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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조선, 일본의 대륙 침략 야망을 꺾다

1592년(선조 25) ~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대표 이미지

부산진 순절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 조선, 명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맞붙은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대륙침략의 야망을 지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협조를 기대하며 조선에 상륙하였으나 조선군의 저항에 부딪혔다. 명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보내고 조선의 의병, 수군활동에 피해를 입게 된 일본군은 강화교섭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교섭은 전쟁을 바라보는 서로 간의 입장차만 분명히 했다.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략했고(정유재란) 원하는 전리품을 얻으려 했다. 전쟁은 결국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종결되었다. 조선은 막대한 물질적 피해를 입었으며 사상적, 사회적, 정치적 전환기를 맞이했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의도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에 빠져 있던 일본을 최종적으로 통일한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九州)지역을 공격하던 중이던 1587년에 쓰시마[대마도](對馬島)의 도주(島主) 소씨(宗氏)를 호출하여 조선의 일본 복속 교섭을 명령하였다. 그는 조선을 복속한 후, 조선을 길잡이로 삼아 명을 침략한다는 망상적 목표를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조선과 무역을 행했던 쓰시마는 조선이 그와 같은 조건에 응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쓰시마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통신사(通信使)요청으로 바꾸었고 교섭 끝에 조선의 허락을 받아냈다. 조선은 1590년(선조 23)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종사관 허성(許筬)으로 구성된 통신사를 파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들을 복속사절로 인식했고 거만한 자세로 접견했다.

히데요시를 만나고 귀국한 통신사 일행 중 황윤길과 허성은 그의 침략가능성을 전했고, 김성일은 그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어떤 형태로든 발생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했고 남부지방의 수비를 보강했다. 이 당시 율곡 이이(李珥)의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이에 미치지 않는 소극적인 대책이었다.

조선은 일본 전체의 국력을 동원한 대규모 전쟁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3 침략의 시작과 조선의 대응

1592년(선조 25)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선봉으로 한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에서는 정발(鄭撥)이, 동래(東萊)에서는 송상현(宋象賢)이 이들을 막아섰으나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했고, 조선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하거나,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전하고 조선의 최정예부대였던 신립(申砬)의 군대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조선조정에 전해지자, 선조[조선](宣祖)는 피난을 결정했다.

선조는 개성을 지나 평양에 들어갔고, 일본군이 평양에 임박하자 한반도의 서쪽 최북단인 의주(義州)로 향했다.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명의 요동지역으로 피난하여 안전을 도모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또한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위로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의병봉기를 촉구하게 하였다. 다른 아들인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도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냈으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북상하던 일본군은 한성에 모여 회의를 가진 뒤,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가토 기요마사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북상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일본군은 각자 다른 도를 맡아 조선 지배를 시도했다.

4 명의 구원과 의병, 수군의 활동

의주로 피난한 조선 조정은 명에 구원을 요청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수도를 포기하고 피난을 거듭한 조선에 대해 명 조정은 조선이 일본군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 잠시 의심을 품기도 했으나, 곧 구원을 결정했다. 200년간 명에 충성을 다한 조선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였다. 요동에 있던 조승훈의 부대가 최초로 파견되었으나 일본군을 가볍게 보다가 평양성전투에서 패전하였으며, 이후 명조정은 송응창(宋應昌)과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대규모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관군의 참패로 남부지역을 일본군에 내준 조선이었으나, 곧 전세를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순신(李舜臣)은 수군을 이끌고 5월부터 전투를 개시했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억기(李億祺), 권준(權浚), 이순신(李純信) 등도 이순신을 도와 활약했다.

거북선은 판옥선(板屋船)과 함께 조선수군이 일본에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하였고, 이와 함께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은 한산도(閑山島)에서 일본수군에 대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해로를 통한 수송이 어려워지고 곡창지대를 점령하지 못한 일본군은 군량을 현지에서 마련한다는 계획에 차질을 겪게 되었다. 일본수군의 연전연패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해전을 피하라는 명령서를 내렸다.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는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권응수(權應銖), 전라도에서는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 충청도에서는 조헌(趙憲),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 황해도에서는 이정암(李廷馣), 평안도에서는 조호익(曺好益), 양덕록(楊德祿), 경기도에서는 심대(沈岱), 홍계남(洪季男), 등이 자발적으로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승려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전하였다.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 영규(靈圭) 등이 승병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이들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감행하기 보다는 게릴라적 전술로 괴롭혔다. 일본군이 이들의 전술에 고뇌했다는 사실은 일본군이 남긴 자료에 생생히 남아있다. 무너졌던 관군도 재정비를 한 후 여러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다. 권율(權慄)의 행주산성전투(幸州山城戰鬪),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第1次 晋州城戰鬪)가 대표적이었다. 보급의 어려움과 의병들의 활동은 일본군이 전투를 포기하고 강화교섭을 시도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대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던 평양성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평양과 개성을 버리고 한성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이 기세를 이어 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일본군을 가볍게 보고 소규모 부대만으로 진격하던 중 벽제관(碧蹄館)에서 복병을 만나 목숨만 건지고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이 벽제관 전투였다.

