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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乙卯倭變]

후기왜구, 평화롭던 조선을 침공하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대표 이미지

『왜구도권(倭寇図巻)』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왜구도권 디지털 아카이브(hi.u-tokyo.ac.jp/collection/digitalgallery/wakozukan/)

1 개요

1555년(명종 10) 음력 5월 11일, 일본의 고토(五島) 등지에 근거를 두었던 중국인 및 일본인들로 구성된 왜구의 선박 70여 척이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達梁浦) 근해에 정박했다. 왜구는 달량포와 이진포로 상륙한 뒤 달량성을 포위·공격해 13일에 이를 함락시키는 등 전라도 영암·강진·장흥·고흥 일대를 약탈했다. 초기에 고전했던 조선군이 점차 반격에 나서고 의병들의 활약으로 타격을 입은 왜구는 5월말 배를 타고 물러났다. 1555년은 을묘년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을묘왜변(乙卯倭變)’ 혹은 사건의 중심지명을 따서 ‘달량왜변(達梁倭變)’이라고도 부른다. 그 후 음력 6월 27일에는 왜구가 제주성을 공격했는데 조선군이 이를 격퇴했다.

2 16세기 동아시아의 후기왜구

명(明)은 건국 초부터 조공(朝貢)을 기본으로 한 공적무역 이외의 사무역(私貿易)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특히 바다에 대해서는 민간인이 바다에 나가서 사사로이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시행했다. 그렇지만 명의 통치체제가 문란해지면서 통제력이 약화되자 15세기 말부터 중국의 동남연해 지역인 저장(浙江)·푸젠(福建) 지역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무역, 즉 명의 법규를 어긴 밀무역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남아시아와 일본 등지로 나간 밀무역자들은 큰 이익을 거두었는데 그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지역의 유력자들이 그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들을 단속해야할 지역의 관리나 군인들도 밀무역자들과 협력적인 관계에 있었다. 지방관헌의 묵인 하에서 밀무역자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져서, 조공무역을 관할하는 시박사(市舶使)가 있던 닝보(寧波) 인근에 거점을 두고 대대적인 밀무역을 펼쳤다. 특히 때마침 동남아시아에 나타났던 포르투갈인을 중국으로 끌어들이고 나중에는 일본에까지 이르게 한 것도 중국의 밀무역자들이었다.

반면, 1523년 닝보에서는 일본의 두 영주가 동시에 파견했던 조공사절단 사이의 마찰이 폭력사건으로 번져 명의 관리가 살해당하는 등 일련의 소동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닝보의 난’이라고 하는데 명은 이를 빌미로 1529년 시박사를 폐지하고 일본과의 조공무역을 중단했다. 닝보의 난 이후 닝보 인근에 거점을 두었던 중국의 밀무역자들과 일본상인들의 밀무역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1530년대 초 일본에서 은(銀)이 대량으로 채굴되었는데, 은이 경제의 중심이 되어가던 명에서는 은의 가치가 매우 높았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비단과 같은 중국의 상품이 고가로 거래되었기 때문에 그 이익을 좇아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런데 1548년 해금정책에 강경했던 절강순무 주환(朱紈)이 밀무역자들의 거점이었던 쌍서(雙嶼)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밀무역자들의 주요 우두머리들을 체포·처형하면서부터 상황이 돌변했다. 쌍서 괴멸 후 잔당을 규합해 밀무역자들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것이 후에 왜구왕(倭寇王)으로 불리게 된 왕직(王直 혹은 汪直, ?~1559)이다. 왕직은 이전부터 일본과의 무역에도 깊이 관여했었는데 쌍서 괴멸 후에는 일본의 고토(五島)에 근거지를 두고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명으로의 밀무역 활동을 계속했다.

