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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근대적 민중 집회, 자주 독립·자강·자유 민권을 외치다

1898년(고종 35)

1 열강의 이권 침탈, 독립협회의 반러투쟁

19세기 말 한국에 진출한 열강은 한국의 광산, 철도, 전선, 삼림, 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고, 나아가 한국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각축을 벌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아관파천 이후 한국 정부는 구미 열강에게 각종 이권을 양여했다. 특히 러시아는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부동항과 군사 기지를 설치하려고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은 단순한 이권 침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침략 간섭 정책이었으므로 일본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일단 견제하는데 성공했으나, 새로 강화된 러시아의 침략 의도를 막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저지시켜야 할 처지에 놓였다.

1897년 2월 20일 아관파천 약 1년여 만에 고종은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환궁 직후 고종은 국정운영에 새로운 의욕을 보이며 여러 개혁 조치를 내놓았고,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정운영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새로운 국호 제정과 칭제를 추진했다. 8월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10월 고종은 스스로를 황제로 승격,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바꾸며 대외적으로 자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침략적 간섭 정책을 강화하려고 했다. 첫째, 군사 기지 설치의 제1차 작업으로 부산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영도)의 석탄고기지 조차(租借)를 요구하여 왔다. 그들은 부산·진해·마산포 일대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 군항을 건설할 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둘째, 대한 제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황실 호위를 담당하던 시위대(侍衛隊)에 러시아 사관을 파견하여 러시아의 군사 편제에 따라 편성하고 훈련시켜 러시아의 장악 하에 두려고 하였다. 셋째, 대한 제국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러시아 전 재무대신서리 알렉세이예프(Alexeiev, K.)를 한국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1897년 12월에는 반관반민의 한러은행(The Russ·Korean Bank)을 창설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세력진출에 대해 영, 미, 일이 대항하며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들 열강들도 이권 침탈에 더욱 혈안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적극적인 국정 장악의지가 대한 제국 선포로 이어지는 상황을 지켜 본 독립협회 등 민권운동 세력들은 칭제가 대외적 위신이나 자주 표방에는 일정하게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도 대내적으로 황제권 강화로 군주 독재의 정치제제가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였다. 친미계열의 양반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계몽운동단체로 출발한 독립협회는 1898년 초 반러시아운동을 시작으로 정치단체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1898년 2월 21일 독립협회 회원들은 독립관에 모여 자주 독립을 위해 고종에게 ‘구국운동선언상소’를 올리기로 하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말부터 3월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세력진출을 견제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총대위원을 뽑아 주무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을 채택했다.

먼저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하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외부(外部)에 항의 편지를 발송하였고, 한러은행 개설에 대해서도 탁지부에 철거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일본에 조차된 석탄고기지도 회수를 요구하는 공문을 외부에 보냈다. 러시아는 자신의 침략 정책이 독립협회에 의해 저항에 부닥치게 되자, 3월 7일 러시아 군사교련관과 재정고문 임용에 대한 확답을 하라는 항의 서한을 외부에 보내자, 외부대신 민종묵은 이들을 계속 임용하겠다고 회답했다. 독립협회는 이에 대해 반발하며 더욱 적극적인 반러시아 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그 중심에 만민공동회가 있었다.

2 만민공동회 개최와 전개과정 – 깨어있는 민중의 힘으로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을 외치다.

1898년 3월 10일 서울 종로의 백목전 앞에는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 한양 인구가 20만 명 전후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단순한 만 명이 아니라 온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만민(萬民)’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관리가 아닌 시전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배재학당과 경성학당의 학생들이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 결의안을 채택했다. 집회는 우려를 나타냈던 정부 측뿐만 아니라 주한 외교관들까지 감탄할 정도로 매우 질서 정연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이 집회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대회 혹은 정치 집회로 평가되는 제1차 만민공동회였다. 이 자리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현덕호는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침탈 의도를 질타하고, 이에 대해 고종과 정부는 적극 대항할 것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고종도 만민공동회에서 드러난 민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 신민(臣民)의 공의(公議)가 이러하다.”라며 러시아공사에게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임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러시아 공사 측도 한국민의 여론을 받아들여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하고 절영도 조차를 철회했으며, 한러은행도 폐쇄했다. 정부가 외세에 끌려 다니며 이권을 빼앗기고 있던 상황에서 민중 스스로 자주와 독립을 쟁취한 쾌거였다.

