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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

명의 무리한 압력을 물리치고자

1388년(우왕 14) ~ 1398년(태조 7)

1 개요

요동 정벌은 고려가 명의 철령위 설치 시도에 반발하여 1388년(우왕 14년)에 요동을 공격하고자 시도한 사건이다. 요동 정벌은 위화도회군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2 요동 정벌 당시의 정세

14세기 중반,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원은 황제 자리를 둘러싼 내분과 남방에서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쇠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초기부터 강력한 반원정책을 표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자들을 쫓아내고 대외적으로는 군사를 파견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중에 원에 상실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였다. 또한 1368년에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명이 원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중국을 지배하게 된 후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자, 이듬해 명과 새로이 사대관계를 맺었다. 이는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존세력인 북원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고려는 세 차례에 걸쳐 지금의 요양(遼陽)인 동녕부(東寧府)의 북원세력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명이 북원을 격파하고 직접 요동에 세력을 뻗치게 되자 고려와 명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명은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고려 사신의 요동 입국을 막는 등 고려의 요동 진출을 견제하였으며, 고려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면서 고려가 북원과 연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악화되어 가던 고려-명 관계는 친명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공민왕이 시해되고, 고려에 파견된 명의 사신이 살해된 데다가, 우왕(禑王)이 등극한 이후 새로 집권한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원과 통교하는 이중적인 외교를 펴면서 더욱 험악해졌다. 당시 이색은 시를 지어 명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북원과는 자주 통교하는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였다. 명은 공민왕의 암살 이후 고려를 더욱 의심하며 고려에 무거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고려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관계는 잠시 정상화되었다가 다시 악화되는 등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를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명이 1387년(우왕 13년)에 요동에 있던 북원의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 요동을 직접 장악하게 되자, 고려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 명이 고려를 침공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표류한 명의 배를 고려를 침공하러 온 배라고 오인할 정도였다. 우왕은 요동에서 명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몸소 갑옷을 입고 숨기까지 하였다.

명과 사대관계를 맺은 상황에서 북원의 사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사대부들은 옳지 않은 처사라고 비판하였다. 반면 명의 지나친 물자요구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한 명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최영(崔瑩)이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었다. 최영은 우왕 6년(1380) 명에서 많은 양의 물자를 요구하자 “징발하는 데 염치가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어서 1387년(우왕 13년)에도 명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오자 “이와 같다면 병사를 일으켜 명을 치는 것이 낫다.”고 하기까지 했다.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에 대해서 현상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며 많은 부정을 저지른 이인임 정권은 결국 1388년(우왕 14)에 최영과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에 의해 무너지고, 최영은 재상인 문하시중에, 이성계는 부재상인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최영은 자신의 딸이 우왕의 왕비가 되면서 절대적인 입지를 확보하였다. 명의 압력에 비판적인 최영이 고려의 실권을 쥐게 되면서, 명에 대한 고려의 태도는 언제든지 변화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3 요동정벌의 실행과 좌절

명은 북원의 잔존세력을 요동에서 몰아낸 이후, 1387년(우왕 13) 12월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관할 하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 이 사실은 고려에서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있던 설장수를 통해 고려에 정식으로 통보되었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에 의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가 공민왕대 무력으로 수복한 지역으로서, 고려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명의 철령위 설치 소식을 접한 고려에서는 각 지역에 성을 수축하고 여러 장수들을 서북 지역에 파견하여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박의중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어 철령 이북이 원래 고려의 땅임을 밝혀 명을 설득하고자 했다. 한편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 정벌을 모의하였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대신들을 모아 명의 정요위(定遼衛, 현재의 요양)을 칠 것과 화의를 청할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고, 대신들은 화의를 택하였다. 이어 최영은 다시 철령 이북의 땅을 명에 넘겨주어야 할 것인지 여부를 물었고, 신료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답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388년(우왕 14) 3월에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명에서 철령위를 설치하기 위해 관리와 군사를 압록강 이남으로 보냈다는 보고를 올리고, 명에서도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왔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8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우왕이 직접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또한 세자와 여러 비(妃)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문하찬성사 우현보(禹玄寶)에게 명하여 개경을 지키게 하였다.