왕직은 밀무역활동을 펼치는 한편 사무역을 허가하겠다는 명의 관리에게 협력해 다른 밀무역자들을 공격·체포하기도 했다. 이런 활약상으로 1551년에는 닝보 인근에 다시 밀무역의 거점을 마련하는 등 왕직은 밀무역 세계의 제1인자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지역주민이나 지방관들조차도 왕직에게 신뢰와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왕직의 명성이 높아진 것이 반드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밀무역자들의 활동과 더불어 약탈사건이 터지곤 했는데 이런 행위에 왕직의 이름이 나돌게 되었다.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구성된 해적의 약탈은 명의 관리들에게는 왜구(倭寇)로 인식되었고 일본 및 일본인들과 관련이 깊었던 왕직이 왜구사건에 관련되어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커졌다. 특히 왕직의 부하로 알려진 소현(蕭顯)이 1553년 강남지역을 돌아다니며 약탈행위를 일삼자 이런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이에 명의 군대는 다시 왕직의 밀무역거점을 공격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왕직은 이 공격에서 간신히 탈출해 일본으로 가서 히라도(平戶)에 은거하고 이후에는 부하들만 파견해 밀무역과 약탈활동을 펼쳤다. 그 이후 중국대륙에서는 왜구의 활동이 더욱 맹렬해지고 그 피해도 매우 커졌다.

이 시기의 왜구는 14·15세기 때와는 다른 점이 많은데, 가장 큰 차이점은 왜구집단을 이루었던 구성원들에 있었다. 왜구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일본인-왜(倭)가 아닌 중국인이 더 많거나, 때로는 중국인만으로 구성된 왜구도 있었고 왕직처럼 왜구의 우두머리에도 중국 출신의 사람이 많았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는 왜구라고는 해도 그 무리에 “진짜 왜[眞倭]는 2~3할, 가짜 혹은 위장한 왜[假倭·僞倭·從倭 등]가 대부분”이라고 자주 언급되었다. 구성원 외에도 왜구의 성격이나 활동 목적 등에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14·15세기의 왜구를 ‘전기왜구(前期倭寇)’, 16세기의 왜구를 ‘후기왜구(後期倭寇)’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후기왜구의 활동이 극성을 이루었던 때의 연호에서 이름을 따와 ‘가정왜구(嘉靖倭寇)’라고 부른다.

중국대륙과 일본열도를 오가던 왜구-약탈을 목적으로 했던 해적이나 밀무역자-들은 자연스레 조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16세기 중엽부터 ‘황당선(荒唐船)’이라고 불린 선박이 조선의 연안에 나타나 종종 문제가 되었는데, 조선에서 그렇게 부른 이유는 왜선(倭船)인지 당선(唐船, 중국의 배)인지 정체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선박 자체의 형체가 구분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선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신원 때문이었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섞여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중국인이면서도 일본인의 복장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 그 외 어느 지역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그 중에는 당시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포르투갈인이나 포르투갈의 선박이 있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황당선은 항해 중 식수·식량을 구하기 위해 혹은 표류와 같은 이유 등으로 조선의 도서·연해지역에 상륙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역주민이나 조선군과 교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황당선 중에는 화포를 갖추었던 경우가 있어서 간혹 조선군이 애를 먹기도 했다. 그들 스스로는 무역선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명에서 벌어지던 일을 잘 알고 있던 조선에서는 단순히 무역선으로 취급하고 대응할 수는 없었다. 상선도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무장을 하기도 했지만 중국대륙에서 약탈한 물건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해적선일 수도 있었다. 무역선으로서 화물을 싣고 가던 황당선이나 왜선 등을 조선의 지방관들이 왜구로 판단하고 단속·처벌한 데는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3 을묘왜변 직전의 상황

조선에게 왜구는 건국 초부터 큰 골칫거리였지만 16세기에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은 ‘왜구’와는 성격이 다른 사건이었고,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이 을묘왜변 이전의 가장 큰 왜구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왜구들의 규모(왜인 200여 명)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피해도 적은 편이었다. 그런데, 「사량진왜변」 이후 조선을 왕래하던 왜인들에 대한 조선의 통제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조선의 법령을 어기는 사람들을 일괄해 적왜(賊倭)로 취급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는데, 이 점은 반대로 왜구 발생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었다. 조선의 연안을 지나던 황당선·왜선들을 왜구로 취급해 처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명종실록』에는 30여 회의 ‘왜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상당수가 약탈활동과는 무관했다.