제1차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도로 반러투쟁에 집중되었으나, 만민공동회에서 보여준 민중들의 힘은 독립협회의 투쟁방향을 전환시켰다. 이제 민중의 각성과 민권의식 고양을 바탕으로 국내 문제에 관심을 돌려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 수호, 연좌법 부활 저지, 언론과 집회 보장, 탐관 및 수구파 관료의 규탄 내지 축출 등 민권 보장 및 참정권 획득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끌어낸 만민공동회는 명실상부하게 민중 스스로 집회를 개최하고 연단에 나아가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1898년 4월 이후 거의 날마다 열린 만민공동회는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개최되었고, 윤치호 등 독립협회 회원들이 불참한 상태에서도 자발적으로 집회가 이루어졌다. 이때 다루어지는 안건마다 그를 담당하는 총대위원이나 대표위원을 직접 뽑아 회의 결의사항을 집행하는 직접 대표제와 같은 민주적 운영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만민공동회는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배제하며 독자적인 시민단체로 변화하였다.

1898년 4월 30일 숭례문 앞에서 열린 서재필 재류를 요청하는 만민공동회 , 6월 20일 종로에서 열린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을 비판하는 만민공동회 , 7월 1일과 2일 종로에서 열린 독일 등 외국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 7월 16일 종로에서 열린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의 배상금 요구를 반대하고 경부 철도 부설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등은 독립협회와는 직접 관련 없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민중 대회였다.

이러한 민중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정치참여에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과 수구파 관료들은 도리어 의정부 관제를 개정하고 황제의 군대 통솔권을 명문화하는 등 황제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대해 독립협회는 7월초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인재의 공평한 등용, 민의의 광범위한 수렴 등을 요구하는 동시에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대신들의 교체를 주장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위기의식을 느낀 수구파들은 독립협회를 탄압, 해산시키는 강경책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독립협회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가 선호하는 개혁성향을 띤 박정양, 민영환 등을 요직에 임명하여 개혁 내각이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박정양 등으로 구성된 개혁 내각은 독립협회와 함께 내정 개혁과 의회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 6일간 종로에서 대규모로 개최된 ‘관민공동회’는 그동안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이 정점에 이르는 계기였다. 독립협회는 중추원관제 개정안을 정부에 제출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10월 28일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수천 명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회장 윤치호는 황제권을 인정하면서 정부와 협력해 점진적으로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 날은 정부 관료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10월 29일 전·현임 정부 관료와 각종 단체를 비롯해 학생, 시민이 합석한 가운데 사상 초유의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정부 대표인 박정양의 인사말에 이어 연단에 등장한 백정 박성춘은 “이놈은 바로 대한(大韓)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식”하지만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천막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감격에 겨워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 회원들은 총 11개 조목에 달하는 결의안을 만든 뒤, 먼저 황제에게 바치는 ‘헌의6조’를 채택했다. 박정양, 민영환, 한규설을 비롯한 정부 대신들은 모두 헌의6조에 찬성했다. 한규설의 말대로 “오늘 관민이 협의하는 것은 나라를 세운 지 5백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정양은 관민공동회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헌의6조를 재가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도 이를 재가하고 중추원장정 개정 등 독립협회 요구에 부합하는 조칙 5조를 반포함으로써 관민공동회의 결정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고종이 중추원 개편안을 재가한 11월 2일 관민공동회는 해산했다.

