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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믿음을 통하는 사절,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다

1413년(태종 13) ~ 1811년(순조 11)

통신사 대표 이미지

조선 통신사 행렬도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통신사(通信使), 조선 시대의 한·일간 정상외교(頂上外交)

조선 시대 국왕이 일본의 실권자인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양국간 정상외교 사절단이다. 통신사는 대등한 지위의 국가간에 신의를 통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통신사 파견은 조선 시대 전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일본사로 보자면 무로마치시대(실정시대) 초기부터 에도시대(강호시대)에 이르는 시기이다.

건국 이후 조선의 대외관계의 기본틀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교린은 최고권력자들 간의 상호 대등한 지위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국왕과 일본의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상호 간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조선 국왕이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의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하였다.

그런데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을 ‘통신사’라 칭한 경우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음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국왕 명의로 일본에 파견한 사절 중에는 그 대상이 막부장군이 아닌 경우도 있고, 회례사(回禮使)·회례관(回禮官)·보빙사(報聘使)·경차관(敬差官)·통신사·통신관(通信官) 등 명칭도 일정치 않았다. 파견 목적과 사절단의 편성도 다양했다. ‘통신사’의 명칭을 사용한 경우에도 통신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다른 명칭을 사용하였더라도 통신사의 범주에 넣어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통신사’란 현재적 시점에서 역사 속의 특정한 대상·사실들을 지칭하기 위해 역사적 용어를 차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만큼 위에서 제시한 간략한 통신사의 정의 외에 좀 더 분명히 그 개념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 가운데 통신사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에 부합하여야 한다.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막부장군(국왕)에게 파견된다. 둘째, 일본 막부장군의 길흉경조(吉凶慶弔)가 있거나,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장군에게 보내는 국서(國書)와 예단(禮單)을 지참한다.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三使) 이하로 편성한다. 다섯째, ‘통신사’ 또는 그에 준하는 국왕사의 명칭을 가진다.

2 통신사행의 시작

사료상에 통신사라는 명칭의 사절단이 일본 막부장군에 파견된 것은 고려 시대인 1375년(우왕 1) 사례가 최초이다.

하지만 통신사의 명칭을 사용하였을 뿐, 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통신사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한편 이때의 사신 파견 목적은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것이었는데, 이후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러한 고려의 대일교섭 방식을 계승하게 된다. 1397년(태조 6) 일본 막부장군에게 박돈지(朴惇之) 이하 국왕사를 ‘회례사’라는 명칭으로 파견하여 왜구 토벌을 요청하였다.

또 태종대에 파견된 ‘통신관’ 박화(朴和)가 피로인 100여 명을 데리고 귀국한 사례는 고려 말 이래 국왕사를 일본 막부장군에 파견하여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는 대일교섭 방식이 정착하고 있음을 뜻하는데, 이러한 조선 건국 초의 사례들은 개념상 통신사의 선행적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통신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은 1413년(태종 13) 파견된 ‘통신관’ 박분(朴賁) 이하의 국왕사이다.

사(使)에 참의(參議)를 선임하였고, 국왕 태종이 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와 예물을 지녔던 점, 사행의 실제 목적이 왜구 금압 요청과 일본 국정 탐색에 있었던 점 등에서 통신사의 조건에 부합하고 있으므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사행은 박분의 신병으로 인해 도일(渡日)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지되었으므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다.

이후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일본에 파견된 조선 국왕사는 1428년(세종 10) 정사(正使) 박서생(朴瑞生) 이하의 사절단으로, 장군 습직 축하와 전임 장군에 대한 치제(致祭)가 사행의 목적이었다. 박서생이 1428년 11월에 통신사에 임명되어 형식, 호칭을 완비한 후 이듬해 파견되어 무로마치막부와 교섭을 수행하고 귀국했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사 박서생 이하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이다.

3 조선 전기 8차례의 통신사 파견

그 이후 통신사 파견이 정례화되어 조·일 양국간 교린·우호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박분의 사행을 최초로 보면 조선 시대에 통틀어 20회의 통신사행이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에 8회, 조선 후기에 12회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먼저 조선 전기의 통신사행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1413년(태종 13) 정사 박분

②1429년(세종 11) 정사 박서생, 부사(副使) 이예(李藝), 종사관(從事官) 김극유(金克柔)

③1439년(세종 21) 정사 고득종(高得宗), 부사 윤인보(尹仁甫), 종사관 김예몽(金禮蒙)

④1443년(세종 25) 정사 변효문(卞孝文), 부사 윤인보(尹仁甫), 종사관 신숙주(申叔舟), 사행인원 약 50명

⑤1460년(세조 6) 정사 송처검(宋處儉), 부사 이종실(李從實), 종사관 이근(李覲), 사행인원 약 100명

⑥1479년(성종 10) 정사 이형원(李亨元), 부사 이수동(李秀同), 종사관 김허(金許)