변방에서 작은 사건들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큰 문제가 없었던 조선은 태평한 시대가 계속되었다. 병사들이 나태해지고 군무에 태만해질 수밖에 없었고 병장기의 배치와 준비도 소홀해졌다. 거기에 1550년대에는 천재지변과 기근이 겹쳐 지역의 군졸에게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1552년(명종 7) 제주에서 천미포(川尾浦) 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군의 충분치 못한 대응이나 지역군 책임자들의 나태한 태도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국방상의 이런 문제점을 조선 조정에서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책은 미봉책에 그쳤다.

한편, 전기왜구의 최대 소굴이었던 쓰시마(對馬島)는 후기왜구의 시대가 되면서부터 왜구의 활동과는 거의 무관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조선과의 밀접한 관계 유지가 생존에 가장 중요했던 쓰시마는 조선에 왜구와 관련된 정보를 수시로 제공하며 왜구가 조선을 침공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을묘왜변이 발생하기 두 달 전에도 쓰시마는 “서융(西戎)”이 그 전해(1554년) 10월부터 명을 침략하기 위해 수만 척의 배가 바다를 건너갔고 계속해서 명을 침략할 때 조선의 바다를 지날 수 있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서융”은 쓰시마의 기준에서 서쪽 지역으로, 왕직 집단이 은거했던 고토나 히라도가 위치한 마쓰우라(松浦) 지역 등을 가리킨다. 실제로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는 이들 지역을 근거지로 했던 후기왜구가 극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왕직의 부하였던 서해(徐海) 등이 독립해 별도의 왜구집단을 이끌고 중국에 건너가 각지를 약탈했는데, 이들 무리는 현지인이 다수 참여해 수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중국에서의 후기왜구활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쓰시마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을묘왜변의 전개

1555년(명종 10) 음력 5월 11일, 70여 척의 왜선이 전라도 영암의 달량포(達梁浦, 현재의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앞 해상에 정박했다가 동서로 나뉘어 달량포와 이진포에 상륙해 성 밖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공격해왔다. 이에 가리포(加里浦) 첨사 이세린(李世麟)은 즉시 전라도병마절도사 원적(元績)에게 알렸고, 원적은 장흥부사 한온(韓蘊),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등과 함께 병사 200명을 이끌고 달량포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오히려 달량성에서 왜구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3일간의 포위되었던 달량성안의 식량이 다 떨어지자 원적은 왜구들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결국 성은 함락되어 원적·한온은 그 와중에 살해당하고 이덕견은 포로가 되었다. 한편 달량성이 포위당한 것을 듣고 해남현감 변협(邊協)이 전 무장현감 이남(李楠)과 함께 왜구를 공격했으나 패배해 이남은 죽고 변협은 간신히 도망쳤다. 또한 우도수사(右道水使) 김빈(金贇)과 진도군수 최인(崔潾)도 구원군을 이끌고 어란포(於蘭浦)에서 달량으로 와 왜구를 공격하다가 패배했는데, 그 날 달량성이 함락되었다. 달량이 함락된 뒤 왜구들은 바다로부터 먼저 어란포·진도 등으로 가서 방어소를 불태우고 장흥·강진 등 주변 지역을 침범해 약탈했다. 정예군이 패배하고 각 지역을 수비하던 장수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거나 미온적인 대응 을 하는 동안 왜구들은 음력 5월 하순까지 별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각지를 유린했다. 장흥부는 성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즉각 함락 당하기도 했는데,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왜구의 약탈에 주민들은 마을을 버리고 피난했다. 각 마을에 들어온 왜구가 겨우 3~4명에 불과할 때도 있었지만 여기에 대응할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연해의 진(鎭)과 마을이 모두 텅 비었다고 한다. 그나마 영암성을 지켜낸 의병장 양달사(梁達泗)의 활약 이 위안거리였다.

이런 급박한 사태에 조선 조정은 곧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고 금군(禁軍) 등 정예 부대를 동원해 왜구를 토벌하도록 했다. 전부주윤 이윤경(李潤慶) 등은 이들과 함께 음력 5월 25일 영암에서 왜구 100여 명을 죽이는 등 승리를 거두었는데, 왜구들은 그 뒤 배를 타고 바다로 퇴각했다. 바다로 나간 왜구가 그대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27일에는 가리포에 침입해 28일에는 가리포와 회령포를 함락시키고 녹도(鹿島)를 포위했다. 녹도의 포위를 푼 뒤에는 금당도(金堂島)로 물러났는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자 마침내 패주했다.

