장자에게 3년복, 중자에게 기년복을 입는 것이 고례(古禮 : 『의례주소』)이고 장자·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은 시왕례(『경국대전』)인데, 애당초 정한 것은 비록 국가 제도(『경국대전』)을 사용하였으나 그 후에 여러 신하들이 쟁론한 것은 고례를 가지고 논변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년복제에 대하여 ‘3년복을 행하지 않고 기년복으로 한 것은 중자에게 입던 고례를 따른 것이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왕실은 국제에 따른 기년복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사림들은 고례에 따른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국제를 내세워 왕실의 혐의를 피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학 원칙을 관철시켜 나갔던 서인 산림세력의 고집스러운 모습을 알게 된다.

이처럼 갑인예송의 결과 복제는 애매한 기년복으로 미봉되었지만 현종[조선](顯宗)으로 대변되는 조선왕실은 기년복설의 문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기해예송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잠재되어 있었으며 15년의 시간이 흐른 후 갑인예송에서 다시 불붙게 된다.

5 제2차 예송 : 1674년(현종 15) ‘갑인예송’

1674년(현종 15) 2월 현종의 어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 이에 대해 남인이 찬한 『현종실록』에서는 ‘기해년에 송시열이 의논을 수렴하면서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핑계 댔는데, 그 뜻은 실상 『의례주소』에 따라 효종을 서자로 바라본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기년복을 정해 올리자 당시 송시열의 무리들이 편지를 보내 위협하니 이조판서 조형 등이 여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 대공복으로 고쳐서 올렸다.’고 하였다. 곧 기해년 효종상시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비록 국제로 표방되었으나 서인들은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으로 여겼고 같은 선상에서 갑인년 효종비상에서도 예관들이 정한 장자부 기년복을 중자부(서자부) 대공복으로 변개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후 남인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곧 유학(幼學) 도신징(都愼徵)은 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이 상소에 고무된 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 행호조판서 민유중, 병조판서 김만기 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 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현종은 ‘중자가 적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된다.’는 예설을 상고해 올리라고 하였다. 현종은 기해년 윤휴·허목·윤선도의 예설, 또 이 예설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로써 서인들의 예설을 꺾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관들이 기해예송시 허목의 상소와 1666년(현종 7) 유세철(柳世哲)이 올린 상소, 또 『의례주소』 참최장의 구문을 덧붙여 올리자 현종은 경전의 주소를 해석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의례주소』 참최 조항중 ‘장자가 죽으면 적처(嫡妻)가 낳은 둘째를 세우고 역시 장자라 부른다.’는 구문에 근거하여 장자부에 대한 복으로서 대공복이 아니라 기년복으로 고쳐 올릴 것을 명하였다.

국왕이 나서서 남인측의 예설에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인과 남인의 예설중 왕권에 무게를 실어주는 남인 예설에 쏠리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현종은 기해예송시 갓 즉위한 신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재위 15년 여를 지내고 안정된 왕권을 확보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 예설을 뒤엎고 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인사 이후 정국은 서서히 남인 우세의 구도로 흘러가게 되었다.

6 갑인예송 직후의 남인정국과 남인예설의 승리

이러한 정국의 변화 기류 속에서 갑자기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조선](肅宗)이 즉위하게 된다. 현종을 이어 즉위한 14세의 유주(幼主) 숙종은 갑인예송에 대한 부왕의 유지를 이어 서인의 예론이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어지럽히는 것이라 보는 입장이었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유학(幼學) 곽세건(郭世楗) 등의 상소를 통해 정치적인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곽세건은 기해년의 서자기년복(庶子朞年服) 주장은 송시열에 의해 창도되었다.’며 송시열을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숙종은 남인측의 주장에 공감, 송시열의 잘못을 명백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곧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李端夏)가 현종의 행장을 지으면서 복제 개정에 대해 모호하고 소략하게 서술하자 숙종은 엄명을 내려 예를 그르친 예관과 대신들을 분명하게 지목해 고쳐 쓰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단하는 이러한 서인 예설의 주창자인 송시열에 대해 ‘예경을 잘못 인용하였다(誤引禮經).’고 쓰게 되었다.