⑦1590년(선조 23)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종사관 허잠(許箴)

⑧1596년(선조 29) 정사 황신(黃愼), 부사 박홍장(朴弘長), 사행인원 309명

조선 전기 대일관계에서 최대 관심사는 무엇보다 왜구 문제였다. 따라서 이 시기 통신사 파견 목적 역시 막부장군에게 왜구 금압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평화적·우호적 관계 유지의 측면에서는 장군습직 축하 역시 중요한 파견 이유였다. 일본국왕사의 경우, 생필품인 쌀·콩·목면을 무역하거나 대장경과 범종을 구해가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다. 한편, ①~⑥ 가운데 사신 일행이 막부장군을 만나서 임무를 완수한 것은 세종대의 3회뿐이었다. 국가적으로 중요 과제인 왜구 금압을 요청하기 위해서 무로마치막부측으로부터 별다른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큰 경비를 들여 통신사를 파견한 조선 조정의 대일외교 자세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반면 일본 막부는 집권자들이 국제감각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막부의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선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의 정상외교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형태적으로도 완비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일본의 정치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신숙주는 ④1443년 통신사행에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 일본 관련 정보의 핵심자료로 활용되었고 현재에도 조선 전기 대일관계를 살펴보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인,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편찬하였다.

이처럼 통신사행은 조선 시대에 일본 내의 정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파견되었던 ⑦1590년 통신사행은 적정 탐지가 최우선의 임무였다. 귀환 후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도발 가능성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보고를 함으로써 초래되었던 혼선은, 당시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고 있던 정치 상황과 관련지어 이해되면서, 당쟁의 폐해 중 대표적 사례로 꼽히곤 한다.

4 조선 후기 12차례의 통신사 파견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조선 전기의 그것에 비해 형태적으로도 한층 완결되고 사절단의 규모에서도 대형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명칭이나 파견원의 구성, 절차 등에서 안정화되고 완결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 이래의 경험의 축적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동시에 17세기초 들어선 일본의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가 일본 내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정상외교의 대상이 명확해지고 사행 경로의 안전 보장된 점, 일본 국내의 정치상 목적으로 막부측에서 통신사행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사실 등도 통신사의 외형적 틀 완결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조선 후기 12회의 통신사행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1607(선조 40) 정사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 종사관 정호관(丁好寬), 사행인원 504명

②1617(광해군 9) 정사 오윤겸(吳允謙), 부사 박재(朴梓), 종사관 이경직(李景稷), 사행인원 428명

③1624(인조 2) 정사 정립(鄭岦), 부사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 사행인원 460명

④1636(인조 14) 정사 임광(任絖), 부사 김세렴(金世濂), 종사관 황호(黃㦿), 사행인원 478명

⑤1643(인조 21) 정사 윤순지(尹順之), 부사 조경(趙絅), 종사관 신유(申濡), 사행인원 477명

⑥1655(효종 6) 정사 조형(趙珩), 부사 유창(兪瑒), 종사관 남용익(南龍翼), 사행인원 485명

⑦1682(숙종 8) 정사 윤지완(尹趾完), 부사 이언강(李彦綱), 종사관 박경후(朴慶後), 사행인원 473명

⑧1711(숙종 37) 정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간(任守幹), 종사관 이방언(李邦彦), 사행인원 500명

⑨1719(숙종 45) 정사 홍치중(洪致中), 부사 황선(黃璿), 종사관 이명언(李明彦), 사행인원 475명

⑩1747(영조 23) 정사 홍계희(洪啓禧), 부사 남태기(南泰耆), 종사관 조명채(曺命采), 사행인원 477명

⑪1763(영조 39)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사행인원 477명

⑫1811(순조 11) 정사 김이교(金履喬), 부사 이면구(李勉求), 사행인원 328명

조선 후기 통신사는 임진왜란 직후 강화교섭, 피로인 쇄환, 국정탐색, 조총 등 무기류의 대량 구입 등 전략적 목적과 막부장군의 습직 축하라는 국제정치적·외교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조선 전기에 내조하던 일본국왕사는, 그 상경로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격로로 이용된 것에 대한 징벌적 이유를 명분으로 근절시켰다. 또, 조선 후기에 일본인들의 상경을 불허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역학관계 하에서 조선이 처한 외교적·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명-일본 사이에 교섭의 중계자·중계지 역할을 하게 되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조치이기도 하다.

