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한산도 해전

한산도 해전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력화하여 전쟁의 판세를 뒤엎다

1592년(선종 25)

한산도 해전 대표 이미지

한산도이충무공유적(제승당)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임진왜란의 발발과 해전의 부재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직전에 남해안의 수비 태세를 강화할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였다. 이 시기에 이순신과 이억기(李億祺)가 전라좌수사와 우수사로 임명되어 임란 때까지 약 1년 남짓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초기 경상도의 전황은 좋지 못하였다.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과 부산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처럼 맞서 싸우다 죽음에 이른 경우도 있었던 반면, 경상도좌병사 이각(李珏),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처럼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 경우도 있어 일본군이 쉽게 전쟁을 주도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도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도 있었으나 전선 4척만을 지켰을 뿐 휘하세력을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후 한동안 원균이 일본 군선 10척을 분멸한 것 을 제외하면 양국 수군이 해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는 일본군의 전략과 관련이 된 것으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전쟁을 경험한 반면 해전의 경험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본 수군의 목적은 조선 수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병력 및 군수품 운반이나 상대방 보급로 차단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 수군은 경상좌수영과 주변 진영을 점령한 후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원균에게는 전황을 살피면서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휘하의 수군 세력을 단속하고 결집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순신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시험 발사하거나, 수군을 모으고, 정찰 활동을 펼치고, 휘하 함대를 집결하였다.

2 이순신의 1, 2차 출전

4월 30일 원균에게서 경상우수영이 점령되었다는 공문이 오고, 인접한 경상우도 진영 네 군데의 장수와 병력이 흩어져버렸다는 소식이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출전 준비를 해오던 이순신은 불리해지는 전황 속에서 출항을 결심한다. 그때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출발해서 온다는 전달이 오자 합세하여 출발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어 5월 4일 새벽 단독으로 제1차 출전을 시작한다.

첫 출전한 이순신 함대는 판옥선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이었다. 여기에 5월 6일 원균의 전선이 도착하면서,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 미조항첨사 김승룡(金勝龍), 소비포권관 이영남(李英男),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 옥포만호 이운룡(李雲龍) 등 경상우도 소속의 장수들이 전선 4척과 협선 2척에 나누어 타고 합류하였다.

7일 사도첨사 김완(金浣) 등이 신기전을 쏘아 일본 군선 발견을 보고하면서 임진왜란의 첫 해전, 옥포해전이 시작되었다. 상대는 옥포만 일대를 약탈 중이던 30여 척 규모의 일본측 함대로 이순신 함대는 일본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총통 등의 화기 사용, 전선을 이용한 당파전술(전선을 부딪혀 상대방 배를 부수는 전술), 궁시를 이용한 사살과 화공을 이용한 완승이었다.

곧이어 영등포로 이동하다 일본의 대선 5척을 발견했다는 급보를 받고 추격을 시작하여 합포(진해시 합포)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상륙하였고, 이순신 함대는 빈 배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합포해전) 이튿날인 8일 새벽 진해 땅 고리량에 일본 군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출격하여 적진포에 이르러 대선과 중선을 합쳐 13척의 군선이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빈 배를 공격하여 13척 모두를 분멸하는 성과(적진포해전)를 올렸다.

이틀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한 이순신 함대는 적진포해전 이후 휴식 중에 전라도도사 최철견(崔鐵堅)에게서 선조의 피난 소식을 전해 듣고서, 배를 돌려 5월 9일 정오 무렵 전라좌수영으로 귀항하였다.

이후 전력 보강을 위해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6월 3일까지 좌수영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억기 함대가 도착하기 전인 5월 27일 원균으로부터 일본 배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압박해 와서 함대를 노량으로 이동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에 이억기에게 뒤따라오라는 공문을 남기고 29일 새벽 노량으로 출발하여 원균과 합세한다. 이렇게 이순신 함대의 2차 출진이 시작되었다.

이날 일본 군선 한 척을 추격하던 중 사천 포구에 정박 중인 군선 12척을 발견하면서 사천해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지형을 이용한 조총 공격에 나서고 썰물인 상황에서 판옥선이 포구로 접근하지 못하여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조수가 밀물로 바뀌면서 판옥선이 포구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고, 거북선이 투입되어 활약하면서 일본 군선 전부를 궤멸시켰다. 다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총상을 입었고, 군관 나대용(羅大用)과 다수의 사부(射夫)와 격군(格軍)도 부상당했다.

승전 후 점차 동쪽으로 진출하던 중 6월 2일 당포 선창에 일본 군선이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대를 이동하여 당포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군선은 대선 9척과 중·소선이 12척으로 총 21척의 규모였고, 그 중 대선 한 척은 높이 6~7미터정도의 층루가 있는 일본 측 주력함 아타케였다.

이순신 함대는 거북선으로 아타케를 들이받으면서 현자 철환을 쏘고, 천자·지자·대장군전을 쏘아 격파하였다. 그리고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이 일본 장수를 활로 쏘아 맞추자 김완과 진무성(陳武晟)이 그 머리를 베었고, 일본 수군이 달아나면서 당포에서의 전투는 승리로 끝난다. 당시 일본 군선은 모두 불태워졌다.

6월 4일에는 드디어 이억기 함대가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억기 함대의 전선 25척이 추가되어 전체 전선 규모는 51척으로 증대되었다. 6월 5일 당포해전에서 도망친 일본 군선이 고성땅 당항포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군선은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의 규모였다.

