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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다

1506년(연산군 12)

1 사건의 배경과 연산군

중종반정은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燕山君)을 폐위시키고 중종[조선](中宗)을 옹립한 사건이다. 중종반정은 조선 왕조에 단 두 차례 있었던 반정의 효시가 되었던 사건으로 단순한 왕위교체에 그치지 않고, 정치의 주도층 변화, 왕권과 신권의 역학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익히 알려져 있듯 성종[조선](成宗)의 맏아들이자 중종의 이복형인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廢妃) 윤씨와 관련된 개인사, 그리고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등의 폭정으로 인해 당대에 많은 원망을 사고 있던 임금이었다.

폐비 윤씨 죽음의 전말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어린 연산군은 즉위 이듬해 어머니가 폐위되어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연산군은 죄인이었던 윤씨의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봉안하려는 의도를 여러 차례 비추었으나, 신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는 등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보냈고, 그럴수록 신하들의 반감은 깊어져 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위는 급기야는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침소에까지 찾아가 불손한 언행을 하는데 이르렀다.

어머니의 일에 얽힌 연산군의 폭정은 갑자사화 때 극에 달하였다. 비록 갑자사화의 배후에는 궁중 세력과 부중 세력의 암투라는 복잡한 정치적 대립이 얽혀있었으나, 표면상 사화의 발생 요인은 폐비 윤씨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에 따라 많은 인물들이 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폐비 윤씨와 관련된 12간(奸)으로 지목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을 당한 인물들에는 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김승경(金升卿)·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 등 전대, 혹은 당대의 권신과 명망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후손들까지 피화되는 등 처벌 범위는 매우 넓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처벌에는 이미 죽은 전대의 명망가들을 부관참시 하거나 관직을 추탈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러한 연산군의 잔인한 행위가 이어질수록 그에 대한 불만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의 폭정은 어머니 윤씨와 관련되는데 그치지 않았다. 사림의 원기(元氣)를 꺾은 일로 잘 알려진 두 차례의 사화는 연산군의 대표적인 학정의 사례였다. 1498년(연산군 4) 이극돈(李克墩)과 김일손(金馹孫)이 사초를 놓고 벌였던 대립에 유자광(柳子光)이 개입하면서 무오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유자광은 김일손이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넣은 것을 문제 삼아 김종직의 문인 전체를 공격하였으며, 이에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수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등 사림의 세력이 크게 꺾이게 되었다.

무오사화는 표면에 드러난 김종직의 〈조의제문〉건 뿐 아니라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라는 복잡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롭게 중앙에 진출하던 사림은 기세가 크게 꺾이었으며, 재야에서 학문 양성에 주력하며 연산군의 학정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던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학정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었던 무오사화와는 달리, 연산군을 배경으로 한 임사홍(任士洪)이 주축이 된 갑자사화는 전통적인 훈구와 사림을 가리지 않고 대대적인 처벌을 가한 사건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명회, 이극균 등 전통적인 훈구의 명신들이 피화되었고, 무오사화 이후 움츠려들고 있었던 사림 역시 다시금 처벌을 받게 되는 등 재야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류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중종반정 전 연산군의 정치는 어머니의 복수를 위한 개인적인 증오심, 훈구와 사림의 대립, 왕실을 등에 업은 세력의 전횡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을 보였다. 혼란은 가중되어 갔으나, 두 차례의 사화로 인해 연산군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할 세력도 없어진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비정상정인 상황은 결국 또 다른 비정상적인 왕위교체, 즉 반정을 낳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2 사건의 전개 : 순조로운 반정

연산군의 학정이 거듭될수록, 조정과 민심은 점차 연산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의 학정은 비단 정치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았다. 비록 반정 후의 기록으로 과장이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으나, 장녹수(張綠水)를 총애하고 여색을 가까이하였으며, 민간의 재산을 함부로 징발하거나 빼앗았다. 지나친 향응을 즐기는가 하면 무리한 궁궐 공사를 추진하였고, 조상의 제사를 경시하였으며 잔혹한 형벌을 남발하였다. 또한 언로를 막고 역사 편찬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비행을 저질렀다.

