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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실질적으로 일본이 경영하다

1932년

만주국 대표 이미지

만주국 선전 포스터

Chapman University Digital Commons

1 개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3월 마지막 청 황제 푸이를 집정(국가원수)으로 하는 만주국을 세웠다. 1934년 제정(帝政) 시행으로 만주국은 만주제국이 되었고, 푸이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만주국은 현재 중국의 랴오둥, 지린, 헤이룽장의 동북 3성과 내몽골에 걸치며 면적은 약 130만km²이었다. 그리고 만인(滿人)만주국 거주의 만주인, 한인, 몽골인 등을 가리킨다.의 독립 국가인 동시에 건국 당시부터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다민족 국가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 경영은 관동군과 남만주철도 등을 통해 일본이 담당하였다. 일본인 관리가 많고 교육도 일본어로 이루어졌으며 신사 숭배가 강요되는 등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가였고,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멸망하였다. 그런 측면을 강조해 중국에서는 위만주국(僞滿洲國)이라고 부른다.

2 만주국의 건국

러일전쟁 이래 일본은 남만주철도를 중심으로 만주지역에 대한 권익을 확대하였다. 1920년대 만주지역은 일본의 자본 투자처, 상품시장, 중공업 원료 공급지 등으로 기능하였으며 그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그것을 반증하듯 1928년 6월 관동군은 펑톈에서 군벌 장쭤린(張作霖)이 타고 있던 열차를 폭파하였다. 군벌을 통한 간접 통치에 한계가 있으므로, 괴뢰정권을 세워 간접 통치를 하기로 계획하고 장애가 되는 장쭤린을 배제한 것이다.

당시 관동군은 만주와 몽골, 즉 만·몽 지역을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강조하며 ‘만몽 영유 계획’을 입안하였다. 특히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는 1931년 5월 ‘만몽 문제 사견(満蒙問題私見)’을 집필하고, 만·몽의 가치를 설명하며 만·몽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및 시기 등을 서술하였다. 그는 만·몽을 국방의 전략 거점인 동시에 경제 요지라고 평가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함으로써 만·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목할 것은 만·몽 문제의 해결을 통해 조선 통치를 안정시키는 한편 중국의 통일을 지도하여 동양의 평화를 확보할 수 있다고 한 점이다. 만주지역 침략을 매개로 조선과 중국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지배를 목표로 한 것이다.

1931년 6월 육군성과 참모본부는 구체적으로 만주지역 점령을 논의하고, 동년 9월 류탸오후 사건을 이용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다만 육군 수뇌부의 의견에 따라 만·몽 영유 계획을 만·몽 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바꾸었다. 만주지역을 일본의 직할령으로 하는 대신에 괴뢰국가를 세워 지배하는 것으로 변경한 것이다. 1932년 1월 일본 정부도 만주국 건설을 용인하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일본은 만주지역의 주요 도시를 대부분 점령하고, 괴뢰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였다. 먼저 만주지역의 유력자들에게 독립적인 지방 정권을 만들도록 하고, 1932년 2월에는 동북최고행정위원회를 발족시켜 만주지역의 독립을 선언토록 하였다. 그리고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지역으로 데려와 옹립하였다. 일본은 만주인의 반한(反漢) 의식을 이용하는 한편, 만주국이 만인의 의지에 따라 건국된 것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1932년 3월 만주국이 세워지고 푸이가 국가원수인 집정(執政)에 취임했으며, 창춘(長春)은 수도 신징(新京)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동년 9월 국제연맹에서 파견한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가 공표되기도 전에 일본은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그에 대해 중국은 만주지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것이라며 항의했고, 유럽 국가들은 국제연맹을 무시한 일본의 승인을 비판하였다. 국제연맹에 속한 국가들 대부분이 만주지역을 법적으로 중국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만주국을 공식 인정하는 국가는 드물었다. 그래서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3 만주국 경영의 실상

만주국 성립 이후 집정과 관동군사령관 사이에 비밀문서가 교환되었다. 그에 근거해 만주국은 국방과 치안 유지, 철도·항만·수로·항공로 등의 부설 및 관리를 일본에 위탁하고, 정부 요직에 일본인 관리를 임용하며 그 임면권을 관동군 사령관에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1932년 9월 만주국은 일본과 협정을 체결하고, 종래 일본이 가진 권리와 이익을 모두 인정하는 동시에 양국의 공동 방위를 위해 일본군을 만주국에 주둔시켰다. 한편 당시 일본군은 만주국에 대한 저항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군해, 이듬해 1933년 3월 러허성(熱河省)을 만주국의 영역으로 편입하였다. 일본군이 만주국의 권익을 내몽골과 화북 지역으로 확대하고, 만주국을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같은 해 8월 일본 정부는 만주국을 ‘대일본제국과 불가분 관계의 독립 국가’로 위치지었다.

