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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중앙 권력의 차별에 맞선 지방 세력의 저항

1811년(순조 11) ~ 1812년(순조 12)

홍경래의 난 대표 이미지

순무영진도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2 사회경제적 배경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토지겸병의 확산과 지주전호제의 발달과 이앙법(移秧法)·이모작(二毛作)의 발달,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고, 다수의 영세 소농민들과 유민층(流民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 유민층들과 평안도 지방에서 널리 존재하던 광산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정부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평민 지식인과 몰락 양반층의 주도 하에 발생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당시 많은 농민들은 광산에 가서 금은을 채굴하는 것으로 생업을 유지하려고 했다. 전통적인 농본 국가인 조선에서는 상공업을 말업이라고 천시하며 농민들이 농업에서 이탈하는 것을 최대한 막고자 했다. 하지만 농민층이 분해되면서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다수의 유민층과 광산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홍경래(1780~1812)는 본관은 남양으로 1798년(정조 22) 과거 시험에 낙방하며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과 외척 세도정치 하의 여러 모순에 불만을 품고 과거를 단념한 채 병서의 연구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비록 과거를 단념하기는 했으나 경서에 대한 일정한 이해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정감록(鄭鑑錄)』 등의 비기류, 풍수사상에도 일정한 이해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홍경래는 풍수를 내세워 각지를 전전하면서 당시 사회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홍경래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몰락양반·유랑지식인들과 결합한 것으로 보이며 10여 년간 조직적으로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홍경래 등은 가산군 다복동에 기지를 정하고 광산노동자 등으로 부대를 조직해 훈련시키는 한편 우군칙, 곽산 출신으로 진사였던 김창시(金昌始)와 가산역의 관리로서 대청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이희저(李禧著)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고 토호·향리·상인 등을 끌어들여 중요 지방과 도시들에 조직을 결성했다. 한편으로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노동자·빈농·유민들을 끌어들여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

홍경래의 난은 본래 12월 20일에 ‘거병’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17일부터 말타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사람들이 집결하여 소란을 일으켜 거사일이 선천군(宣川郡)의 부사 김익순(金益淳)에게 발각되어 12월 18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이들이 왜 이 날을 거사일로 잡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전후 상황을 미루어볼 때 ‘백년 이내 없었던’ 1809년(순조 9)의 심각한 가뭄과 그로 인한 기근, 그리고 연이은 1810년(순조 10)의 흉년과 유랑민의 급증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1809년 흉년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기근이었다. 순조 즉위 이후 순조 8년까지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나 이 시기 심각한 가뭄으로 인하여 모내기를 망치면서 전국을 휩쓰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된다. 먹고 살 방도를 상실한 농민들은 도적으로 변모하였고 이들에 대한 처리가 조정의 또 다른 고민거리였다.

조정에서는 구황책을 통해 기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순조는 11월에 전교하여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따지지 말고 바로 지급하여 구황의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등 각 지역별로 신속하게 구황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황책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의 처지는 쉽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광주목사 송지겸 등이 연명하여 12월 상소한 내용에 따르면 금년의 기근이 100년 이래 최악의 수준임을 강조하며, 도내의 토지 중 10중 7, 8은 버려진 상태로서 백성들도 모두 굶어죽을 걱정을 하고 있으므로 전폭적인 세금의 경감 없이는 농민들이 버텨내기 힘들다고 호소하고 있다.

1810년(순조 10) 시점에서 수원·광주·경기·삼남 지역에 대한 진휼 보고를 살피면, 굶주린 기민의 수만 800만을 넘어가고 있으니, 당시 식량 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809년(순조 9)의 기근과 식량 비축이 떨어진 보릿고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식량 위기라는 측면에서 최악의 시점이었다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점을 감안해도 이러한 숫자의 규모는 전례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한편 거사 6개월 전에 있었던 황해도의 곡산 민란 역시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곡산 부사 박종신이 창고의 곡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감색(監色)들을 모두 옥에 가두자 주민 수백 명이 몽둥이를 들고 동헌에 돌입하여 관노를 때려눕히고 부사의 병부와 인신을 빼앗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토착민도 수령을 징치할 수 있고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按覈使)라 할지라도 불합리한 조치를 취하면 주민들이 저항할 수 있으며, 향품관들과 협력하여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홍경래의 난에 일정한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홍경래 난의 전개