5 강화교섭

이여송은 이후 전의를 잃었으며, 조선의 군량보급 문제를 거론하며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군대를 개성으로 돌렸다. 일본군은 보급의 어려움과 의병의 공격, 그리고 명군과의 전투를 겪은 후,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군과 일본군이 강화교섭을 시작한 것은 양측 모두 전투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은 명에서 파견된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 유키나가 사이에서 추진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명 조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강화교섭의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반드시 명 조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의사를 반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명은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했고,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거나 조선의 영토할양을 바라고 있었다. 양측의 조건은 양보와 협상이 어려웠다. 교섭의 결렬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은 명이 공격을 포기하고 강화교섭 노선을 취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으며, 강화교섭에 조선이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사실에 분노했다.

한편 조선은 전쟁기간 동안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명의 장수로 왜구방어에 탁월한 성과를 남긴 척계광이 저술한 병서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명에서 입수하였고, 그에 입각하여 살수, 사수, 포수로 구성된 삼수기법을 고안하였다. 또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를 통해 수도방위를 위한 정규병력을 확보했고, 지방군은 속오법으로 편제하였다.

1596년 9월, 명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왕으로 책봉하기 위해 파견한 책봉사가 오사카성에 도착했다. 조선에서도 이들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황신(黃愼) 이하의 사절을 보냈다.

명 조정은 히데요시가 책봉에 만족하여 군대를 철수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히데요시는 책봉은 달갑게 받아들였으나, 그 외에는 자신이 바라던 전리품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재침을 결정하게 되었다.

6 정유재란

1597년(선조 30) 2월에 다시 조선에 상륙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7월부터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일본군은 지난 임진년의 전쟁과 달리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접전을 벌인 후 모두 남부해안으로 퇴각하였다.

퇴각한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해안에 튼튼한 기지를 세운 후 장기주둔 태세를 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보급이 쉬운 해안가에 요새를 세운 후, 이따금 조선 내지를 공격하여 장기간 괴롭히는 방식을 통해 원하는 조건을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는 행위 등 폭력성이 농후해진 것도 이번 전쟁의 특징이었다. 조선에서 베어간 코와 귀는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에 묻혀있다.

전쟁이 재발하면서 강화교섭기간 동안 잠시 조선에서 물러나 있던 명의 군대도 다시 파견되었다. 양호가 이끄는 명군은 일본군 중 가장 강력한 장수이며 강화교섭에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식되었던 가토 기요마사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기로 하였다. 1597년 12월말부터 시작된 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거의 패전위기에 몰렸으나, 추운 날씨와 마침 도착한 구원군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울산성 전투 후 일본군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승리함에 따라 해상의 주도권 역시 조선과 명이 잡게 되었다. 일본군은 전선축소안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제안했으나, 히데요시는 이를 일축하고 더 강력한 임전자세를 강요했다. 현지의 일본군이 보기에 이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히데요시 사후 정치를 담당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하 다섯 명의 다이로(大老)들은 일본군에 철수를 지시했다.

7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전쟁의 종결

일본군들은 각자 안전한 철수를 위해 대치상태에 있던 명군과 철수교섭을 시작했다. 일본군을 해안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던 명군도 이 교섭에 응했다.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진영을 공격하던 동일원과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던 유정은 각각 사세용과 모국기를 두 일본군 진영에 보내 교섭을 시작했고, 명군과 일본군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는 형태로 일본군의 무사철수를 보장했다.

조선은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조선의 의지를 현실에서 수행하였던 이는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명군의 일본군 안전철수 보장을 무시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막으려했다. 해상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이순신은 마침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였던 순천왜성(順天倭城)을 마지막으로 일본군들은 각자의 요새에서 철수하여 부산으로 집결하였고, 이후 더 이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로써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포함)은 종결되었다.

8 전쟁의 피해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조선이 7년간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거의 전 지역의 농토가 황폐해졌으며, 이는 백성들이 이곳저곳으로 피난하여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일본군은 각지에서 조선인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으며, 경복궁(景福宮), 종묘(宗廟), 불국사(佛國寺) 등의 건축물을 손상시켰다. 실록과 실록을 작성하기 위한 사초, 그 외의 많은 문서자료들이 전쟁 기간 동안 소실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전쟁 기간 중의 경험을 〈징비록(懲毖錄)〉으로 남겼다. 이 서적은 에도시대 일본에 유입되어 그들의 임진왜란 관련 문학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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