연이은 사화와 폭정에 지친 신하들은 숨죽여 지내면서, 물밑에서 반정을 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에게는 진성대군이라는, 배다른 아우가 있었다. 유교적 정치 사상에는, 『맹자(孟子)』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국왕이 잘못하여 천명을 잃을 경우,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혁명’ 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종의 적자로 왕위 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진성대군이 있었기에 반정세력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정의 기획자는 성희안이었다. 그는 연산군을 비난하는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이조참판 자리에서 파직된 후 반정의 뜻을 품게 되었다. 이에 동조할 인물을 찾던 그는 박원종을 눈여겨보았으며, 양자 모두와 교분이 있던 신윤무(辛允武)의 중개로 거사를 결심하였다. 또한 반정의 명분을 세워줄 명망 있는 인물로 이조판서 유순정을 낙점, 그를 끌어들이고 박영문(朴永文), 홍경주(洪景舟) 등을 동원하여 무인을 끌어 모으고 거사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반정은 연산군이 지방으로 유흥을 떠나는 날 시행되기로 예정되었으나, 연산군은 출발을 취소한 상황이었다. 거사 전날 훈련원(訓鍊院)에서 회합을 가졌던 반정 주도 세력은 거사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9월 2일 새벽 거사를 일으켰다. 이미 민심이 떠난 연산군을 위해 반정세력을 막아서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들은 새벽에 창덕궁 앞에까지 나아갔으며, 소식을 듣자 영의정 유순(柳洵),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등 조정의 중신들까지 합류하여 반정의 성사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반정 세력은 왕으로 옹립하기로 한 진성대군의 사저(私邸)로 가 대군을 호위하고, 신수근(愼守勤), 임사홍 등 연산군의 최측근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앤 뒤 연산군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후 대비에게 나아가 반정 사실을 알리고, 진성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 태조의 경우에서 보이듯, 신하들이 주축이 되어 왕을 폐위하고 세 왕을 세울 경우 대비에게 고한 뒤 대비의 명을 받들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례적인 절차였기 때문이었다.

대비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 곧 진성대군이 아닌 연산군의 아들이었던 당시 세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사양하였으나 현실적으로 폐위될 임금의 아들이 다시금 왕위에 오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연산군의 학정은 전 국가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반정은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지 않은 채 성공할 수 있었다.

3 반정의 결과 : 중종의 즉위와 연이은 반란

순조롭게 끝난 거사는 성공으로 귀결되었고, 반정이 되었다. 진성대군은 추대를 받아 새롭게 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폐위되었으며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반정의 성공은 대규모의 정국 교체를 수반하였다. 이미 반정 과정에서 연산군의 최측근 상당수가 제거되었으며, 살아 있던 연산군의 측근세력 역시 대거 제거되었고 연산군에게 피화되었던 인물들 대다수가 신원되거나 복작되었다.

성희안과 박원종, 유순정 등 반란을 이끈 세 인물이 정국을 장악하였으며, 반정에 참여한 인물들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책봉되어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종의 아내였던 신씨를 아버지 신수근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폐위하는 등 정치적 파란이 연이었다.

건국 백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왕위가 바뀐 상황은 또 다른 역모를 불러왔다. 중종의 배다른 동생들을 옹립하려다 발각된 이과(李顆)와 신윤무의 반란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러한 역모 사건들이 진실이었는지, 아니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중종과 반정세력의 정치적인 음모였는지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신하들에 의한 왕위교체가 있었던 만큼, 왕실이나 조정, 민간에서는 언제든 다시 신하들에 의해 왕이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이다.

4 후대의 평가와 영향

중종반정은 후대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비록 세밀한 사안까지 놓고 보았을 때, 중종반정이 곧바로 조선사회에 즉각적인 커다란 방향전환을 불러왔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앞서 말하였듯 중종 즉위 이후 혼란이 뒤따랐으며, 뒤이은 40여 년간 또 다른 사화가 잇달았기 때문이다. 외척의 전횡 역시 이어졌으며, 정권을 주도하는 세력의 면면만 바뀌었을 뿐 그 정치적, 사회적 성격까지 곧바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국왕이 바뀌었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곧 왕이 민심을 잃고 독단적인 정치를 했을 경우 언제든 폐위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후대 왕들에게 커다란 경고를 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17세기의 인조반정(仁祖反正) 역시 중종반정이 없었다면 쉽게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그 배경과 전개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측면이 많았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신하들의 추대에 의해 국왕이 교체되었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인조반정은 중종반정에 의해 자극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종반정은 국왕과 신하, 민심 사이의 역학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역사의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크게 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으로 그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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