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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

이방원의 시대가 열리다

1398년(태조 7)

1 제1차 왕자의 난

1392년(태조 1) 조선을 건국한 후 만으로 6년이 지난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난이 일어났다.

훗날 태종[조선](太宗)이방원(李芳遠)과 이방간(李芳幹) 등 왕자들이 중심이었다 하여 이를 왕자의 난이라 부르고, 2년 후인 1400년(정종 2)에 일어난 난과 구별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또한 이방원이 주도하였다 하여 ‘방원(芳遠)의 난’ 혹은 ‘태종정사(太宗定社), 무인년에 발생한 사직을 안정시킨 행위라 하여 ‘무인정사(戊寅定社)’라 하기도 하고, 정도전(鄭道傳)이 일으켰다고 하여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건국 후 건국에 공이 있었던 인물들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책봉되며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으나 왕실 및 종친은 개국공신에 책봉되지 못하였고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되었다. 이는 개국 과정에 지대한 공이 있었던 왕자와 종친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건국 직후 세자(世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장자(長子) 혹은 개국 과정에 가장 공이 많은 자를 책봉하는 등의 원칙을 분명히 세우지 않고, 계비(繼妃) 강씨(康氏) 소생의 막내 아들인 방석(芳碩)을 책봉하였다.

이는 개국 과정에 가장 공이 많았던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의 불만을 일으켰다. 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원래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장자 혹은 공이 많은 자를 세우자고 건의하였으나 이성계가 계비 강씨의 뜻으로 강씨 소생 아들 중 첫째인 방번(芳蕃)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방번의 사람됨이 광패(狂悖)하다 하여 막내인 방석(芳碩)을 선택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왕자들과 종친들을 권력 일선에서 배제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이 와중에 세자의 가장 절대적인 지지자라고 할 수 있는 계비 강씨가 1396년(태조 5) 훙(薨)하였다.

갈등은 1398년(태조 7) 최고조에 달하였다.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진도(陣圖)≫에 대한 훈련 실시 등을 통해 왕자들과 종친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사병들을 국가로 흡수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왕자들과 종친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요동 정벌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개국공신 세력들과 왕자들 사이의 갈등이 이처럼 고조되던 무렵, 태조가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다.

태조의 병환은 후계 구도가 펼쳐질 것이라는 직접적인 신호로 왕자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실록이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조선 시기의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철저히 이방원의 입장에서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들이 먼저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전한다.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과 판중추(判中樞) 이근(李懃)·전 참찬(參贊) 이무(李茂)·흥성군(興城君) 장지화(張至和)·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등이 임금의 병을 문안한다고 핑계하고는, 밤낮으로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였다. 이들은 궁궐 안에 이방석(李芳碩)·이제(李濟)와 친군위도진무(親軍衛都鎭撫) 박위(朴葳)·좌부승지(左副承旨) 노석주(盧石柱)·우부승지(右副承旨) 변중량(卞仲良)이 머무르게 하면서 임금의 병이 위독하다고 일컬어 여러 왕자들을 급히 불러들이고, 왕자들이 이르면 군사를 내어 공격하도록 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은 밖에서 응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기사일(8월 26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러한 음모는 정도전의 편이었던 이무가 방원 측에 전달함으로써 알려졌고, 방원 측은 이들보다 한발 앞서 이숙번(李叔蕃) 등의 사병을 동원하여 송현에 있던 정도전과 남은·심효생·박위·유만수(柳曼殊)·장지화·이근 등을 갑자기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정도전의 세 아들 중 정유(鄭游), 정영(鄭泳)도 살해당하였으며 조카 정담(鄭湛)도 자살하였다.

그리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방석의 동복형(同腹兄) 방번도 함께 죽였다. 또한 동복 누이인 경순공주(慶順公主)의 남편인 이제 역시 죽였다. 방번과 이제의 제거는 태조로서도 예상하였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매우 안타까워했으며, 이는 눈물을 흘리며 경순공주의 머리를 직접 깎아 비구니로 출가시켰다는 기록이나 두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여러 차례 절에서 불공을 드렸다는 이방번(李芳蕃)의 신도비에 관련 내용이 전하고 있다.

이렇게 방원의 정적은 거의 제거되고, 방원의 심복인 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이무 등이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 자신이 사양하고 장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안군(永安君) 방과(芳果)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방원 일당이 장악하였다. 난이 일어난지 10일이 안 된 9월 5일 태조는 드디어 방과에게 선위하였으며, 이가 곧 정종[조선](定宗)이다.

정종이 즉위한 후 방원을 비롯한 왕자들과 종친, 난에 직접 참여한 인물들과 포섭을 위해 회유한 조준, 김사형(金士衡) 등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서훈되었다.

2 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1400년(정종 2)에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이다.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이 주도하여 일으켰다고 하여 방간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박포(朴苞)가 중간에서 형제를 이간질하여 일으켰다고 하여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쳐 정종이 즉위하면서 방원 일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병을 왕자들과 종친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종에게는 정비(正妃) 소생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후사는 동생들 중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며, 가장 유력한 이는 역시 이방원이었다. 익안대군 이방의(李芳毅)는 왕위에 뜻이 없었던 반면,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가 방간에게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를 하였다. 박포는 원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그러나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해 불평하다가 죽주(竹山)로 귀양간 바가 있었다.

방간은 박포의 밀고를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건의 진행 과정을 보면, 박포는 거병 당시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였고, 방간의 거병 계획을 직접적으로 태종에게 고한 것은 방간의 처조카 이래(李來)였다. 그는 좌주(座主)였던 우현보(禹玄寶)에게 알리고 우현보가 그의 아들 우흥부를 통해 방원에게 알림으로써, 이방원 역시 거병을 대비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양측은 둑제(纛祭)를 위한 사냥을 핑계로 사병들을 모아 거병하게 되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자남산이라고도 함)에서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방원이 승리하였다. 방간은 예전 고려 공양왕이 건설한 적경원(積慶園) 터에 도착하여 투항하였고, 그의 희망에 따라 토산(兎山) 촌장(村庄)으로 추방하였다. 방원 측의 추궁에 따라 방간은 박포가 중간에서 거병하라고 유인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에 따라 박포는 함주(咸州)에 귀양을 갔다가 나중에 그곳에서 사형 당하였다.

이로써 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그의 정치적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방원의 세자 책립은 결정된 셈이었다. 난이 평정된 뒤 3일 후인 2월 1일에 방원의 심복 신하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방원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어 11월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세자로 책봉된 후 선위를 받기 전까지 방원은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건국 후 계속 문제가 되었던 군권을 일원화하여 사병을 혁파하여 삼군부로 일원화시켰으며, 이어 관제를 개정하여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설립하였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삼군부와 의정부에 군권을 적절히 배속함으로써 군권의 쏠림이나 지나친 분산을 막았다. 또한 승정원(承政院)을 따로 두어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다. 결국 제2차 왕자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고, 태종이 추진한 왕권 강화 정책과 제도개혁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물들은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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