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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인조반정의 후유증

1624년(인조 2) ~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대표 이미지

쌍수정사적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이었던 평안병사 이괄(李适, 1587~1624)이 일으킨 반란으로, 1624년(인조 2) 1월 22일 이괄이 거병하면서 시작되었고 2월 15일 이괄이 살해되면서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반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와 조정 대신들이 공주(公州)로 피란을 갔을 정도로, 이괄의 난은 인조대 초반 정권의 일대 위기였다.

2 이괄,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

(1) 반정공신 이괄

반란을 일으켜 인조반정 초기,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했던 인조 정권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고 간 이괄(李适)은 정작 그 자신이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반정 공신이었다. 1587년(선조 20)생인 이괄은 선조 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지냈다. 그가 인조반정에 가담하게 된 것은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을 무렵,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반정 과정에서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휘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큰 공을 세웠는데, 거병하였을 때 장졸들이 동요하자 ‘이귀(李貴)가 병사(兵使)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무인 이괄의 역량은 반정 성공에 확실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정 후에는 한성부판윤, 포도대장을 거친 뒤 평안병사겸부원수에 임명되었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바로 평안병사로 있을 때였다.

(2) 이괄은 푸대접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나?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과 인사조치에 대한 불만이다. 하지만 이는, 1등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봉된 것과 변방의 직책인 평안병사에 임명된 것, 그리고 김류와의 갈등으로 인해 ‘이괄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속으로 딴 마음을 품었다’든지 ‘앙앙거리며 분노를 품고 갑자년의 변을 일으켰다’는 등 사료상의 기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해석한 것에 기인한다.

이괄을 평안병사에 임명한 인사조치는 인조반정 직후 시점의 북방정세 등 대내외적 배경을 고려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는, 1619년(광해군 11) 사르후전투 이후 후금이 요동의 판도를 장악함으로써 북방의 정세는 한층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1623년(인조 원년)의 인조반정은 단순히 조선 내부의 정권 교체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다. 명과 후금 심지어 일본까지 조선에 수립된 신정권의 동향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반정 세력은 광해군대의 이른바 ‘중립외교’를 비판하면서 반정의 명분으로 ‘친명배금’을 내걸었기 때문에, 후금과 대치하고 있는 북방의 긴장감은 한층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변의 방어는 국가적인 중대사이자 최우선 과제였다.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않게 부원수직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초 이괄과 함께 부원수직의 물망에 오른 것은 1등 공신 이서(李曙)였다. 이괄의 평안병사겸부원수 임명은 최전방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할 수 있는 통솔력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 절실한 때에 신중하게 이루어진 인사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괄 역시 자신의 임무가 막중함을 알고 있었던 만큼 평안도 영변에 출진한 뒤에 군사조련, 성책(城柵) 보수, 경계태세 강화 등 부원수로서 직책에 충실하였다.

(3) 반란을 일으킨 진짜 이유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과정을 보면, 사실상 중앙 조정에서 이괄을 반란으로 내몰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 시발은 1624년(인조 2) 1월 문회(文晦)·이우(李佑)·권진(權聄) 등이 이괄의 역모를 상변하면서부터이다. 그 내용은 이괄이 아들 이전(李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즙(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반란을 꾀하고 있으며 문신과 무신을 통틀어 수십인이 동조·내응 세력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지면서 인조는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이귀를 비롯한 조정 신료들은 이괄을 압송·국문하여 진상을 밝히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는 이괄에 대해서는 “이괄은 충의스런 신하인데, 어찌 두 마음을 품었을 리가 있겠는가. …… 부원수의 직임은 이괄이 아니면 맡을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처벌 주장을 묵살하였지만, 영변 군중에 체류하고 있던 이괄의 아들 이전을 모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려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금부도사 일행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당초 이괄이 반란을 계획한 정황은 찾기 힘들고 오히려 근거가 불충분한 고변, 그와 관련된 중앙 조정의 의심과 미숙한 대응이 초래한 우발적인 반란이었다고 하겠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 중에는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경계로 인하여 모반 혐의로 잡히는 이들이 많았었고, 공신 집단 내부에서도 상호 견제가 심했는데, 이괄에 대한 고변 역시 그러한 정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반란의 전개와 인조 정권의 위기

이괄은 부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과 함께 인근 병영의 군사 1만과 항왜(降倭) 130여 명의 진용으로 1624년(인조 2) 1월 22일 영변에서 출병하였다. 도중에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탈취하여 반란에 가담시켰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한 인물로, 반란에 가담한 이후 이괄과 함께 반란군을 지휘하게 된다. 반란군의 1차 저지선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성이었는데, 장만의 군사는 수천에 불과하여 이괄의 정예병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괄 역시 평양을 피하여 샛길로 서울로 직행하였다. 이괄의 군대가 관군과 처음 교전한 곳은 황해도 황주 신교(薪橋)였는데, 그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인 박영서(朴永緖) 등을 사로잡아 죽이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후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연합하여 황해도 평산군 마탄(馬灘, 예성강 상류)에서 반란군에 맞섰으나, 이괄의 군대는 또다시 관군을 대파하였다. 뿐만 아니라 반란군은 개성을 지나 임진(臨津)을 수비하고 있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방어선을 붕괴시켜버렸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이괄 군대의 빠른 진격 속도로 인해 관군측에서는 그 소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뛰어난 무장인 이괄의 작전구사와 군 통솔 능력에 압도당하였다.

