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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담배를 끊고 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다

1907년(순종 1) ~ 1908년(순종 2)

국채보상운동 대표 이미지

국채보상의원금 영수증

e뮤지엄(국채보상운동기념관)

1 나라의 빚을 대신 갚으려 한 국채보상운동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을 국민들이 대신 갚기 위해 벌인 범국민적인 모금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이 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약 1년여 동안 계속되었다. 이 운동은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큰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한국의 국권회복에 있다고 간주한 일제의 집요한 방해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2 나라의 빚은 왜 생겼나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될 무렵 일본에서 들여온 나라 빚은 무려 1,300만 원에 달할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빚은 왜 생겨나게 되었을까? 우리나라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였다. 각종 개화정책 추진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임오군란에 따른 배상금 등을 조달하기 위해 외국에서 빚을 들여온 것이다. 1880년대에는 일본이 아니라 주로 청국으로부터 들여왔는데 이를 위해 인천-용산간 기선운항권과 세곡운송권 등의 이권을 댓가로 제공하여야만 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조선 정부에서 스스로 필요한 빚을 들여왔고 재정운영을 통해 차근차근 갚아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1907년 무렵에 이르면 나라에서 진 빚이 큰 근심거리가 되고 있었다. 우선 빚을 지게 된 경위부터가 이전과 달라졌다. 일제는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대한 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 제국을 재정적으로 옭아매려는 의도로 일본으로부터 빚을 들여올 것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들여오는 일은 1904년 8월 체결된 외국인고문용빙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용빙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정 개선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빚을 들여왔다. 그래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1907년 2월의 시점에는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에 달할 정도였다.

나라에서 빚을 지게 된 내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05년 1월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으로부터 300만 원을 들여왔다. 같은 해 6월에는 대한 제국의 각종 부채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200만 원을 들여왔다. 같은 해 12월에는 화폐정리사업 때문에 일어난 금융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150만 원을 추가로 들여왔다. 이렇게 하여 1905년 단 1년 동안 도입된 나라 빚 만 650만 원에 달하였다.

1906년 2월 통감 이토는 교육제도 개선, 금융기관 확장, 도로 항구 등 기반시설 개수 확충, 궁방전의 정리, 일본인 관리의 고용 등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1,000만 원의 기업자금채를 들여올 것을 결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같은 해 3월 이 가운데 500만원의 돈을 들여왔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나라 빚 1,300만 원은 앞의 4건의 국채를 합한 액수인 1,150만 원에 이자를 더한 금액이다.

그러면 당시 1,300만 원은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기 바로 전 해인 1906년 당시 대한 제국의 세출예산은 790만 원이었다. 따라서 당시 나라의 빚은 1년 치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액수였다. 또 당시 조선인이 세운 은행 가운데 대한천일은행이 있다. 이 은행은 서울 이외에 인천과 개성에도 지점을 두고 있었다. 이 은행의 자본금은 56,000원으로 당시 나라 빚은 대한천일은행과 같은 규모의 은행을 수 백 개 세울 수 있는 액수였다.

이처럼 나라 빚의 규모도 컸지만 더 큰 문제는 빚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장 500만 원을 추가도 들여오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일제가 어떠한 명목으로 빚을 더 들여올 것을 강요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 가운데에는 이것이 국권 침탈의 가장 위험한 신호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3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16일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광문사가 대동광문회로 명칭을 바꾸기 위한 특별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은 ‘나라 빚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땅이라도 떼어주어야 할 터이니 우리 이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1인당 한 달에 20전씩 모으면 석 달 만에 모두 갚을 수 있다.’고 하면서 모금운동을 벌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광문사 사장 김광제도 이에 동의하였고 회의에 참석한 회원들도 모두 돈을 기부하여 액수가 2천여 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광문사는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서적과 당시 사용되던 교과서 등을 간행하는 한편 1906년 6월부터는 『대한매일신보』의 대구지사 사무도 맡아서 신문의 구독신청 배부 수금업무 등을 취급하는 등 지역 사회의 문화적 구심체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서상돈은 서울 출신으로 증조부 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유박해 때부터 관리들의 눈을 피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아홉살 때인 1859년(철종 10)이 되어서야 대구에 정착하였다. 그는 대구에서 종이 행상 및 포목상을 경영하여 1886년경에 이르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한때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주로 천주교 대구교구의 발전에도 힘쓰는 등 지역사회의 유지로서 활약했다.

김광제는 충청도 보령 출신으로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1902년 비서원승, 동래경무관을 역임하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오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된 바 있다. 유배에서 풀려 난 후 대구로 옮겨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위 두 사람은 대동광문회를 중심으로 발기인을 모집하여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2월 21일 대구 북후정에서 집회를 열고 대구 서문 밖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고 의연금 모금활동에 돌입하였다.

4 전국으로 확산되다

서상돈과 김광제는 취지서를 전국 주요 도시에 배포하는 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언론기관에도 대구의 상황을 알렸다. 특히 김광제는 직접 서울에 올라가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노력하였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는 이를 적극 보도하였고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월 22일 서울에서는 김성희(金成喜) ·유문상(劉文相)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의 총괄기구임을 자임하였다. 김성희는 당시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있었으며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에서 월보편찬원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유문상은 1894년(고종 31) 관립일어학교를 마치고 일본 유학을 다녀와 한성우체사 주사를 지낸바 있으며 당시에는 『야뢰』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던 인물이다.