1898년 10월 12일 박정양 내각 출범 이후 11월 2일 관민공동회 해산까지 정부 내 박정양, 민영환 등과 독립협회의 윤치호, 이상재 등은 고종, 수구파의 반발과 독립협회 내 급진파의 과격한 요구를 견제하면서 중추원을 활용해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의회설립운동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수구파는 독립협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이에 대한 탄압책을 강구하여 급기야 ‘박정양 대통령 추대설’을 날조했다. 이를 빌미로 고종은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한 다음, 협회라는 것은 모두 혁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상재 등의 체포소식을 들은 민중은 분통을 터트렸고, 11월 5일 경무청 앞에서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구속인사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다. 순경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모여들었고, 다투어 의연금이나 음식을 내놓았다. 종로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았고 심지어 발포명령을 받은 군인들도 민중에게 총을 쏠 수 없다며 달아나 버릴 정도였다.

조병식 내각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고종은 한규설을 법부대신을 임명해 구속자 전원을 석방하는 등 만민공동회의 요구에 응했다. 하지만 이미 정부 대책에 여러 번 속은 민중들은 해산하기를 거부하고 종로로 장소를 옮겨가며 집회를 확대시켜 갔다. 그러자 고종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재인가 해주고, 11월 21일 홍종우 등의 지휘 아래 있는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그러나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은 오히려 민중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촉발시켜 전국에서 만민공동회 지지하는 성원이 답지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고종은 조병식 등의 수구파 대신을 경질하고 민영환, 박정양을 등용하며 독립협회 복설을 명하는 등 민심 수습에 나섰다. 11월 26일 다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자 고종은 경운궁의 돈례문으로 나가 각국 공사를 증인으로 삼아 독립협회 복설, 헌의6조 실시, 조병식 등 ‘8역’처벌 등 5개 조항의 만민공동회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만민공동회는 해산했다. 그러나 고종은 약속을 어기고 만민공동회의 기대를 저버리는 조치를 잇달아 취했다.

12월 6일 민중들은 또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대정부 공세를 강화했다. 만민공동회가 점차 투석꾼 고용, 박영효 소환운동 등 과격한 활동을 벌여나가자 주한 외국공사들의 경계심과 일부 시민들의 반발을 사기 시작했다. 마침내 고종은 12월 23일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그 지도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했으며, 25일에는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독립협회는 해체되었으며, 박정양, 민영환 등 개혁성향의 관료들도 정부 내에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어 점차 관직에서 배제되었다. 만민공동회가 추진했던 근대적 개혁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3 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의의

만민공동회 운동이 전개되었던 1898년 당시 한국은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개항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위정자들의 무능, 부패로 여러 차례 국망의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대외적으로 자주독립을 보전하고 대내적으로 근대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민중의 자발적이고 각성된 모습과 저력을 보여준 최초의 근대적 민중집회인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는 시대적 과제에 부합한 자주 독립과 자유 민권을 추진한 획기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이었다.

먼저 만민공동회는 대한 제국의 군사, 재정권을 장악하고 각종 이권을 획득하려는 러시아를 막아냈고, 다른 열강들의 이권 침탈과 간섭에 대해서도 일단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 자유 민권사상을 민중들에게 보급시키는데도 기여했다. 특히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학생, 지식인 중에는 전통적 위정척사사상에서 벗어나 근대적 자유 민권, 자주, 자강 사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독립협회 지도자 및 민중 대다수는 여전히 황제를 국권과 근대화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인식하고, 황제를 중심으로 근대적 제도개혁을 염원했다. 그러나 고종과 수구파는 민의의 수렴과 동의를 통해 권력을 행사해야 황제권도 강화될 수 있다는 주장마저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만민공동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899년 고종은 ‘대한국국제’를 반포하여 황제가 입법, 행정, 사법권은 물론 군통수권까지 장악하는 전제군주제로 나아갔다. 민의를 수렴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한 고종은 자신의 황제권뿐만 아니라 국권마저 일본에 강탈당하고 말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잘못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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