이로써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예설의 '잘못(誤)'이 공식화되었고 송시열은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송시열 유배 직후부터 남인들 내에서는 고묘(告廟), 즉 예를 바로잡은 일을 종묘에 고하자는 주장이 나와 송시열은 사사될 수도 있는 극히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송시열의 처지에서 상징되듯이 서인들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허적을 영의정으로 하는 남인정국이 전격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정권 교체는 숙종대를 점철한 ‘환국(換局) 정치’의 서막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남인예설이 승리하고 남인정국이 구성되자 윤휴는 다시 현종에 대한 조대비의 참최3년복설을 주장하게 된다. 곧 조대비에게는 현종은 비록 손자이지만 현종이 왕위에 있었으니 어머니나 할머니라 할지라도 신하된 도리로서 참최3년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왕에 자신이 주장한 예설의 연장선상에서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이었다.

윤휴는 왕례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남인예설의 입지점을 다시 한 번 숙종에게 각인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7 숙종대 서인-노론 예설의 우세

숙종 즉위 후 남인은 예송에서 승리하였고 이를 계기로 집권하게 되었다.

집권한 남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의 수위 등을 둘러싸고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분기를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탁남이 우세하였다. 허적·민암(閔黯)·이원정(李元楨) 등의 탁남은 잦은 고변(告變) 등으로 서인을 도태시키는 한편 허목·홍우원(洪宇遠) 등 청남도 공격하여 정치세력을 전일화하여 나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숙종은 수차 청·탁남의 화협을 촉구하였다. 또한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주도하려던 서인 척신계 김석주(金錫胄)가 오히려 남인세력에게 밀려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세력과 연결하게 된다.

결국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또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정국이 구성된다. 이는 탁남이 지나치게 독점하게 된 것에 대한 숙종의 경계와 이에 대한 김석주계와 김만기(金萬基)계(숙종의 제1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부친) 등 서인 척신계의 호응에서 비롯하였다. 이 과정에서 갑인예송시 남인예설의 승리도 뒤집히게 되었다. 허목은 문외출송되었고 윤선도는 관작과 시호가 삭탈되었으며 윤휴는 사사되었으니 남인예설의 대표적 논자들이 모두 처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경신대출척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의 강도를 둘러싸고 서인 내에서도 강경론과 온건론이 대립하게 되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기가 일어났다.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과 윤증(尹拯)을 영수로 하는 소론의 분기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남인과 서인, 또 노론과 소론간의 급진적 정권 교체(환국)은 수차례 계속되었다. 1680(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재차 남인이 집권하였으며, 1694년(숙종 20)에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였다. 1717년(숙종 43)에는 병신처분(丙申處分)〔병신환국(丙申換局)〕으로 노론이 집권하였다. 이처럼 수차의 환국을 거치면서 결국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 그중에서도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노론의 정치적 우세가 갈수록 분명해져갔는데, 이 과정에서 서인예설의 우위 또한 확고부동해져갔다.

8 서·남인의 학풍 차이로 바라본 예송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학파의 차이는 정파의 차이로 이어졌기에 정파간의 대립에는 기본적으로 학문적 성향차이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대체로 서인이 성리학에 충실하고자 하는 순정성리학풍을 지향하고 있었다면 남인의 경우는 성리학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교의 원류인 육경고학(六經古學)을 추구하는 탈성리학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학풍의 차이는 예학의 차이, 또 양차 예송시 예설의 차이로 드러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차 예송에서 서인이나 남인들은 모두 고례인 『의례주소』에 입론하였지만 그 중에서 양측이 착목한 구문이 달랐다. 양측의 예학적 입지점이 달랐기 때문에 똑같이 고례를 참고하면서도 착목한 예설이 달랐던 것인데, 가장 주요한 입지점으로서 사례(士禮) 및 왕례(王禮)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곧 서인측은 사례와 왕례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천하동례론(天下同禮論)’의 입장이었고 남인측은 왕례는 사례와 다른 특수한 예로 사례 너머에 존재한다는 ‘왕자례부동사서론(王子禮士庶不同論)’의 입장에 서 있었다. ‘천하동례론’이 송대 사대부층의 계층적 입장을 반영한 성리예학의 주된 경향중 하나였다면, ‘왕자례부동사서론’는 고대 막강했던 왕권의 흔적을 담고 있는 육경고학적 예학의 주된 경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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