12회의 통신사 가운데 ①~③의 사절단 명칭은 통신사가 아닌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이는 임진왜란의 기억이 생생했던 당시로서는 도쿠가와 막부를 신의를 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 하겠다. 또 재일 피로인의 ‘쇄환’은 조선왕조로서는 전후처리에서 가장 중대한 사안이었으므로 “교린의 핵심이 쇄환에 있다”는 말로 일본측에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낼 정도였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하는 현실적 목적이 전략적 차원의 것이라면, 통신사를 열렬히 환영하였던 일본 막부측의 속내는 외교적 권능을 과시함으로써 아직은 불안정했던 이른바 막번체제(幕藩體制)를 안정시키는데 있었다.

조선 후기 첫번째 통신사였던 ①1607년의 경우 최고권력자인 막부장군이 직접 통신사 일행에게 젓가락으로 요리를 전해준 일화는 당시의 환영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막부에 파견하는 국왕사를 다시 ‘통신사’로 호칭하게 된 것은 ④1636년 통신사행부터이다. 임진왜란 이후 시간의 흐름으로 인하여 국제정세의 변화, 대일경계심의 완화 등 여건 변화와 아울러 더 이상 통신사행을 통한 쇄환이 무의미해져버린 것도 명칭에서 ‘쇄환’을 떼어내버린 핵심적인 이유이다.

1636년 통신사행을 계기로 파견 목적과 서계·예단·여정 등 내용과 형식면에서 통신사가 정례화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조일간 일상적 외교 통로인 대마도와 실질적인 통교를 위하여 문위행(問慰行)과 팔송사(八送使) 및 차왜(差倭)제도를 확립하였다.

통신사의 정례화 이후, 파견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장군습직 축하’였다. 하지만 통신사는 조·일 양국간의 유일한 정상외교 사절단으로서 파견이 이루어지는 시점의 외교적 현안의 해결 또한 중요한 목적이었음은 물론이다.

⑤1643년 통신사는 겸대(兼帶)제도 시행 이후 늘어나는 무역량의 축소 교섭, 해금정책과 도원·천초(島原·天草)의 난으로 동요하는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는 것이 그 주요 임무였다. ⑦1682년 통신사행은 왜관에 체류하는 왜인들이 자행하는 불법적 행위와 과도한 무역을 해소·통제하기 위한 약조의 체결이 임무였는데, 그 결과 1683년의 계해약조(癸亥約條)가 성립되었다.

한편, 17세기 말을 기점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확연한 안정세를 보이자, 통신사의 파견 목적 역시 교린·우호의 유지에 비중이 두어지면서 의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정치적 목적보다는 사행의 부수적인 성과로 양국 문인들간의 필담창화를 통한 학술적·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는 것이 18세기 통신사행의 특징이다. ⑩1747년과 ⑪1763년 통신사는 장군습직 축하와 우호의 확인 외에는 이렇다 할 현실적 목적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러한 추세로 인하여 19세기에는 조·일 양국 모두 통신사 파견의 절실함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1811년 통신사는 여정을 단축하여 막부가 있는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가 아닌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변질되었으며, 이후에는 통신사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후 막부장군이 습직할 때마다 ‘대판역지통신(大阪易地通信)’ 또는 ‘대마역지통신(對馬易地通信)’이 결정되었지만 시행되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동아시아세계에 서세동점의 위기가 닥치면서 조·일간의 전통적인 교린관계는 급속히 붕괴되어 갔고,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완전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5 통신사의 구성, 500명이 넘는 대규모 사절단

1802년(순조 2) 사역원 당상역관 김건서(金健瑞) 등이 편찬한 대일외교에 관한 규례집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 규정된 통신사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통신사의 원역(員役) : 정사 1원(員), 부사 1원, 종사관 1원, 당상관 3원, 상통사(上通事) 3원, 제술관(製述官) 1원, 양의(良醫) 1원, 차상통사(次上通事) 2원, 압물관(押物官) 4원, 사자관(寫字官) 2원, 의원(醫員) 2원, 화원(畫員) 1원, 자제군관(子弟軍官) 5원, 군관(軍官) 12원, 서기(書記) 3원, 별파진(別破陣) 2인, 마상재(馬上才)·전악(典樂) 각 2인, 이마(理馬) 1인, 반당(伴倘)·선장(船將) 각 3인, 복선장(卜船將) 3인, 배소동(陪小童) 19명, 노자(奴子) 52명, 소통사(小通事) 10명, 도훈도(都訓導) 3인, 예단직(禮單直) 1명, 청직(廳直)·반전직(盤纏直) 각 3명, 사령(使令) 18명, 취수(吹手) 18명, 절월봉지(節鉞奉持) 4명, 포수(砲手) 6명, 도척(刀尺) 7명, 사공(沙工) 24명, 형명수(形名手)·둑수[纛手] 각 2명, 월도수(月刀手) 4명, 순시기수(巡視旗手)·영기수(令旗手)·청도기수(淸道旗手)·삼지창수(三枝槍手)·장창수(長槍手)·마상고수(馬上鼓手)·동고수(銅鼓手) 각 6명, 대고수(大鼓手)·삼혈총수(三穴銃手)·세악수(細樂手)·쟁수(錚手) 각 3명, 풍악수(風樂手) 18명, 도우장(屠牛匠) 1명, 격군(格軍) 270명 (형명수·둑수 각 1인 및 월도수 이하 쟁수까지 58명은 격군이 겸한다)

