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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자주성의 흠결로 실패한 근대 개혁

1894년(고종 31) ~ 1896년(고종 33)

1 실패로 돌아간 갑오개혁

1896년(고종 33)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내각 구성원을 모두 파면하였다.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金弘集)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타살되었다. 이로써 그가 이끌었던 갑오개혁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갑오개혁이 애당초 일본의 압력에 의해 시작되었고 진행과정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자주성이란 측면에 치명적인 흠결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이끌었던 김홍집도 ‘왜대신(倭大臣)’이란 비판을 받았을 정도다. 그가 군중에 의해 살해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김홍집이 비록 일본과 화합할 것을 주장하여 청의(淸議)에는 배치되었지만 그는 국가를 위해 심력을 다하였고 재간도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살해된 후 매우 애석하다는 여론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

2 어떻게 시작되었나?

갑오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사건은 1894년(고종 31) 1월 10일 고부민란(古阜民亂)으로부터 비롯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은 진정되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자 일본도 텐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하여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 동아시아 차원의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정부는 농민군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농민군과 화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이 요청에 응하였지만 일본은 거부하였다. 일본은 조선 내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 이러한 변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내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전까지는 철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청국에 제의하였다. 일본은 청국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단독으로 조선정부에게 내정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 31) 6월 남산에 있는 민영준의 별장인 노인정(老人亭)에서 조선주재 일본공사와 조선 관리들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회담이 열렸다(노인정회담).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이 회담에서 조문화된 내정개혁방안을 제시하였지만 조선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대신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당시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외견상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조선 내의 정변에 군사력을 지원하는 것처럼 꾸몄다. 하지만 실제로 이 사건의 주역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압박한 상태에서 친일적인 정부를 수립하여 내정개혁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갑오개혁은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을 위한 명분 쌓기의 용도로 시작되었다.

3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었던 군국기무처 시절

갑오개혁이 처음 시작될 무렵 개혁사업의 추진을 담당한 기관은 6월 25일 설치된 군국기무처였다. 이 기관의 총재관은 김홍집이 맡았다. 그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열흘 전 조선 정부에서 자체적인 개혁추진을 위해 설치한 교정청에서도 총재관으로 임명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당시 고종과 일본 그리고 또 다른 실력자인 흥선대원군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기업으로 치면 주요 대주주들이 모두 동의하여 선임한 CEO였던 셈이다. 그는 이후 갑오개혁을 전반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당시 군국기무처에서는 김홍집과 함께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등 이른바 온건개화파가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의 인사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유길준(兪吉濬), 김학우, 권형진, 조희연 등 1880년대 개화기구에서 실무를 담당하면서 성장한 소장파 관료들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정력적인 활동을 벌여 약 3개월의 활동기간에 210건에 달하는 의안을 심의 통과시켰다. 이때만 하여도 일본은 청국과 전쟁을 치르느라 조선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청일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조선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에 전략적인 불간섭 방침을 유지했다. 따라서 군국기무처 시절에는 비교적 자율적으로 내정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군국기무처에서 추진한 개혁은 19세기 이래 해묵은 개혁과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농민군들이 제기한 폐정개혁안의 내용도 일부 반영되어 있었다.

4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 했던 이노우에 가오루

1894년(고종 31) 9월 28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특명전권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였다. 이노우에는 메이지유신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한 핵심 인물로 내무대신 등을 역임한 거물급 인사였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에도 일본 측 부전권대표로 참여한 바 있다. 일본이 이러한 거물급 인사로 조선 주재 공사를 교체한 것은 앞으로 조선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펴겠다는 신호였다. 이 무렵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전세가 일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을 요리할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조선에 부임한 후 우선 흥선대원군부터 축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그해 6월 일본군과 함께 입궐한 후 국정을 총괄하는 일종의 섭정의 지위에 있었다. 이노우에는 흥선대원군을 제거하고 대신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을 귀국시켜 김홍집과 함께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노우에는 이러한 정계 개편을 통해 조선 정부를 외부에서 조종하려 하였다.

이노우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인 고문관들을 조선 정부의 각 부서에 배치하여 조선 정부를 직접 통제하려 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한반도 내의 주둔을 영구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비밀조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노우에의 보호국화 정책은 순조롭게 추진되지는 못했다. 이노우에는 이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 미끼로 500만원의 차관 제공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일본 본국 정부가 이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300만원의 차관을 조선에 불리한 조건으로 제공하는데 그치는 바람에 그의 보호국화 정책은 추진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삼국간섭 이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도 보호국화 정책에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보호국화 정책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5 박영효의 독주

이노우에의 보호국화 정책이 파탄을 겪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보다도 조선 내정에 대한 통제력 상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박영효였다. 그는 애당초 이노우에의 정치적 간섭에 의해 개화파 정부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1895년(고종 32) 봄 이노우에의 보호국화 정책이 난관에 봉착하자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박영효는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으며 일본의 분할통치(devide and rule)의 방침에 따른 정치세력 간의 조정도 거부하였다. 그는 당시 총리대신으로 있던 김홍집과 충돌하여 김홍집 계열의 인사들을 내각에서 축출하고 자파 및 박정양(朴定陽)의 정동파만으로 구성된 내각을 조직하였다.

박영효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고종을 비롯한 왕실과도 충돌하였다. 그는 왕궁을 수비하는 병력을 자파가 통제하고 있는 부대인 훈련대로 교체하려 하였다. 이는 왕실을 물리적으로 통제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왕실의 의구심은 커져만 갔다. 결국 그는 왕비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도 통제되지 않는 박영효를 언제까지나 보호할 수 없었고 그의 실각을 방관해 버렸다. 하지만 박영효의 실각은 보호국화정책의 최종적인 파탄을 의미하였다.

6 을미사변과 단발령

1895년(고종 32) 6월 3일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었다. 전임자인 이노우에 공사와 교체된 것이다. 이노우에 공사의 해임은 일본 정부가 그의 보호국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한 것을 의미했다.

새로 임명된 미우라 공사는 임명된 후 곧바로 부임하지 않았다. 그는 한 달여의 기간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에 대한 정책을 검토하였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그는 일본의 독자지배, 공동 보호국화, 분할점령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였다

그는 첫 번째 방안을 선택했고 조선에 부임한 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그는 일본 군경과 낭인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습격해 왕비를 시해하였다. 그는 이번에도 다시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조선 내부의 정쟁으로 위장하려 하였다.

일본은 을미사변으로 외교적 고립을 겪었지만 조선 내정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을미사변 후 김홍집과 유길준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수립되어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근대적인 예산편성, 태양력과 건양(建陽) 연호의 제정, 소학교령의 반포 등이 이 때 추진된 이른바 을미개혁의 내용이다. 을미개혁의 내용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단발령이었다. 단발령에 따른 강제적인 삭발조치는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7 갑오개혁, 물거품이 되었나?

단발령의 실시는 을미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정부에게 치명적인 악수가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단발령 뿐 아니라 을미사변 당시 왕비가 시해된 점까지도 문제로 삼았다. 지방유생들은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존한다(復讐保形)’는 구호를 내걸고 봉기하였는데 이를 을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지방에서 의병항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서울에서 아관파천이 일어나 개화파 내각은 붕괴되었으며 갑오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뒤 단발령을 취소하는 등 개화파 내각이 추진한 정책을 상당수 중단시켰다. 하지만 이때 갑오개혁의 내용을 모두 백지화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은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고종 33) 2월 16일 조칙을 내려 갑오개혁의 계승할 것을 선언하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이른바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여기에 갑오개혁의 내용이 상당 부분 계승되었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실패하였지만 갑오개혁 자체가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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