5 을묘왜변을 일으킨 ‘후기왜구’

을묘왜변을 일으켰던 왜구는 과거의 왜구와는 많이 달랐다. 포로로 잡혔던 이덕견은 왜구의 요구사항 등이 적혀있는 편지를 건네받고 풀려났는데, 그 편지에서는 일본인이 사용하지 않는 ‘가정(嘉靖) 34년’이라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문장에도 중국식의 표현이나 단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들 중에 중국 사람이 있거나 중국에 익숙히 다니는 자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이번 왜구들은 중국에서 도적질하여 이득을 취한 다음 침범해온 것으로 파악했다. 왜인이 이덕견에게 “요사이 3~4년 동안 우리나라의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여서 원수가 되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황당선 및 왜선을 처벌했던 일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다음해인 1556년(명종 11) 쓰시마에서 파견한 사람으로부터 을묘왜변을 일으킨 것은 “사주(四州)와 오행산(五幸山)의 왜인”이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이와 함께 적왜(賊倭)를 거느리고 중국으로 노략질하려는 중국인 “오봉(五峯, 왕직의 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그는 히라도에서 오봉을 직접 보았으며, 오봉이 처음에는 교역 때문에 일본에 왔다가 적왜(賊倭)와 결탁해 중국을 왕래하며 노략질을 한다는 사실이나 당시 왕직의 회유를 위해 총독 호종헌(胡宗憲)이 일본에 파견한 장주(蔣洲) 일행에 대한 소식 등 상당히 구체적인 왜구 정보를 전했다. 오행산은 고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말하는 히라도의 왕직에 대한 묘사는 다른 기록들과도 매우 유사해 이 정보는 사실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몇 년 뒤 왕직은 명 조정에 올린 일종의 탄원서에서 자신은 약탈행위를 한 적이 없고 중국이나 고려(조선)·류큐 등지에서 약탈행위를 한 것은 사쓰마(薩摩)를 본거로 하는 별개의 왜구였다고 항변했다. 왕직을 사칭한 행위가 그 이전에도 있었고 당시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왜구집단에는 왕직과 무관하거나 적대적인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고토를 다른 왜구 집단이 공격하기도 했다. 을묘왜변의 직후인 음력 6월 초 쓰시마에서는 “적선 1천여 척이 오도(吾島) 등의 섬에서 도적질을 한 다음에 90여 척이 세 무리로 나누어 떠났”는데 조선으로 향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고 음력 6월말에는 왜구가 제주도를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왜구를 금당도에서 도망쳤던 왜구와 같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정황을 생각하면 5월의 왜구와는 다른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누가 을묘왜변의 실행자인가에 대해서는 음력 12월 가미마쓰우라(上松浦) 가라쓰(唐津) 태수가 보내온 서계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는 을묘왜변시 고토에서 조선을 침략한 왜구의 선박이 출발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사주(四州)의 적 70여 척”에 의한 것으로 고토 자체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를 비롯해 서계에 등장하는 고토 태수(五島太守)나 그들의 상관인 ‘왕[我王]’은 오히려 돌아온 왜구의 선박을 단속하고 왜구를 처벌했다면서 그 증빙으로 달량성에서 전라도병마절도사 원적이 전사했을 때 잃어버린 병부(兵符)를 보내왔다.

왕직이나 고토의 실권자(五島太守)는 자신들이 관여했다는 것을 부정했지만 이런 말을 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 을묘왜변을 전후해 왕직 및 고토에 근거를 두었던 왜구집단의 활동이나 관련된 진술들을 종합해보면 왕직의 지도하에 있던 왜구집단이 중심이 되어 을묘왜변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왕직 집단이 근거를 두었던 고토의 지배자 우쿠(宇久)씨는 왕직 일행을 환영해 통상을 허가하고 거주지를 마련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히라도의 지배자였던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1529~1599)와 왕직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카노부가 중국 상인 및 그들과 관계있던 포르투갈인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히라도를 국제무역항으로 번성케 했던 것을 보면 왕직이 히라도로 옮겨간 것도 다카노부가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각 지역의 영주들은 생존경쟁 속에서 부국강병에 힘을 쏟았다. 특히 규슈의 영주들은 ‘부국’의 방안으로 외국과의 무역을 중시했다. 명과 정식 무역이 불가능했던 일본인들에게 왕직 등 중국의 밀무역자, 혹은 왜구는 중국의 물건을 일본으로 공급하는 중요한 무역가들이었다.