원역별로 규정된 총수에서 격군이 겸하는 60을 빼면 통신사의 구성인원은 총 517명이 된다. 물론 이는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조·일 양측이 통신사 파견과 관련한 교섭을 진행할 때 일본의 요청 등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변동이 생기게 된다. 그들이 타고 가는 배는 수군통제사영과 경상좌수사영에서 마련하였는데, 사람이 타는 기선(騎船) 3척과 짐을 싣는 복선(卜船) 3척 등 모두 6척으로 편성하였다.

한편, 일본 측 대마도주나 막부의 관리들에게는 그 지위에 상응하는 예조의 관리들이 서계를 발송하였다. 특히,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에게 발송하는 국서는 규모나 격식이 엄격히 정해져 있었으며 반드시 그 형식을 준수하였다. 통신사는 외교 문서 뿐 아니라 일본측에 선사할 다량의 물품도 싣고 갔는데, 그 종류·수량을 감안할 때 증여무역(贈與貿易)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6 통신사의 여정

『증정교린지』에는 부산 영가대에서 대마도를 경유하여 에도성(江戶城)까지의 편도 경로를 수로 3,290리와 육로 1,310리, 총 4,600리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일본측의 요청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에 치제하기 위해 일광산(日光山)까지 갈 경우, 에도성~일광산 사이의 육로 370리가 추가되었다.

물론 이는 국외에서 소화해야 하는 편도 여정일 뿐이었다.

통신사의 총 여정을 국왕에 대한 하직부터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복명까지로 보자면, 우선 한양을 출발해서 부산에 도착하는 데 2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들에게는 중도에 연향이 베풀어졌다. 통신사 일행은 부산에 도착해서 하여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는데, 이는 출항 직전에 반드시 거행하였으며, 사뭇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국서를 받들고 출항한 통신사는 호위하는 대마선단에 선도되어 대마도 와니우라(鰐浦)에 입항한 뒤 치소가 있는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대마도에서 접대를 받은 다음 통신사 일행은 대마 부중에서 도주의 연향을 받은 다음, 이키도(壹岐島)에서 후쿠오카(福岡)를 거쳐 아카마세키(赤間關)를 항로로 취하여 세토나이해(瀨戶內海)를 거슬러 오사카(大阪)까지 갔다. 그곳에 6척의 아국 선박은 몇 명의 경비요원과 함께 남겨둔 채 여러 다이묘(大名)가 제공한 배를 타고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한 다음, 일본측에서 제공하는 인마(人馬)의 도움을 받아 육로를 통해 교토(京都)로 갔다. 쿠사(草津)를 출발하여 1620년대 특별히 건설하였던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를 지나 도카이도(東海道)를 지났다. 오카자키(岡崎)에 도착하여서는 막부에서 보낸 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육로로 목적지인 에도에 들어갔다.

에도성에서 일정은, 막부측에서 택한 길일에 국서·별폭(선물 목록)을 전달하고 며칠 뒤 막부장군의 회답서·회답별폭 그리고 통신사 일행에게 답례로 증정하는 물품과 금은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대마도주와 함께 왔던 길을 돌아서 귀로에 올랐다. 대마도에서부터는 차왜의 호송을 받으며 부산에 입항한 뒤 한양으로 복귀하였다. 왕복에 소요되는 시간은 대개 5~8개월 정도였다.

7 통신사가 남긴 유산

통신사 일행은 사행 중에 일본의 각 번으로부터 향응을 제공 받았고, 행렬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의 지식인·문사들과 필담창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통신사는 방문한 지역마다 많은 서화·시문·글씨 등 학술·문화교류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한 유산들은 병풍·회권·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전파자로서 통신사의 역할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시기에는 통신사의 주된 임무로서 자리 잡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인들과 학술적·문화적 교류는 일본 관련 정보를 취득하는 중요한 경로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통신사들은 귀환한 이후에는 일본에서 견문한 사실들을 충실하게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遊錄)』,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東槎錄)』, 조엄의 『해사일기(海槎日記)』, 김세렴의 『해사록(海槎錄)』, 남용익의 『부상록(扶桑錄)』 등은 대표적인 일본 사행록·견문록들이다. 이러한 일본 사행록들은 문화교류의 양상과 내용, 일본 관련 정보, 그리고 조선 시대 당시 지식인들의 일본 인식을 살필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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