국채보상기성회 이외에도 많은 단체가 만들어졌다. 서병염(徐丙炎)과 윤흥섭(尹興燮) 등이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조직하고 황성신문사를 의연금 납부처로 정하였다. 서병염은 사직서 참봉, 내부 주사 등을 지낸 인물로 당시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윤흥섭은 내부 주사 등을 지냈으며 국채보상운동 당시 중추원 부찬의로 있었던 인물이다.

국채보상운동은 곧바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각지에 의연금 수합소가 조직되었는데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경상도 지역에 특히 많이 조직되었다. 1907년 3월말까지 전국에 걸쳐 27개의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조직된 사실이 확인된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김성희 등이 조직한 국채보상기성회만으로는 이를 총괄하기 어려웠으며 이러저러한 혼란상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운동을 총괄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우선 4월 8일에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설치되었다. 소장에는 한규설이 추대되었으며 김종한이 부소장을 맡았고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인 양기탁은 검사원을 맡았다. 한규설은 무관 출신으로 을사늑약 당시 참정대신이었는데 늑약에 극구 반대하다가 면직된 바 있는 인물이다.

또한 같은 시기 13도 대표자들이 대한자강회 사무소에서 모여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는 별도로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조직하였다. 의장에는 이준을 추대하였으며, 부의장에는 김광제가, 위원장에는 윤효정이 취임하였다. 윤효정은 과거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국채보상운동 당시에는 대한자강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이 두 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5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

국채보상운동에는 고관이나 양반뿐 아니라 농민 상인 부녀자 등 그야말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고종도 이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고종은 2월 26일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궁중에서도 담배를 끊겠다는 칙어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참정대신 김성근을 비롯한 고관들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진정한 주역은 일반 백성이었다.

이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은 상인들과 지식층이었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상인들이 유독 많았다. 당시 상인들은 국권의 침탈 과정에서 이미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 문제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층도 이 운동에 앞장섰다. 그들은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을 통해 여론을 이끌었고 대한자강회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통해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 학교들도 국채보상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관립영어학교 교장 이하 학생 모두가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계동의 보흥학교 학생들이 의연금을 납부한 사실이 확인된다. 육군연성학교 생도들도 의연금을 기성회에 보냈으며 시위대 장교들도 담배를 끊고 의연금을 낼 것을 결의하였다.

일반 백성들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북촌의 인력거꾼들도 담배를 끊을 것을 결의하고 돈을 모아 기성회에 전달하였으며 대구에서는 걸인들까지 의연금을 낼 정도였다. 불교 승려들도 운동에 동참하였다. 동대문 밖 불암산의 승려 현암이 불공미를 절약하여 1원을 의연하였으며 종남산 미타사의 여승 40명도 8원을 기부하였다.

여성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의장이었던 이준의 부인은 국채보상부인회 사무소를 대안동에 설치하고 3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는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등 여성단체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지방의 여성들도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반찬 수를 줄여 빚을 갚자는 뜻으로 부인감찬회(婦人減餐會)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금반지 등 패물을 팔아 빚을 갚자는 뜻으로 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婦人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국외에까지 파급되었다. 1907년 3월 일본의 대한유학생회 총회에서 금연을 결의하고 모금운동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여타의 유학생 단체들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미주에 거주하는 교민들이 조직한 공립협회에서도 국채보상의연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해외 교민단체들이 의연금을 보내왔다.

6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어떻게 방해했나?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운동이 일본을 배격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장기적으로는 국권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설치되어 당시 의연금이 수합되고 있던 곳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사가 반일적인 인사들의 소굴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대한매일신보사가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방해 공작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일제는 우선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었던 베델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베델이 을사늑약을 부인하는 내용의 고종의 친서를 런던트리뷴지에 전달하여 게재하도록 하였다고 보았다. 일제는 반일적인 보도를 하였다는 이유로 베델을 영국 사법당국에 고소하였다. 베델은 이 때문에 서울 주재 영국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 출석하여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재판 결과 베델은 금고 3주와 벌금형에 처해졌다. 베델이 비록 중형을 받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이 운동에 더 이상 힘을 보태기 어려웠다.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이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검사원이었던 양기탁도 무사할 수 없었다. 일제는 양기탁이 국채보상금으로 들어온 돈 가운데 일부를 횡령하여 사적인 용도로 유용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국채보상운동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7 국채보상운동은 어떻게 끝났나?

국채보상운동은 이렇게 일제의 방해공작 때문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러면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금된 의연금의 총액은 얼마나 되었을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 1년 3개월이 지난 1908년 4월 30일 시점에 대한매일신보사에 설치된 총합소에 모인 의연금 총액은 약 14만 3,542원이었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7월 27일 시점에 일본 헌병대가 집계한 수치는 18만 7,842원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여러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이 액수가 모금된 의연금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밖에도 여러 경로로 모여진 돈이 더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초의 목표였던 1,300만 원과 비교하면 많이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면 모여진 돈은 어디로 갔을까? 일제의 방해로 운동이 중단된 후 모금된 의연금의 처리를 위해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직되었다. 유길준이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사무소를 유길준이 세운 흥사단 회관에 두었다. 국채보상금처리회(에서)는 모금된 돈으로 토지재단을 세워 그 수익으로 교육사업을 벌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방침에 따라 1910년부터 토지매수가 시작되었는데 곧바로 국권이 피탈됨에 따라 무산되어 버렸다.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되면서 조선총독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 버렸으며 이후 이 자금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는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렇게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방해공작이었다. 복잡했던 조직 체계, 의연금 관리의 불투명성 등 기성회 내부의 문제로 인해 일제가 방해공작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했지만 온 민족이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 민족공동체 의식의 형성에 힘을 보탰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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