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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사림(士林), 대소윤(大小尹)의 권력 투쟁에 희생당하다

1545년(인종 1)

1 대윤과 소윤의 대립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혁신정책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실패한 이후, 타격을 받은 사림들은 한동안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하고 은거하였다. 이 기간 중앙 정계에서는 권신, 외척 간에 정권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심정(沈貞)·김안로(金安老) 등으로 이어진 권신의 등장으로 정국은 항상 불안하였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정왕후를 폐위하고자 한 음모가 발각되면서 사사 당하였고, 김안로에 의해 파직·유배되었던 윤원형(尹元衡)과 그 형 윤원로(尹元老)가 다시 권력을 얻게 되면서 외척 간의 쟁투가 시작되었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는 아버지가 연산군(燕山君)의 처남 신수근(愼守勤)이라는 이유로 즉위 직후 폐위되어 그 후사가 없었으며,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는 1515년(중종 10)에 세자를 낳고 바로 사망하였고, 1517년(중종 12)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가 후일 명종[조선](明宗)으로 즉위한 경원대군을 낳았다. 이때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윤원형이 세자를 바꿀 것을 획책하여, 윤원형 일파와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尹任) 일파 사이에 알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두 세력의 대립은 중종이 사망하기 전부터 이미 거론되고 있었는데, 윤임의 당을 ‘대윤(大尹)’, 윤원형의 당을 ‘소윤(小尹)’이라 하였다. 이 대립이 명종 때에 이르러 네 번째 사화인 을사사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2 사림의 정계 복귀와 인종의 즉위

당시 사림들은 기묘사화의 충격이 너무 컸고 그 뒤의 정국 불안이 지속된 까닭으로 중앙 진출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김안로가 실각한 1538년(중종 33)에 기묘사화와 관련된 이들이 다시 등용되기 시작하면서 정국에 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1540년(중종 35)에 김안국(金安國)이 대제학이 되었고, 한때 유배되었던 이언적(李彦迪)도 중앙에 진출하였으며, 이황(李滉)도 관료 사회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등 이전의 신진 사류를 형성하였던 성리학적 소양을 가진 인물들이 정계에 서서히 등장하였다. 이로부터 한동안의 권력쟁탈전은 사림과 훈구 대신의 충돌이 아니라 외척을 중심으로 한 궁중 내부의 갈등에 사림이 편승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중종[조선](中宗)이 재위 39년만인 1544년(중종 39) 11월에 승하하고 인종[조선](仁宗)이 2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척인 윤임 일파, 즉 대윤이 득세하였다. 인종은 즉위 초에 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여 대신으로 삼았고, 사림은 다시 정권에 참여할 기회를 만났다. 반면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일부에서는 윤원형 세력에 의지하였다. 그런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중종의 둘째 아들인 경원대군, 곧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형세는 역전되었다. 곧 윤원형의 소윤 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3 을사사화의 발생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인 1545년 정권을 장악한 윤원형·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 소윤 세력이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 대윤 일파에서 역모를 꾀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일어난 정쟁이었다.

그 시작은 즉위 직후인 7월 7일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이 대윤과 소윤의 분열에 책임이 있는 윤원로를 유배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였다.

대왕대비는 말이 나온 근원을 밝힌 후에 윤원로를 벌줄 수 있다는 비답을 내렸고, 이에 대해 대신들은 계속해서 윤원로의 처벌을 요구했다. 홍문관 부제학 나숙(羅淑), 대사헌 민제인(閔齊仁), 대사간 구수담(具壽聃), 도승지 송인수(宋麟壽), 영중추부사 홍언필(洪彦弼) 등이 중심이 되어 10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계속되는 상소로 대왕대비는 윤원로의 귀양을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이는 조정의 공통된 의견에 강제로 이끌려 결정한 것이지, 그 논의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교지를 내렸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대신들은 더 강경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끝내 대왕대비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고 결국 윤원로는 10일 해남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소윤 일파에 대한 대윤 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에서 소윤에 대한 비판은 앞으로 더 큰 화를 불러들이는 발단이 될 수 있었다.

을사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8월 22일에 발생했다.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윤원형이 이기·정순붕·허자(許滋)·임백령을 시켜 윤임·유관·유인숙이 중종대부터 잘못이 많으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언필·윤인경·허자 등도 윤임을 외방에 유배하고, 유인숙을 파직시키고, 유관은 체직 정도로 처리할 것을 건의하여 문정왕후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양사의 관원들은 윤임 일파의 탄핵이 문정왕후가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서 이루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윤원형의 행위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언적·나숙·김진종(金振宗)·곽순(郭珣)·이추(李樞)·이수경(李首慶)·박승임(朴承任)·임보신(任輔臣) 등에 의해 비판이 계속되었고, 이는 8월 23일 백인걸(白仁傑)이 윤원형을 심문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급박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대왕대비는 백인걸을 처벌할 것을 명했다. 이와 같은 상소가 올라온 원인을 윤임·유인숙·유관에 대한 처벌이 약해서라고 판단하고, 이들을 더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처벌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 며칠 동안은 3인의 죄가 비교적 가벼운 정도로 끝났으며, 3인 이외로그 이상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8월 28일에는 윤임이 명종 즉위에 대한 불만으로 다른 생각을 품었다는 역모의 죄명이 추가되면서 3인을 사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9월 1일 김명윤이, 윤임의 조카 계림군 이류(李瑠)와 봉성군 이완(李岏)이 역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고변하면서 옥사의 범위를 확대해나갔다.

이 심문으로 인해 9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투옥되고 문초를 당하였다. 이때 사림들의 이름이 나오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번져나가며 수 십 명의 피해자가 속출하였다. 계림군 이류·이휘(李煇)·이덕응(李德應)·나숙·나식(羅湜)·박광우(朴光佑)·정희등(鄭希登)·정욱(鄭郁)·정자(鄭滋)·곽순·이중열(李中悅)·이문건(李文楗) 등 많은 사람들이 사형 또는 유배, 파직에 처해졌다.

4 양재역벽서사건의 발생

1547년(명종 10)에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벌어졌다.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벽보가 발견되었는데, 위로는 여주(女主) 즉 문정왕후가 있고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누가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벽보는 곧 국왕에게 올라갔고, 소윤은 이를 빌미로 2년 전 을사사화에 대한 조치가 미흡했다면서, 정치적으로 의심되거나 자신들에게 반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봉성군 이완, 송인수, 이약빙(李若氷)이 사사되었고, 이언적, 권벌(權撥),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백인걸 등 20여 명이 이때 유배를 당했다. 이 사건에는 을사사화 때보다 사림계 인물들이 더 많이 연루되었다.

1553년(명종 8) 명종이 친정을 시작했지만, 문정왕후의 절대 권력이 계속 이어지면서 윤원형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훈척세력은 왕권과 정국 안정에 기여한 공로를 내세워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소윤세력이 몰락하고 사림들이 정계에 차츰 복귀하면서 비로소 중앙 정계의 주도권을 사림이 장악하는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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