1934년 만주국은 제정(帝政)을 시행하였고, 헌법을 대신해 정부조직법(6장 39조)을 제정해 입법·행정·사법·감찰 4권의 분립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실제 의회가 설치되지 않아 행정권이 강하였다. 중앙행정기관으로 국무원이 설치되고, 그 수반인 국무총리 휘하 총무청과 7부 3국(1932년 당시)이 운영되었으며, 국무원회의가 국정 전반을 심의하였다. 주목할 것은 총무청이 인사·예산 등을 비롯해 각부의 사무를 총괄하는 등 국무원 내에서 총무청이 가장 중요하였고, 실세의 총무청 장관에 일본인이 임명된 점이다. 또 총무청 장관을 포함해 국무원의 일본인 관리는 관동군 사령관이 임명하였다. 관동군의 지휘에 따라 일본인이 만주국 정부의 요직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집정(제정 시행 이후 황제)의 자문기관 참의부가 설치되었다.

만주국의 일본인 관리 중에는 일본 관청이나 남만주철도에서 선발된 이가 많았다. 그 예로 초대 총무청 장관 고마이 도쿠조(駒井德三)는 원래 남만주철도 출신으로 1932년 관동군 특무부장에 임명되고, 이어서 국무원의 총무청 장관에 취임하였다. 푸이의 자서전에 따르면 “고마이는 군부와 재벌에 의해 식민지의 총지배인으로 선택되었고, 실제 총리였다. 그에게 최고 상사는 관동군 사령관으로 만주국 집정이 아니었다.” 즉 만주국 경영의 실권은 관동군을 내세운 일본에 있었다. 실제 고마이의 기록에 따르면 “관동군에 내면지도과(內面指導課) 즉 제4과가 설치되고, 만주국 총무장관 및 각부 차장을 지휘해 만주국을 통치하면서 만주국 황제는 완전히 로봇이 되었다. 총무장관과 각부 차장은 만주국 관리이지만, 실제 관동군의 고용인이었다.”

만주국은 만인의 국가인 동시에 만주·한(漢)·몽골·일본·조선의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楽土)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32년 7월에는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민 일체의 조직을 만들고 건국 정신의 고양, 민족 협화의 실현, 국민 생활의 향상, 국민 동원의 완성 등을 강조하였다. 실질적으로 관동군과 일본인 관리의 지도에 따라 국민 교화 단체를 만든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이 다민족 국가인 만주국을 통치하기 위해 민족 협화를 강조한 것으로, 그 배경에 일본인과 조선인의 만주국 이민이 있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세계 대공황을 배경으로 농업 공황이 발생하였고, 특히 1930년대 전반 도호쿠(東北) 지방을 중심으로 냉해와 흉작 그리고 해일 등이 이어져 농촌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관동군은 일본 국내의 농촌 대책인 동시에 만주국의 국방 및 치안 대책으로 농업 이민을 실행하였고, 일본 정부도 1937년부터 적극적으로 만주국 이민을 장려하였다.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인을 만주국으로 이주시켜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조선에서 농촌 곤궁과 소작 쟁의의 원인은 인구가 급증해 1호당 경지 면적이 감소한 것이므로, 만주의 자원을 개발하고 조선을 이상적인 농업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과잉 농가를 만주국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구가 조밀한 조선 남부의 농민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인이 일본으로 도항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그러한 정책의 결과 만주국 인구가 1932년 약 3천만 명에서 1942년 약 4천4백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그 중 일본인과 조선인의 비율은 1930대 후반 급증해 일본인은 0.1%에서 2.5%, 조선인은 1.6%에서 3.5%로 늘어났다.

4 경제건설 계획과 전시경제 체제

일본이 만주지역에 괴뢰 국가의 수립을 계획하던 1931년 12월, 관동군참모부 제3과(이후 특무부)가 ‘만몽개발방책안’을 작성하였다. 이듬해 1932년 1월에는 관동군이 남만주철도에게 만철경제조사회를 설립하고 만주 경제의 각 분야에 관한 계획을 전면적으로 작성하도록 하였다. 바로 ‘만주경제건설 제1기 종합계획’(1932~1936년)이다. 그에 기초해 1933년 3월 만주국 정부가 ‘만주경제건설요강’을 발표하고 경제 건설의 기본방침을 밝혔으며, 만철경제조사회는 30항목 118건의 입안 계획을 작성하였다.