한편, 서울 외관 방어선이 붕괴되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공주로 피란을 갔다.

그리고 2월 11일에는 이괄의 군대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의 옛터에 주둔하였는데, 이처럼 지방의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한국사에서 처음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들로 하여금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함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최소화하였다. 또 새로운 행정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다.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안현(鞍峴, 무악재)에 진을 쳤다. 이튿날 이 사실을 안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포위·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이로써 반란군이 연전연승하면서 기세를 올려 서울까지 점령했던 그간의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었다.

이괄과 한명련 등은 수백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지금의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로 달아났고, 관군의 추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광주에서 이천으로 이동하면서 경안역(慶安驛) 근처에서 유숙하던 이괄과 한명련은 배반한 부하들에 의해 목이 잘렸고, 20여 일에 걸쳐 전개된 이괄의 난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괄과 한명련의 수급이 인조가 피란 가 있던 공주의 행재소에 전해지고 인조는 2월 22일에 환도하였다.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국왕과 신료들이 공주로 피란을 간 전무후무한 사태가 말해주듯 이괄의 난은 반정으로 수립된 인조 정권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인조와 당국자들은 위기 상황을 인적 통제와 민심 수습, 원병 요청 논의 등으로 타개해 나갔는데,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느꼈던 위기감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후, 조정에서는 반란에 가담한 인물들의 일족과 주변 인물들을 통제하고 체포·처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반란 초기에 체포령을 내려 이괄의 일족을 구금해놓고 있다가 황주 신교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하자 이괄의 아내와 동생 이돈(李遯)을 능지처참한 사실 등이 그 사례이다.

반란 가담자 일족에 대한 처벌 외에 주목되는 것은 이괄에 대한 고변 당시 용의선상에 올랐던 정치인·관료들에 대한 탄압이다. 이괄의 난 직후 그들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있었는데, 기자헌을 비롯하여 성철(成哲)·성효량(成孝良) 등 무려 37인이 사약을 받거나 참수되었다.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고변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이괄이 사실상 무혐의로 밝혀졌고, 용의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행된 이 조치는 정권 담당자들의 위기의식과 조급함, 나아가서는 인조 정권의 불안정성을 드러낸 것으로, 민심의 동요를 초래하였다.

폐주 광해군에 대한 이배 역시 인조 정권의 위기감이 드러나는 인적 통제의 한 대목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폐위된 이후 강화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을 수로를 통해 발빠르게 태안으로 이배시켰다. 이는 이괄의 군대에 의해 광해군의 신병이 확보되어 광해군이 반란의 구심점이 될 경우, 그야말로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취해진 조치로 보인다.

한편, 이괄의 난 당시 정권 담당자들의 위기의식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원병 요청 논의’이다. 내란 진압을 위해 외국에 군대를 요청하는 일인 만큼 위기의식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원병’을 요청할 대상은 가도에 웅거하고 있던 모문룡의 군영와 왜관(倭館)측이었고, 논의가 제기된 시점은 피란을 떠나던 무렵이었다. 모문룡측에 대한 원병 요청은 출병 지연과 후폐를 염려한 접반사(接伴使) 윤의립(尹毅立)의 판단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하였다.

또 왜관 측에 대한 원병 논의는 조정의 요청이 왜관측에 전달되지도 않은 채 ‘논의’에만 그쳤다. 그러나 왜관 측에 대한 원병 요청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624년(인조 2) 1월 이괄의 난이 발발한 이후 아직 관군과 반란군이 이렇다 할 충돌이 없었던 때, 좌찬성 이귀는 왜정(倭情)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양남(兩南) 군사들을 지원군으로 상경시키는 것을 보류하기를 건의하였고 인조는 남변(南邊) 방비의 중요성을 들어 도로 내려가라는 명을 내렸다.

즉, 반란 초기라고는 하지만, 일본 측의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 내란 진압을 위한 병력 이동도 자제하는 모습에서 왜인들에 대한 경계심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서울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피란을 가야 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이정구(李廷龜)와 오윤겸(吳允謙)이 왜관 측에 원병을 청하자는 의견을 내놓기에 이른다. 반란군이 항왜를 선봉으로 삼아 돌진하여 승세를 타고 있고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로는 막지 못하는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해답으로 1천에 가까운 왜관 체류 왜인들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다. 더욱이 이정구와 오윤겸은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면, 틀림없이 와서 반란군을 격퇴할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반란 발발 초기에 왜정에 대한 우려로 양남 군병의 상경조차 백지화했던 것을 고려하면,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적에게 원병을 요청하자는 논의가 진행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결국 출병 지연에 대한 우려와 국방상의 부담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논의가 제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협 받았던 당시 조정의 위기의식·절박함을 충분히 알 수 있다.

4 반란의 파장

인조는 환도한 뒤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南以興)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고, 난의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대내외적으로 이괄의 난이 남긴 파장은 컸다. 대내적으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내란으로 인한 국왕의 피란을 경험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또 이후 사찰 강화로 인해 사실상 공안정국이 지속되면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공신 집단 내부의 알력으로 우발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다는 점은 반드시 되짚어볼 부분이다. 대외적 파장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불안정한 국내 상황을 여과 없이 외부에 노출시켰다는 사실이다. 반란이 실패하자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일당은 후금으로 도주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책동한 것이 그 일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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