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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

대한 제국을 근대 국가로

1896년(고종 33)

1 ‘광무개혁’이란?

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형식적인 칭제(稱帝)가 아닌 실제로 막강한 황제권을 보장하도록 제도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대한 제국은 황실 중심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정책을 추진해갔다. 개혁은 양전·지계사업을 비롯해 서울의 도시정비사업, 일련의 식산흥업정책과 황실 재정의 확충, 원수부 창설과 군사력 강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광무 연간(광무 연호 사용 시기는 1897년 10월부터 1907년까지이지만, 실제 개혁이 진행된 시기는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1897년 2월부터 1903년까지이다)에 수행된 개혁이었으므로 연호를 따라 ‘광무개혁’이라 한다.

2 대한 제국의 수립과 ‘구본신참(舊本新參)’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의례상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를 수용하고 있었다. 중국은 황제국이었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조선의 국왕은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지위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세계관은 변화되었다. 외국과 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가져야 했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제1조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였다. 자주국은 근대적 국교수립에 기본적인 사항이었지만 일본이 중국과 조선의 사대관계를 부정하고 조선에 진출하는데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었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들은 혁신정강 제1조에서 “중국이 납치해 간 대원군을 하루 속히 돌려 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의 의행은 폐지할 것” 등을 공포하였다. 또한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에 놓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로부터 10년 후 갑오개혁에 이르러 온건개화파가 집권하자, 다시 국왕의 지위를 황제의 지위로 높이려는 운동이 추진되었다. 갑오정권은 우선 첫 단계로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에서 ‘대군주’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조선왕조의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1894년(고종 31)은 개국 503년이 되었다. 다음 단계로 1894년(고종 31) 12월 12일(음력) 국왕이 종묘에 나아가 조상에게 서고문(誓告文)을 바치는 형식으로 ‘홍범 14조’를 공포하였다. 이 홍범 14조의 제1조에 “청국에 의부(依附)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고 선언함으로써 중국과 관계가 대등한 지위가 될 것을 천명하였다.

1894년(고종 31) 12월 17일에는 국왕의 칭호가 주상전하(主上殿下)에서 대군주폐하로 격상되는 등 왕실의 존칭이 새로 정해졌고, 1895년(고종 32) 5월 10일에는 독립경축일(개국기원절)을 반포하는 조칙을 내려 매년 7월 16일을 개국기원절로 정하고 경축하는 기념식을 거행했다. 갑오정권은 이를 통해 대외적으로 독립국가로서 대조선국의 위상과 군주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나아가 고종은 칭제(稱帝)를 공론화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 유길준, 조희연 등이 주도하여 황제 봉위식을 거행할 계획이었으나 일본을 비롯해 영국, 미국, 러시아 등 각국 공사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1896년(고종 33)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고종은 거의 1년만인 1897년 2월 9일 환궁조칙을 발표하고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환궁 직후 고종은 일본 주도의 갑오개혁을 일정 정도 되돌리고 “옛 제도를 근본으로 새로운 제도를 도입(舊本新參)”한다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정을 운영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시행해 나갔다. 먼저 고종과 측근 세력은 국정운영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새로운 국호 제정과 칭제를 추진했다. 칭제는 아관파천 직후부터 홍종우가 제의했다. 그러나 을미 연간 개화파의 칭제 시도가 열강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은밀히 각국 공사관에 측근을 보내 의사를 떠보고 1897년 8월 15일부터 새로이 광무연호를 사용하는 등 칭제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9월이 되자 고종은 본격적으로 정부대신에게 칭제 상소를 올리도록 유도하며 여론을 형성했고, 그 결과 1897년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광무 연호의 대한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은 본격적인 제도 개혁을 위해 1897년 3월 교전소를 설치했다. 신법과 구법을 참작하여 새로운 전식(典式)을 만들고자 하였다. 교전소의 개혁사업은 김병시, 조병세, 정범조 등 보수파 원로대신과 박정양, 이완용, 서재필, 김가진, 권재형, 이채연, 성기운, 윤치호, 이상재 등 개혁세력 간의 갈등으로 중단되어 버렸다. 이에 개혁세력은 1898년 초부터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정부의 보수화를 비판하며 본격적인 반정부운동에 돌입하였다. 이에 직면한 고종은 보수파 대신과 근왕세력의 도움으로 겨우 정권을 지켜냈다. 1899년 6월 23일 기존의 개혁사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법규교정소를 설치했다. 법규교정소는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를 만들어 반포했다.

3 부국강병 – 식산흥업정책

광무개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근대적 경제체제 건설을 위한 식산흥업정책이었다. 광무개혁의 식산흥업정책은 황제 직속의 궁내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황실재산을 관리하는 궁내부 내장원은 산하에 장원과(莊園課), 종목과(種牧課), 삼정과(蔘政課), 공세과(貢稅課) 등을 두고 역둔토, 광산, 홍삼, 잡세 등 막대한 재원을 관리하면서 자금을 마련해 각종 근대 개혁정책을 주도해 갈 수 있었다. 고종 황제가 재원을 내장원에 집중시킨 이유는 자금의 사용처에 대해 정부대신들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재원을 내장원에 집중시키자 탁지부의 재정은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관리들의 녹봉을 지급할 돈도 모자랄 정도였다. 또한 궁내부 산하 통신사(通信司), 철도원(鐵道院),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 광학국(鑛學局), 수륜원(水輪院), 관리서(管理署), 평식원(平式院), 박문원(博文院) 등은 모두 궁내부의 고유 업무와는 상관없는 기구였다.