경제 건설의 핵심은 철, 석탄, 마그네사이트 등의 개발을 비롯해 군수 산업의 육성이었다. 관동군이 고도의 국가 통제와 재벌 관여 금지를 강조하면서 만주국은 일업일사주의(一業一社主義)의 원칙에 따라 회사를 설립해 경제 계획을 실천하였다. 즉 특별법에 근거해 정부의 감독을 받는 한편 독점권을 갖는 특수회사로서 만주중앙은행, 만주항공, 만주전신전화, 만주석유, 만주탄광, 만주채금 등이 세워졌다.한편 특별법에 근거하지 않는 회사를 준특수회사(準特殊會社)라고 한다. 그리고 1936년 특수회사 및 준특수회사의 자본 구성을 살펴보면 만주국 1, 남만주철도 1, 기타 1 등으로 남만주철도가 자금 조달에서 중요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은 세계 대공황과 함께 열강의 블록 경제로 인해 국제 수지가 악화하는 상황에서 군수 경기를 통해 불황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식민지와 만주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 무역을 하며 이른바 엔화 블록을 형성하려 했다. 특히 만주국에서는 각 성(省)의 관립 은행 등이 각각 은행권을 발행하고 있어서 화폐 제도의 통일이 급선무였는데, 일본은 관립 은행 등을 접수해 만주중앙은행을 설립한 후 1934년 6월 은본위제를 정지하고 만주국 원화(圓貨)의 가치를 엔화와 연동시켰다. 이렇게 만주국을 경제권으로 편입함으로써 일본은 공황 이전의 GDP 수준을 회복하였다. 주목할 것은 만주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미쓰이 재벌과 미쓰비시 재벌이 각각 1000만 엔을 융자한 점이다. 만주국의 건국과 경영에 관동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것은 일본 정부와 군 수뇌부가 허용한 것인 동시에 일본 독점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다.

일본은 아시아 지역을 대상으로 엔화 블록을 확립하며, 국내에서 중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만주국 등에서도 일본 자본의 주도로 합작회사가 설립되고 군수공업을 우선시하는 경제 개발이 이루어졌다. 애초에 관동군은 만주국에서 일본 재벌의 자본 진출을 배제하려 했지만 공업의 발전을 위해 민간 자본을 유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1934년 6월 만주국 정부는 ‘일반 기업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경제적으로 광범위하게 민간의 진출을 환영하였다.

1937년부터 만주국은 제2기 경제 건설을 시행하였다.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요강’에 기초해 광공업, 농축산업, 교통통신업, 이민 등 4개 부분에 중점을 두고 생산력 확충을 도모하였다.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해 경제 기초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산업주식회사(일명 닛산 콘체른)를 만주국으로 이전시켜 반관반민의 만주중공업개발회사로 재편하고, 남만주철도를 대신해 만주국의 산업 개발을 독점하도록 했다. 그 영향으로 일본이 전시경제 체제로 이행하며 중일전쟁이 시작될 즈음, 일본 국내에서 경공업보다 중공업 비중이 높아졌다. 1940년에는 광공업 생산과 국민소득이 대공황 이전보다 2배 이상에 이르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영국과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연합군 진영보다 전쟁 국면에서 우위에 있던 1942년 여름까지도 경기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전시의 통제경제에서 생활물자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중일전쟁 이후 만주국은 주로 소련과 대립하는 관동군의 후방 지원 역할을 하였고 중국과는 직접 교전하지 않았는데, 1938년 7월 만주국 동부의 장고봉(張鼓峰)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충돌하였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기계화 부대에 밀려 고전하였고, 8월에 정전 협정을 맺었다. 이듬해 1939년 5월에는 만주국과 몽골 국경에 위치하는 할하강 동쪽, 일명 노몬한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다시 충돌하였다. 당시 소련군도 크게 피해를 입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군이 패배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남진에 주력하고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다.

태평양전쟁 시기 만주국은 식량과 광공업 원료의 생산 확대에 내몰리며 점차 수탈을 강화하였다. 그것을 주도한 세력이 만주국협화회였다. 아울러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관동군도 1943년 이후 병력을 남방과 일본으로 보내면서 점차 약체화하였다. 마침내 1945년 8월 소련군이 참전하여 만주국을 침공하고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만주국 황제도 퇴위를 선언하고 만주국도 함께 무너졌다. 이후 소련군의 포로가 된 푸이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검찰 측의 증인으로 출석해 ‘일본군의 협박’으로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고 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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