12월 18일 다복동에 모인 500여 명의 반군들은 격문을 낭독하고 거병식을 마친 뒤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출병했다. 홍경래가 이끌고 홍총각(洪總角)이 선봉장이 된 남진군은 가산 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살해하고 무기를 수습했다. 이들은 그 다음날 꼬박 하루를 행진하여 가산의 동남쪽 박천군(博川郡)에 도착하여 기병 40여 명, 보병 500명을 이끌고 쳐들어갔다. 처자와 노모를 버려둔 채 인근 서운사(棲雲寺)에 숨어 있던 군수 임성고(任聖皐)는 노모의 구금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남진군은 원래 박천을 점령한 뒤 영변부(寧邊府)를 공격하고 이어서 안주(安州)를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지도부 내부의 분란이 발생했다. 안주 병영의 집사 김대린·이인배 등이 안주를 먼저 치자고 주장했으나 모사 우군칙이 애초 계획대로 영변을 치고 안주를 칠 것을 주장하여 우군칙의 의견이 결국 채택되었고, 이에 김대린 등이 난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홍경래를 죽이고 공을 세우자는 생각으로 칼을 휘둘러 홍경래를 쳤다. 홍경래가 이를 피하고 김대린은 자결하고 이인배도 함께 죽었는데, 이 때문에 남진군은 진공을 일시 늦추고 다복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홍총각이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부대 300여 명이 3일 뒤인 24일 밤 박천 송림리에 도착했고 홍경래·우군칙도 이어서 군병 500여 명을 이끌고 회합했다. 그러나 이 사이 안주성의 목사 조종영(趙鍾永)과 영변부사 오연상(吳淵常)이 내응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면서 안주와 영변이 안정되었다. 안주성 공략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남진군의 일부는 박천과 태천 남창에 이르러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25일 밤 좌수 김윤해 등의 환영을 받으며 태천성을 접수했다. 남진군은 갈마창과 고성진에서 군량을 날라와 진공을 준비하고 28일에는 안주성 북쪽 송림에 진을 쳤다.

한편 부원수 김사용(金士用)을 중심으로 선봉장 이제초(李濟初), 모사 김창시 등이 이끄는 북진군은 18일 밤에 곽산군(郭山郡)을 점령하였고, 19일 점심 때쯤 좌수 김이천 등의 내응과 협력으로 정주성(定州城)에 무혈입성하였다. 이후 북진군은 24일 선천을 함락시켰고 다음날 선천부사 김익순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어 28일에는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 1부대는 철산군(鐵山郡)으로, 2부대는 구성군(龜城郡)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구성으로 간 2부대는 부사 조은석의 저항을 받기도 했으나, 철산으로 간 부대는 내부의 향임·무임층의 협조로 저항 없이 철산을 장악하였다. 이어 김사용은 곽산·선천·철산에 이어 용골산성(龍骨山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무풍지대를 달리는 듯 했지만, 의주(義州)의 회군천 전투에서 “의병장” 김견신이 이끄는 관군과의 접전에서 패해 용천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이후 구성부 진입에 실패한 제2부대는 정주성에 합세하였고 이때부터 1월 17일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 제1부대가 합류할 때까지 관군은 곽산 전투, 사송야 전투 등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4 조정의 대응

조정에서는 난이 발생한지 6일째 되어 본격적으로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순조는 정만석(鄭晩錫)을 관서위무사로 임명한 뒤 유시문을 내려 보냈다. 유시문을 살펴보면 당시 홍경래의 난에 대한 순조의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을 위한 방향 등이 담겨 있는데, 순조는 일단 이 난이 흉년에 시달린 빈민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그들에 대하여 약간의 동정심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이들을 황건적의 무리로 파악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음을 밝히고 이들에게 현상금을 걸면서 적당들을 쳐부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정 내에서도 여전히 상황파악이 충분하지 않아 영부사 이시수(李時秀)는 관서의 적변은 남의 농작물을 훔치는 도적에 불과하여 며칠 내에 소탕될 것이라는 안이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으나,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은 양서(兩西)에만 문제를 맡길 수 없다고 주장했고 행대호군 박종경(朴宗慶) 역시 경군(京軍)을 징발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순조는 박종경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요헌(李堯憲)을 양서순무사로 삼고 박기풍(朴基豊)을 중군으로 삼았다.