식산흥업정책의 추진세력은 이용익을 중심으로 한 황제의 측근 궁내관들이었다. 특히 이용익은 오랫동안 전환국장과 내장원경을 역임하면서 모든 사업을 주관하였다. 식산흥업정책의 주요 내용은 첫째, 광산경영에 대해 1898년 1월 철도와 광산에 외국인 합동을 금지한다는 규칙을 제정하고, 6월에는 외국인 자본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전국 43개 군의 광산을 궁내부로 이속시켰다. 또 광학국을 중심으로 근대적 광기(鑛機) 도입, 외국인 기술자 고빙 등 근대적 경영에 착수했다.

다음으로 궁내부 철도원을 신설하여 철도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궁내부 서북철도국에서는 경의, 경원철도 부설을 추진했다. 철도 부설은 자금부족으로 서울에서 개성까지 일부 구간을 건설하는데 불과했지만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주적인 철도 부설을 시도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셋째, 근대적 화폐제도 실시와 중앙은행 설립이었다. 개항으로 일본과의 통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이 이미 조선의 화폐주권을 침탈하고 있었다. 정부는 1894년(고종 31) 7월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공포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한다고 하였지만 실제 본위화(은화)는 주조하지 못하고 백동화만 남발하여 경제전반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다. 백동화 남발은 이용익이 전환국장으로 있으며 황실자금 염출을 위해 무분별하게 찍어낸 책임도 컸다. 이에 다시 1901년 2월 ‘화폐조례’ 공포하여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본위화 주조와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구하지 못해 결국 제도만 마련하고 실행은 미룬 채 러일전쟁을 맞았다. 일제는 1905년 6월부터 ‘화폐정리사업’으로 일본 화폐를 무제한 통용시켜 화폐유통을 장악하였다.

이 외에도 해운회사, 직물방적회사 등 각종 회사를 설립해 상공업 진흥에 나섰다. 또한 1897년 체신 사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우편학당, 전무학당(電務學堂)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상공업학교, 의학교, 광산학교 등 근대적 기술자 양성을 위한 실업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상공업 진흥을 위한 인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식산흥업정책과 더불어 광무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무양전(지계)사업’으로 불리는 토지조사사업이었다. 조선정부는 1898년 7월 토지조사사업을 전담할 임시 기구로 양지아문을 설치하였다. 당시 국가에서 관리하는 토지대장은 엉망이었다. 마지막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된 지 이미 140년이 흘렀기 때문에 그동안의 소유권 변동이 반영되지 않았고, 실제 있는 토지가 대장에서 누락된 경우도 많았다. 토지대장마저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세금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토지조사 및 토지대장 정비는 재정 확보와 부세제도 개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양지아문에서는 미국인 측량 기사를 고용해 전국의 토지를 정확히 측량하고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일일이 기록했다. 1901년 10월에는 지계아문을 설립하여 토지소유자에게 지계(地契)라는 이름의 소유권 증명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토지소유관계가 근대적인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단되었다.

한편 고종은 부국(富國)을 위한 근대적 경제개혁과 함께 강병(强兵)책으로 군비 강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고종 황제는 무엇보다 군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군대를 황제 직속으로 두고 직접 대원수로 취임해 지휘권을 장악하고, 육군 증설과 해군제도를 마련했으며, 원수부를 창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징병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려 했다. 일본으로부터 양무호(揚武號)라는 3천 톤급 기선을 사들여 근대적 해군 창설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위한 사업의 대부분은 실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1903년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 간의 각축이 전쟁위기로 치달으면서 주권에 중대한 위기를 느낀 고종은 일단 한국의 독립유지를 위한 외교정책에 매달리게 되었다.

4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

‘광무개혁’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이 높이 평가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를 탄압한 고종과 측근 정치세력, 즉 광무정권은 반개혁적, 수구적 반동정권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광무개혁’이라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며, 그것이 한국 근대사 발전의 주류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대한 제국의 근대화정책 추진과 성과에 대한 연구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 근대 개혁과정에서 황실이 수행한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관료제 정비를 통해 왕권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제의 근대적 개편과 중상주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했으며, 황실 중심의 군사권 강화를 꾀하여 부국강병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평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종은 만국공법에 입각하여 대한 제국을 근대국가로 개편하고 계몽군주로서 자신을 개혁주체로 격상시켰다고 높이 평가하는 연구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고종을 위시한 집권세력의 무책임한 실정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 황제권의 지나친 강화와 황실재정 기구의 확대, 민중에 대한 조세수탈의 강화, 외획제도의 남발과 백동화 유통권의 확대 등 내정의 난맥상이 있었다. 또 서구열강과 중국, 일본이라는 이중의 외압에 대응하여 왕실의 안정을 위해 각종 이권을 팔아넘기며 외세를 끌어들였다. 실제 광무개혁의 성과는 고종의 개혁 의지나 제도 정비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초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결과와 정반대로 광무정권의 무능을 비판하고 일제의 침탈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각도 제기되었고, 이것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되고 있다.

이제 광무개혁을 둘러싼 긍정부정론의 경계를 허물고 개혁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광무개혁은 왕실과 개화파 관료라는 전통적 세력이 근대화를 추진한 하나의 주체로 평가할 수 있는 한국 근대 이행의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광무개혁은 전통에 철저하게 근거하면서도 근대적인 기준에 맞춰 전환하려는 방식을 취하였다. 광무 정권의 보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속성으로 근대국가라는 위상에 걸맞은 민권의 성장과 이를 보장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이 성공적으로 지속되었다면 광무개혁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근대사회의 주역이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단됨으로써 실패한 개혁이 되었다. 개혁의 실패에는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대한 제국 정부의 무능 이전에,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개혁 중단을 획책하고 집요하게 방해한 일본에 중요한 원인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세계 제국주의 질서에 편승하여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더 이상 자주적인 근대화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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