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독립신문 창간

독립신문 창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민간신문

1896년(고종 33) ~ 1899년(고종 36)

독립신문 창간 대표 이미지

독립신문

국립민속박물관

1 창간 배경과 동기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로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문물이 들어왔다. 당시 조선정부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나 영선사(領選使) 등을 파견하며 개화정책을 통해 서구의 발전된 문물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특히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수습하기 위해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효(朴泳孝)는 백성을 계몽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한성순보』는 1884년(고종 21) 12월 4일에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박문국이 불에 타면서 발행이 중단되지만 신문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정부는 과거 10일에서 일주일에 한 번 발간하는 『한성주보(漢城周報)』로 제호를 고쳐 1886년(고종 23) 1월 25일부터 발간을 개시하였다. 그렇지만 『한성주보』는 재정난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박문국이 통리아문(統理衙門)에 통합되면서 1888년(고종 25) 7월 폐간되었다.

이후 한동안 정부나 조선인에 의한 신문발간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일본인들이 발행한 신문들이 대거 등장했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인들에 의한 신문들은 기본적으로 재조일본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사정을 정탐하여 일본에 알려주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본인이 발행한 신문은 일본어로 작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되기도 했는데 이는 신문의 간행 목적을 잘 보여준다. 즉 이 신문들이 재조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조선인들의 여론을 일본 측에 유리하게 호도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있던 1895년(고종 32) 2월에 일본인 아다치 겐조(安達謙藏)가 창간한 『한성신보』(漢城新報)는 을미사변의 본거지로서 기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에 의한 민간신문의 등장은 시대적 필요였다. 즉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며 언론마저도 외세에 의해 장악되어 침략의 한 축을 담당했다. 1890년대 개화운동의 결과 정부에 의한 근대 신문이 발간되어 국민계몽의 가능성을 확인한 이상 이제는 민간 차원에서 신문을 통한 국권 수호와 국민 계몽은 시대적 필연이었다. 이때 우리 역사 최초의 민간 근대 신문으로서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이다.

2 『독립신문』의 발간과 서재필

『독립신문』의 발간에는 서재필(徐載弼, Philip Jaisohn)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개화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광범(徐光範)과 5촌 당숙인 그는 자연스럽게 개화사상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1년여의 일본 유학을 통해 신학문을 익힌 그는 귀국 직후 갑신정변에 가담, 역적의 처지가 되어 이후 10여 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10년 가까이 되던 1894년(고종 31) 서재필은 의대를 졸업, 의사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조선에서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진행되며 갑신정변의 가담자들에 대한 사면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졌다. 서재필 역시 1895년(고종 32) 12월 사면되어 10여 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서재필은 귀국 직후인 1896년(고종 33) 1월 갑오개혁 당시 입법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 고문으로 임명되었지만, 정치 참여보다는 신문을 통한 대중계몽에 뜻을 두었다. 서재필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갑신정변 실패가 준 교훈과 미국 망명생활에서의 경험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을 대중의 지지 결여로 보고, 개화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결국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을미사변 이후로는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도 대중의 지지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또 서재필이 망명생활을 하던 당시 미국은 신문의 발행부수와 지면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문을 통한 사회봉사와 개혁 운동이 활기차게 벌어지던 때였는데, 이러한 미국 언론계의 분위기는 서재필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결국 『독립신문』의 발간으로 이어졌다.

서재필과 더불어 『독립신문』의 제작과 발간에 크게 기여한 했던 인물은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이었다. 주시경은 1896년 4월 회계 겸 교보(校補)의 일을 맡았다가 후에는 총무 및 교보원으로 1898년 9월까지 『독립신문』의 제작에 간여하였다. 교보원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주필을 보조하는 조필(助筆)로서 직접 기사를 작성하는 등 신문사에서 상당히 비중이 있는 직위로 추정되며, 실제로 국문과 관련된 『독립신문』의 논설은 주시경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특히 『독립신문』은 순한글 신문으로 한글의 보급과 표기법에 중요한 의의가 있으며, 여기에 주시경이 참여했다는 것은 국어학 상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독립신문』의 발간 동기는 국민계몽을 통한 민지 향상 외에도 조선의 사정을 외국에 정확히 알리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이유를 사회 개량을 지도하는 것과 더불어 조선의 현장을 서양에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발간 의도는 『독립신문』의 간행문자에서도 살펴지는 바, 『독립신문』은 한자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순한글과 영문 두 가지로만 발행했다. 즉 한글만 알면 누구나 읽을 수 있으면서도, 외국인들까지도 읽을 수 있는 신문을 만든 것이다.

당시 정부 역시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이 귀국하여 신문 발간을 추진하던 당시는 갑오개혁,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인해 내각의 사퇴 및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정권을 담당한 내각에서는 시종일관 『독립신문』의 발간을 공인지원하고 있었다. 특히 아관파천 이후 성립한 박정양(朴定陽) 내각은 서재필에게 생계비 명목으로 1,400원을 지급함과 더불어 신문사 설립자금 3,000원을 보조하여 신문의 발간을 적극 후원하였다. 바로 이 자금으로 일본에서 인쇄기와 국문․영문 활자를 구입하는 한편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 건물을 임대해 주었다. 『독립신문』은 이를 사옥으로 하여 신문사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간하였다.