당시 조정은 홍경래의 난의 상황을 매우 급박하게 받아들였으나 군대를 즉각적으로 보낼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기 보다는 일부 정예군사만 파견한 뒤 현지의 의병들과 합세해서 홍경래를 토벌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당시 조정군의 군기가 엄하지 못하여 일부는 출병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홍경래의 난이 진행되면서 헛소문이 돌기도 했다. 애초에 순조는 심약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고 불면증과 식욕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홍경래의 난이 한창 진행되던 1812년(순조 12) 저녁에 갑자기 국왕의 사망설로 짐작되는 헛소문이 도성에 떠돌아 온 성안이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이는 순조의 허약한 건강과 홍경래의 난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감이 동시에 작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안주성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힌 홍경래군은 정주성으로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관군은 공성 작전을 전개했으나 반군의 저항이 강하고 추위도 심해서 공략은 난항에 부딪혔다. 여기에 관군의 약탈로 민심이 반군 쪽으로 돌아서면서 공성전은 더욱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당시 관군의 기강은 극히 문란해서 백성들은 반군에게 의지하고 지원하여 낮에는 관군의 동태를 알려주고 밤에는 군량을 날라다 도와주었다.

전체적으로 관군도 점차 전열을 정비해갔으며 반란군들은 전선 확대에 한계를 느끼고 점차 정주성 주변으로 결집하면서 양자의 대치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서 정주성 주변의 대치는 점차 지지부진해기 시작했다. 관군 역시 최대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정주성에 대한 압박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려고 했다.

조정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고 홍경래가 주모자라는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난이 진행되고 반란군의 포로를 확보하면서 비로소 난의 지도부의 정확한 구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홍경래가 지도자였고 김창시, 우군칙 등이 모사가 되었으며 이들이 반란의 성공 가능성을 선전하면서 이희저의 자금력을 기반으로 초반 인원을 모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점차 양상이 지구전으로 변해가면서 조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관군의 총수는 8,329명으로 성안의 반군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였지만 혹독한 추위와 질병, 인근 주민들의 적대적인 태도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성안의 반군은 난의 초기와 달리 인근에서 모인 농민군으로 구성되어 저항이 완강하였다. 3월 들어서는 오히려 반군이 공세를 펴기도 했는데, 예컨대 3월 8일 홍경래는 1천여 명의 군병과 함께 성을 지키고, 우군칙·홍총각 등이 건장한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새벽에 서북문으로 나가 함종부사 윤욱렬과 의병장 허항(許沆)의 진을 기습했다. 갑작스런 반군의 화공에 갈피를 못잡고 관군 70명이 사살되고 137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세 작전은 결국 간헐적인 성공만을 거두었으며, 허항·김견신·최신엽과 같은 ‘의병장’들의 맹활약에 반군의 피해가 더 큰 경우도 많았다.

관군이 어느 정도 전열을 정비하면서 야전에서는 관군의 우세가 점차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비록 반란군의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지만 조직력이 부족하여 관군의 화력을 당해내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관군 못지않게 자발적으로 참전한 ‘의병장’들의 활약도 홍경래 군에는 큰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주 출신의 한량 김견신은 일찍부터 백마산성 등에서 맹활약을 하고 하였으며 정주성 전투에서도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 허항은 용천에서 적을 기습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반란군의 배치를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견신은 일찍부터 군사를 모집하여 초반에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예봉을 꺽는데 성공하였다. 조정은 이들의 용기를 치하하고 이들에게 포상을 베풀어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했다.

여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식량이 고갈되어 소·닭·돼지·개 등을 모조리 잡아먹고 말까지 잡아먹어 10여 필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지도부는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3월 23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굶주린 사람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5 홍경래 난의 결말과 그 영향

4월에 들어서 관군은 공성을 재개했으며, 4월 3일부터는 성 밑으로 땅굴을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16일간의 땅굴파기 작업 끝에 성 밑에 도달한 뒤 4월 18일 밤 북장대 밑에 1,711근의 화약을 폭발시키고 성이 무너진 틈을 타 일시에 반군을 제압했다.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었고 반란군의 지도부는 모조리 사망하거나 생포되었다. 생포된 남정 1,917명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사회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어 농민들의 저항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19세기에 들어 전개된 일련의 난들은 조직과 규모 면에서 보다 크고 광범위했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이 중에서 홍경래의 난은 그 뒤를 이은 황해민란(1811), 제주민란(1813) 등의 선구로써 순조 정권의 무기력과 정통성의 위기를 드러낸 대표적 사건이며, 19세기에 지속적으로 이어질 농민 반란의 선구적 의미를 가진다.

한편으로 홍경래 난은 인근 지역의 벌열가문과 부유층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당시 정복일·정경행·정성한 등 인근의 거족과 충신의 후손들이 이들을 대거 지원하고 있었고 반군 지도부 중에서도 이희저, 우군칙은 부유층에 속했다. 한편으로 임상옥(林尙沃)·홍득주 등의 상인들은 관군의 편에 섰고, 이는 난 진압 이후 이 지역 상권의 변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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