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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서인의 시대가 열리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대표 이미지

인조별서유기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光海君)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조선](仁祖) 종(綾陽君倧 :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계해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계해정사(癸亥定社) 혹은 계해반정(癸亥反正)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적 배경

반정 세력들은 광해군의 폐정을 이유로 정변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이들이 거론한 명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형과 동생, 조카 등을 무고하게 죽여 인륜을 해쳤다는 점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동복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사병을 키우고 역모를 꾀했다는 등의 이유로 유배하였다가 교동(喬桐)의 위소에서 죽였다.

또한 1613년(광해 5)에는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는데, 이듬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이 그를 증살(蒸殺)하였다.

또한, 정원군(定遠君 : 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이자 인조의 막내 동생인 능창군 이전(綾昌君 李佺)을 역모 혐의로 국문하고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자살하도록 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서도 역시 계속 압박을 하던 중 1617년(광해군 9) 무렵부터는 폐모론이 대두되었고, 결국 존호를 폐하여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각종 공헌(貢獻)을 금지시키며 경운궁(慶運宮)에 유폐하였다.

두 번째 폐정은 지나친 토목공사와 인사의 파행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이었다. 광해군은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을 중건하고 종묘(宗廟)를 중건한 것 외에 이후 새로이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仁慶宮)을, 새문동에 경덕궁(敬德宮)(지금의 경희궁)을 연이어 건설하여 토목공사가 끊이질 않았다. 또한 자신들의 측근들과 측근들의 요청 및 뇌물 등에 따른 파행적인 인사와 지나친 부역과 세금으로 민생을 망가뜨렸다는 지적이었다.

세 번째는 명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한 재조(再造)의 은혜가 있는 나라인데 명의 요청에도 파병을 주저하고 1619년(광해군 11) 사르후 전투(일명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등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 같은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원병을 보내는 문제에서만큼은 이이첨마저도 춘추(春秋)의 대의를 말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다.

3 반정의 진행 과정

이러한 명분으로 반정을 주도한 이들은 훗날 즉위한 능양군과 그의 인척, 그리고 병권을 관장할 수 있었던 서인들이었다. 능양군의 친척으로는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 구굉(具宏)·구인후(具仁垕) 등을 들 수 있는데, 이중 신경진을 통해 김류(金瑬)·이귀(李貴)와 연결되었고, 다시 이들을 통해 김자점(金自點)·이괄(李适) 등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원래 1622년(광해군 14) 가을 이귀가 평산부사에, 신경진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에 있을 때 범 사냥을 명분으로 군사의 이동 경계의 제한을 철폐하여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고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다행히도 이들의 거사 시도는 김자점과 심기원(沈器遠) 등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해결되었으나 그 이듬해에도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추국청까지 설치되어 관련인들이 모두 잡힐 상황이 되자 곧바로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새벽에 거사하였다.

이귀·김자점·한교(韓嶠) 등이 먼저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고, 뒤이어 이서(李曙)가 이끄는 장단(長湍)의 군사와 김류가 이르렀다. 능양군은 친병을 거느리고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서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전체적인 군사 규모는 장단의 군사가 7백여 명이며 기타 인물들이 이끈 군사가 6~700명 정도로 1400여 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3경 무렵 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이 때 궁성의 수비를 책임지던 훈련도감(訓鍊都監) 대장 이흥립(李興立)도 반정군과 함께 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宴會)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후원에서 담을 넘어 피신하였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도망쳐 안국신이 쓰던 의관을 쓰고 숨어 있었으나, 국신이 반정 세력에서 고하여 잡혀 왔다. 세자였던 이지(李祬) 역시 장의동(莊義洞) 민가에 숨었다가 군인들에게 잡혔다. 당시 광해군은 이이첨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정도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여러 전각에 붙어 불에 탔다.

이후 반정 세력과 능양군은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직접 찾아가, 보새(寶璽)를 바쳤다.

이에 대비가 광해군을 폐하고 경운궁의 별당에서 능양군을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인조다.

4 처형과 논공행상

인목대비는 언문으로 내린 교서에서 36가지로 광해군의 죄를 지목하는 등 그를 처형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새 왕과 반정세력의 간청으로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보냈다.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李偉卿)·한찬남(韓纘男)·백대형(白大珩) 등 몇 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귀양보냈다. 이 때 이이첨은 비교적 빨리 처형되었으나, 정인홍은 인조가 종묘에 친제하고 난 뒤에야 복주하였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의 죄악을 묘당에 방(榜)을 걸어 게시하고 팔방에 반포하였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김류 등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원래 공신은 총 53명으로서 1등은 김류·이귀·김자점·심기원·신경진·이서·최명길(崔鳴吉)·이흥립·구굉·심명세(沈命世) 등 10명, 2등은 이괄·김경징(金慶徵)·신경인(申景禋)·이중로(李重老)·이시백(李時白)·이시방(李時昉)·장유(張維)·원두표(元斗杓)·이해(李澥)·신경유(申景裕)·박효립(朴孝立)·장돈(張暾)·구인후·장신(張紳)·심기성(沈器成) 등 15명, 3등은 박유명(朴惟明)·한교·송영망(宋英望)·이항(李沆)·최내길(崔來吉)·신경식(申景植)·구인기(具仁墍)·조흡(趙潝)·이후원(李厚源)·홍진도(洪振道)·원유남(元裕男)·김원량(金元亮)·신준(申埈)·노수원(盧守元)·유백증(兪伯曾)·박정(朴炡)·홍서봉(洪瑞鳳)·이의배(李義培)·이기축(李起築)·이원영(李元榮)·송시범(宋時范)·강득(姜得)·홍효손(洪孝孫)·김련(金鍊)·유순익(柳舜翼)·한여복(韓汝復)·홍진문(洪振文)·유구(柳䪷) 등 28명이었다. 그러나 논공 문제로 서인 간에 반목이 있었으며, 이는 1년 뒤 이괄의 난(李适-亂)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원 52명 중에서 약 8명은 모역 등의 여러 이유로 삭훈되었다.

5 결과와 평가

반정 후 대북파는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고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南人)이 연합한 형태로 조정이 운영되었다. 반정 직후 상징적인 인사에서 영의정은 이원익(李元翼)이 맡았다.

그는 남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광해군대에도 재상을 역임하다 폐모론에 반대해 실각했던 인물이었다. 이외에도 영남 사림의 대표자격인 정경세(鄭經世)와 장현광(張顯光)도 관직에 나오는 등 서인이 주도하긴 하였으나 남인 역시 의미 있는 직책들을 맡게 되었다.

광해군대에는 역적 토벌 등의 명분으로 반대 의견을 지닌 남인과 서인을 중앙 정부에서 거의 축출하였고, 지방 사류들이 공론을 제기하는 것도 배격하였다. 나중에는 대북파 중에서도 극히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이에 비해 인조대에는 서인과 남인 등 좀 더 광범위한 층이 정치에 참여하며 공론의 장을 정상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인조대 대동법 실시와 같은 국정 개혁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파행적이었던 인사 관행과 지나친 토목 행위를 중단시켰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공신들의 도덕적 정당성이나 세금 문제는 다시금 문제시되곤 하였다. 공신세력은 거사 후에도 개인적 군사력을 유지하며 사찰이나 모리 행위에 몰두하고 불법적으로 토지와 백성을 침탈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

한편 인조반정의 결과 중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은 바로 외교 문제다.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대의 외교 정책을 거론하면서 이후 외교적 행보에서 탄력적인 대처를 할 수 없었고 이것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당시의 국제 정세와 사상적 분위기 등을 고려한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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