그렇지만 조선과의 관계는 달랐다. 조선은 건국 이래 왜구를 근절시키려는 목적으로 일본 각지의 유력자들에게 비록 제한을 두기는 했지만 조선과의 통상을 허가해왔다. 쓰시마에서 조선에게 왜구 관련 정보를 줄기차게 전하며 자신들이 조선의 안녕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나 ‘가미마쓰우라 가라쓰 태수’·‘고토 태수’가 왜구와의 관계를 부정했던 것도 조선과의 공적인 무역관계를 원했기 때문이다. 을묘왜변 이후에도 중국대륙에서는 후기왜구의 활동이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조선에서는 그 이후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활동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6 을묘왜변 이후의 조선

을묘왜변이 조선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무엇보다 해이해져있던 관리들의 실태와 약화된 국방력이 여실히 들어났다. 사건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에의 처벌 및 재발 방지를 위한 방안들이 모색되었다. 중요도가 높아진 비변사는 독립된 청사를 마련하고 정식 관청이 되었다. 또한 해상을 왕래하던 왜선이나 황당선에 대해서는 강력한 단속이 이루어졌다.

쓰시마에서 전해오는 왜구의 침공 위협에 대한 소식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쓰시마는 을묘왜변 이후에도 왜구가 조선을 침범할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알려왔는데, 조선 조정은 쓰시마의 정보가 전해지면 이전과 달리 경계를 강화했다. 또한 쓰시마에서는 조선으로의 왜구 방지에 자신들이 기여하고 있음을 여러 수단으로 알려왔다. 을묘왜변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왜구의 목을 베어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런 공적을 내세우며 쓰시마에서 조선에 줄기차게 요청했던 것은 무역의 확대였다. 조선 조정도 쓰시마의 노력과 일본과의 통교 과정에서 쓰시마의 역할을 인정해 1557년(명종 12) 쓰시마에게 세견선(歲遣船) 5척을 늘여주었다[정사약조].

을묘왜변이 발생했을 때 사신(史臣)은 “국가가 태평한 세월이 오래이므로 임시 조치만 하는 행정이 많아 기강(紀綱)이 문란해지고 공도(公道)가 없어졌다. 백사(百司)와 군읍(郡邑)의 관원들은 쓸데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서, 오직 권세 있는 요로(要路)에 아부하여 좋은 벼슬에 올라가고, 뇌물로 아름다운 명예를 차지하는 짓을 하여 자기 한 몸을 위한 일만 할 뿐 국가의 일에 대해서는 소 닭 보듯이 하였다. 장수나 재상들은 직무에는 태만하고 항시 은혜는 갚고 원한은 보복하는 짓만 하다가 변방에 한번이라도 풍진(風塵)이 일어나면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내부에는 예비하여 방어해 갈 계책이 없고 외부에는 공격하여 싸울만한 준비가 없으므로, 도적의 칼날이 향하는 곳마다 꺾이지 않는 데가 없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하였으니 통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있겠는가?”라며 한탄했다. 그러나 을묘왜변의 충격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을묘왜변 이후 왜구가 다시 조선에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묘왜변 이전처럼 간혹 작은 사건들이 있었을 뿐 조선의 연안은 다시 평안을 되찾았다. 평화가 지속되자 “기율이 해이해지고 기계는 예리하지 못하며, 군졸은 훈련되지 않았고 장수는 마땅한 재목이 아니어서 변란이 눈앞에 닥쳐와도 손발을 쓸 수 없는” 을묘왜변에 대해 사신이 한탄했던 것과 같은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그런 상황에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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