4월 1일에 우왕은 봉주(鳳州, 현재의 봉산)에 이르러 12일에 최영을 전군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보 등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우군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鄭地), 상원수 지용기(池湧奇), 부원수 황보림(皇甫林),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지란(李之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 등을 소속시켰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우군이 총 38,830명, 겸군(傔軍) 11,634명, 말 21,682필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했다. 4월 18일에는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평양을 출발하였으며, 5월 7일에는 고려와 명의 국경인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5월 11일에는 이성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원수 이의가 앞장서서 요동을 공격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요동정벌 계획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려는 밖으로는 오랜 기간에 걸친 원의 수탈, 안으로는 권세가들의 토지겸병 등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피폐해져 있었다. 게다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우왕의 사치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정벌군이 출발한 음력 4~5월은 한창 농사철이자 장마철이었고, 많은 군대가 북쪽으로 출진하면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실제로 원정군이 북쪽으로 출발한 틈에 왜구가 서해도, 전라도와 양광도에 출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병사를 징집하자 8도가 시끄러워졌으며, 농사를 못 짓게 된 백성들이 이인임 정권 때보다도 심하다며 크게 원망하였다.

전쟁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아, 우왕과 최영은 반대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전쟁을 반대하던 공산부원군 이자송(李子松)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요동정벌을 가장 강경하게 반대한 것은 우군도통사 이성계였다. 그러나 그의 사불가론(四不可論)이 당시의 상황을 근거로 원정이 어려움을 주장했음에도, 우왕과 최영은 원정을 강행하였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웠는데, 그 내용은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반대가 우왕과 최영에 의해 거부되자,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우왕은 이 역시 듣지 않았다.

위화도의 고려군 내부에서는 탈영하는 병사들이 끊이지 않았고, 아무리 처벌을 해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며, 장맛비에 병장기가 손상되고 군사들이 지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철수시켜주기를 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5월 22일,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회군을 허가해주기를 요청했지만,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 와중에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휘하의 직속부대만을 거느리고 고향인 동북면을 향하여 가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이를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회군할 것을 결정하였고, 마침내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되돌아왔다. 이것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다. 사료에 따르면 군대가 압록강을 다시 건너오자 장마로 인해 불어난 강물에 섬이 잠겨버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군대를 거느리고 최영의 군대를 물리친 뒤 요동정벌을 주장한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제거하였으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4 결과와 영향

요동정벌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역사적으로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외적으로는 명이 고려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철령 이북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였으며, 이후 다시는 이 지역에 대해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 대내적으로는 우왕과 당시의 실권자 최영이 제거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우왕대의 요동정벌은 당시의 국력 및 국제정세를 감안했을 때 매우 위험한 정치적, 군사적 시도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마지막 북벌정책이자 외세의 영토침탈에 대한 저항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다.

한편, 이때의 요동정벌에 대한 기억은 조선 초 정도전이 주도한 또 한 차례의 요동정벌 시도로 이어졌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끄럽지 않아서 명 태조 홍무제는 조선에서 명에 첩자를 보내고 여진족을 유인하는 등 말썽을 일으키고 있으며, 명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조선이 명에 보낸 외교문서가 불손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압박하였다. 아울러 외교문서를 잘못 지은 책임자인 정도전을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정도전과 남은 등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요동정벌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로서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정도전과 함께 재상이었던 조준(趙浚)이 이를 크게 우려하여 태조에게 간언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명에서도 조선의 요동정벌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조선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였으며, 조선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조선에서는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요동정벌 계획을 추진하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살해되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명에서는 조선을 의심하던 명 태조 홍무제가 사망하고 건문제가 즉위하면서 해소되었다. 이에 요동정벌 시도는 또다시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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