3 신문의 발간에서 폐간까지

이와 같은 개화에 대한 열망과 정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독립신문』은 1896년(고종 33) 4월 7일 그 역사적인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무슨 당에도 상관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 ‘정부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 ‘외국사정도 조선인민을 위하여 간간이 기록할 터’,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며 발간 취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처음 발간된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크기로 모두 4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면까지는 순한글로, 4면은 영문판이었으며, 화․목․토요일 - 주 3회 발간되었다. 그러던 것이 1897년 1월 1일을 기해 영문판의『The Independent』로 독립하였다.『The Independent』도 4면 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독립신문』 창간 당시는 독립문(獨立門), 독립공원(獨立公園), 독립관(獨立館)의 건립운동이 일어나던 때로 『독립신문』은 국민계몽과 더불어 이에 적극 호응하며 이를 선전하고 건립비용의 모금 창구로서 기능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정부의 지원이 막대했던 만큼 초기 신문의 논조는 정부의 시책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와 『독립신문』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는 없었다. 특히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만큼 외세와 관련해서는 친러반일적인 색채를 보였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에 이어 조선으로 침략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강화하고 있었고, 이에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친러 성향의 정권을 비난하고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한편 러시아를 비롯해 열강의 침략정책을 비난하는 논설을 게재함은 물론 열강에게 이권을 양도하던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벌인 서재필은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공사관 및 정부 관료들은 그를 추방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1897년 12월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독립신문』은 운영은 윤치호(尹致昊)가 담당하였다. 그는 일본, 중국, 미국을 두루 거치며 발달된 근대 문명과 서구식 민주주의를 경험한 인물로 1897년 후반 이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서재필의 도미 후 『독립신문』만이 아니라 독립협회의 회장직도 겸하였다. 특히 윤치호는 독립협회장으로서 1898년 10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자주국권 수호와 자유 민권의 확보를 통한 자강개혁을 요구하는 헌의 6조(獻議 六條)를 결의, 이를 정부에 요구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독립신문』 역시 자주적 근대화 운동의 필요를 널리 알리며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신문 외적으로도 윤치호가 주필이던 시기인 1898년 7월 1일부터는 격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이 매일 발간되는 일간지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논설과 잡보에 제목을 달기 시작하는 등 편집의 개선이 이루어 졌다.

그렇지만 독립협회 활동이 활발해지고 국민 참정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국왕 고종은 이에 불안을 느꼈다. 새롭게 구성된 보수파 내각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부정하고 공화제 설립을 기도한다고 독립협회를 모략하였다. 협회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됨에 따라 1898년 말 독립협회는 사실상 해산되었다. 윤치호 역시 1899년 1월 7일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으로 서임되어 서울을 떠나게 되자 『독립신문』은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당분간 주필을 맡다가 1899년 6월 1일부터는 영국인 엠버얼리(H. Emberley)가 이를 대신하였지만, 영문판 『The Independent』는 1898년 12월 29일자 이후부터 2면으로 축소되다가 한동안 휴간에 들어가는 등 활력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899년 7월 14일 정부는 독립신문사에 임대해 주었던 사옥의 반납을 요구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서재필에게 4,000원을 지급하여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인수하였다. 이로서 1896년(고종 33) 4월 7일 1호 이래 약 43개월 동안 발행된 『독립신문』은 한글판 776호, 영문판 442호를 발간하고 1899년 12월 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4 『독립신문』의 한계와 의의

『독립신문』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간 발행 신문이었다. 특히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과 이권 쟁탈이 가속화되던 당시 침략에 대한 대응 양상과 근대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과 활동을 살펴 볼 수 있는 창구이다. 그렇지만 서재필로 대변되는 서구 유학을 거친 소수 지식인 위주로 발간된 『독립신문』은 당시 제국의 침략을 옹호하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서구 = 문명’이라는 서구중심적 색채를 띠는 한계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을 동반자로 설정하기 보다는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는 엘리트주의적 사고와 우민관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신문』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독립신문』의 첫 번째 의의는 대중에 대한 계몽이라 하겠다. 앞서 지적했듯이 대중의 위에 서서, 대중에 대한 계몽적 입장을 취했지만 대중을 향해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또 그들에게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달함으로서 국민 의식의 전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독립신문』은 당시까지 대중이 접하기 어려웠던 국민주권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는 대중에게 새로운 정치사상을 보급하고, 민권에 대한 인식을 신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개화사상의 전파와 대중의 의식 전환은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활동의 지반이 되었다.

두 번째로는 순한글 신문으로서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 등을 실행해 한글의 보급은 물론 한글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한글의 보급은 대중의 정치참여와 의식 변화에 필수적인 것임은 물론 새로운 문화 창조의 가능성을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는 대중에게 국제 사정과 정세를 알려주어 대중의 시야를 넓힘은 물론 국민으로서의 위치를 자각시켰으며, 영문판을 함께 발행해 외국에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통로로서 기능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최초의 민간 신문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한편 언론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독립신문』의 편집 체계, 배포 방식, 발간 주기 등은 신문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후 발간되는 신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은 언론으로서 서구 열강의 침략정책과 이권 피탈과 같은 조선이 겪는 대외적 불이익과 탐관오리의 횡포와 정부 관리의 부패를 알림으로서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실제로 『독립신문』이 폐간된 이후 한글전용으로 발간된 뎨국신문, 국한문 혼용의 『황성신문(皇城新聞)』 등과 같은 다수의 민간신문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이는 『독립신문』이라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