이순신 함대는 유인책을 펼쳤고, 이에 대장선인 충각선을 중심으로 일본 함대의 모든 배들이 바다로 나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거북선으로 충각선에 접근하여 깨트리고, 주변 전선에도 집중 타격을 가해 대장선의 일본 장수를 사살하였다. 이후 달아나는 일본 군선을 포위, 공격하여 수급 43개를 베고, 한 척을 제외한 나머지 군선을 전부 불태웠다. 6일 새벽에는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나머지 군선 한 척의 퇴로를 지키고 있다가 급습하여 50명 이상의 수급을 참획하였는데 그중에는 대장을 비롯한 장수만 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당항포해전)

6월 7일에는 2차 출진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해전인 율포해전이 벌어졌고, 율포에서 부산 쪽으로 달아나던 일본의 대선 5척과 중선 2척을 추격하여 격파하고, 버려진 배까지 모두 불태웠으며, 수급도 30여 개를 획득하였다. 이 해전에서 일본의 이름난 수군장 구루시마 미치유키가 패배의 충격으로 할복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차 출진의 전공으로 이순신은 자헌대부, 원균과 이억기는 가선대부로 가자하는 포상이 내려졌다.

3 한산도해전과 그 의의

해전에서 연패에 빠진 일본은 육전에 참가중이던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조선 수군과 결전을 준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6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보급로 확보와 조선 수군 제거를 위한 일전을 펼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에 먼저 출전준비를 마친 와키자카는 구키와 가토가 준비 중임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다. 이 때 와키자카가 거느린 함대의 규모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이순신 함대가 맞아 싸운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조선수군은 2차 출진을 마치고 귀환하여 다음 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가덕·거제 등지에 일본 군선이 다수 출몰한다는 첩보와 전라도 금산(錦山) 지경으로 일본군이 접근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에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7월 4일 이억기의 함대와 좌수영에서 합류하였고, 5일에는 작전 계획을 논의한 뒤 7월 6일 드디어 3차 출전을 시작하였다. 연합함대가 노량에 도착하였을 때 원균도 7척의 함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연합함대는 진주 창신도에 정박하고 하룻밤을 보낸다.

7월 7일 연합함대가 당포에 머무르고 있을 때, 목동 김천손이 와서 ‘일본 군선 70여 척이 낮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의 경계인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왔다. 다음날 일본 함대 쪽으로 출발하여 우선 적의 척후선인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을 만난 후 이들을 추격하여 본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견내량이라는 해역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대형 선박이 항해하기 어려운 긴 해협인 탓에 대선으로 해전하기에 부적합하였고, 육지가 가까워 일본 수군이 상륙하기에도 수월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와키자카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우선 전선 5~6척을 투입, 일본 선봉과 전투하다가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니 일본 함대가 돛을 펴고 추격해 왔다.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 일본 함대가 도달하는 순간, 이순신은 모든 장수들에게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을 형성하면서 일본 함대에 돌격하도록 하였다.

모든 전선이 지자·현자·승자총통(勝字銃筒)을 발사하면서 적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군은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학익진에 의한 포위공격을 펼치는 바람에 도주에 실패하고 참패하였다. 일본은 이 전투에서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잃었고,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부장인 와키자카 세베에나 와타나베 시치에몬 등은 전사했고, 선장 마나베 사마노죠는 할복 자결하였다. 또한 한산도에 상륙한 400명과 탈출한 14척의 배에 탄 병력을 제외하고 일본수군 3천여 명 이상이 이 전투로 전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이며,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우고 있다.

7월 9일에는 안골포에 왜선 40여 척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즉시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역풍이 불어 거제 온천도에서 머물렀다가 10일 새벽에 출발하여 안골포에 도착하니 일본 함대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모두 42척이 정박 중이었는데, 이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돕기 위해 쫓아온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함대였다.

안골포도 포구의 지세가 좁고 수심이 얕아서 판옥선 같은 대선이 쉽게 들어갈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유인 전술을 구사하였다. 하지만 일본 함대는 해전을 회피하였고 이에 이순신은 전선을 교대로 포구에 출입하게 하면서 총통과 장편전(長片箭), 화전(火箭)으로 집중공격을 가하여 정박해 있던 일본 군선을 불태우고, 일본 장수와 수군 다수를 살상하였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야간을 이용해 부산으로 도주하였다. 이것이 한산도대첩에서 이어진 안골포해전이다.

한산도해전 즉 한산도대첩이 포함된 이순신 함대의 3차 출전은 앞서의 1차와 2차 출전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앞서의 1차와 2차 출전의 경우에는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과의 일전을 염두한 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주로 정박해 있는 적선을 상대로 한 일방적인 공격을 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해전다운 전투를 벌인 경우에도 일본 함대의 규모가 조선 함대의 규모를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비해 3차 출전은 일본 측에서도 이순신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구성한 상태에서 맞붙었다는 점이 달랐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선 수군도 전사 19명, 부상 119명으로 피해가 컸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학익진과 같은 전술과 막강한 화력으로 일본 수군을 압도하였고 이로 인하여 일본 측은 더욱 피해가 커서 격침된 군선이 79척, 참획된 수급 340개를 포함하여 사살된 인원이 3천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본격적인 해전에서의 승리라는 점도 의미가 있겠지만 한산도 해전은 임진왜란 전체 국면에 끼친 영향이 더욱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리고 해안에 축성하도록 하는 등 일본 측으로 하여금 전략을 수정하도록 하였으며, 제해권이 조선에 넘어가게 되자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육군도 진퇴양난에 빠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산도 해전으로 일본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력화하였기 때문이며, 전라도와 충청도가 보전되어 조선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것도 이 해전의 공이었다고 할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