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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1920년 ~ 1932년

물산장려운동 대표 이미지

조선물산장려회보 1권 8호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물산장려운동의 전개과정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 등 70여 명이 조선물산장려회를 발기하고, 조선 물산장려운동을 펼칠 것을 제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조선이 빈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자기 나라에서 만든 물건으로 살아가는 자작자급(自作自給)을 하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득이한 물품 이외에는 철저히 자작자급을 실행하고, 한걸음 나아가 상공업에 착수하여 직접으로 실업계의 진흥을 꾀하고 간접으로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기한다는 취지를 내걸었다. 그런 가운데 『동아일보』는 1922년 1월에 “조선 민중이 힘을 갱신하여 이상을 달성하는 제일의 방법은 부력(富力)의 증진”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조선인은 조선인 상점에서 매(買 : 구매)하며 조선인 상인을 통하여 매(賣 : 판매)하고, 조선인의 제작품을 사용하며 조선인의 편익을 도모하고, 이와 같이 하여 경제적 자립을 기하되 근면하며 검소하며 저축하며 협동하고 일면으로 경제적 지식을 수득(修得 : 기술이나 이론을 닦아 체득함)하는 동시에 타면에는 과학적 경영방법을 채용하라.”고 제기하였다. 즉, 자급자작운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주장한 것이다.

1922년 4월 6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는 조선인은 산업발달에 대한 기본권을 보유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그 실행사항으로서 ‘조선인은 근면 노력하여 산업상 기술과 지식을 수득(修得)하여 산업적 권리의 확충을 기할 것, 조선인은 생산과 소비를 일치단결하기 위하여 소비조합․생산조합․소작인 조합의 조직 발달을 기할 것, 조선인은 조선인의 제조품을 사용하며 조선인의 상가(商賈)를 통하여 매매할 것’ 등을 의결하였다. 한편,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1922년 5월 16일 다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고, 6월 20일에 창립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물산장려운동은 아직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이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1922년 10월 경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일본 대장성(大蔵省)이 1923년 4월부터 일본과 조선 간의 관세를 철폐할 것을 협의하여 곧 일본의회에 상정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이에 따라 “전일에 있어서는 과(過)히 중대시되지 않았던 소위 경제문제가 금일 신문․잡지상에 논의하게 되며, 촌항(村巷 : 시골의 후미지고 으슥한 길거리)과 도시를 막론하고 물질적 세력을 배양할 필요가 있다고 운운하게 되었다” 고 할 정도로 당시 각 신문․잡지에는 본격적으로 자작자급운동을 호소하는 글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 측에서도 1922년 12월 1일 ‘조선 사람은 조선 것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먹고 입고 쓰자’는 것을 간명한 내용으로 응모해 달라며 조선물산장려의 표어를 현상 모집하였다. 12월 25일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불매원물(不買遠物 : 먼 곳의 물건을 사지 않고) 유토물애(惟土物愛 : 오로지 땅에서 나는 것을 사랑하라)’ 등 7가지 표어를 당선작으로 발표하여 물산장려운동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이와 같이 ‘물산장려’․‘자작자급’의 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서울에서 처음 물산장려운동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22년 12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廉台振) 등 50여명이 결성한 자작회(自作會)였다. 자작회는 조선 물산을 장려하여 자작자급의 정신을 키우고 산업의 진흥을 도모하여 경제적 위기를 구제한다는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운동의 방책으로 내놓은 것은 ‘조선인은 일치하여 조선품만 쓰고 수입품은 쓰지 말 것, 조선인의 소용품(所用品)을 급히 조선인의 손으로 제조하도록 할 것, 조선인은 일치하여 토지를 전당하거나 매도하지 말고 매입하기를 힘쓸 것’ 등이었다.

이처럼 물산장려운동이 지방과 학생층으로부터 시작되자 이에 자극받은 서울의 일부 지식인들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1923년 1월 9일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회가 구성되었다. 이 자리에서 위원 10명으로 유진태(兪鎭泰), 정로식(鄭魯湜), 김윤수(金潤秀), 이종린(李鍾麟), 오현옥(吳鉉玉), 이득연(李得秊), 고용환(高龍煥), 나경석(羅景錫), 백관수(白寬洙), 김혁(金赫)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20일과 23일에 발기총회와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 의해 물산장려운동은 비록 일시적 이나마 조선 물산의 소비를 크게 자극하였다.

그런데 이로 인해 가장 큰 호황을 누린 부문은 직물부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인 직물업 생산업자들은 이 호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사(自社)의 상품을 선전하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경성방직은 신문과 잡지에 ‘조선을 사랑하시는 동포는 옷감부터 조선산을 쓰십시다.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자본과 기술로 된 광목은 삼성표 삼각산표 광목’이라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 자본의 직물업은 극히 취약하였다. 따라서 조선인 대중들이 모두 조선 물산만 사용하겠다고 나선다 하여도 그 수요를 감당할 만한 생산능력은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일시적인 수요폭발은 조선인 공장에서 생산된 직물의 시장가격만 올려놓았고, 그로 인한 이득은 대부분 상인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물산장려회에서는 이러한 상인들의 농간을 막기 위해 소비조합 결성을 추진하였으나 호응이 없어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전개되던 물산장려운동은 그나마 불과 반년 남짓 지난 1923년 여름 이후 한 언론에서 “과거 1년간의 우리민족의 최대운동이라 할 만한 것은 조선물산장려회다. 지금도 어딘지 모르나 경성 시가의 일우에 분명히 조선물산장려회의 간판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그 열기가 시들해지고 말았다.

2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

물산장려운동 침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인한 일본 자본과의 경쟁력 부족, 운동의 조직력이 취약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침체 요인은 물산장려운동이 지니고 있었던 성격의 한계와 이견의 대립 등이었다.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직후부터 물산장려운동의 유효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 논쟁의 쟁점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쟁점은 물산장려운동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성태(李星泰)는 물산장려운동을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이 운동을 ‘조선의 소수 자본가․중산계급의 수중으로 일체의 경제적․정치적 권리를 탈취하야 그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즉, 물산장려운동은 ‘유산계급의 이익확대를 위하여 마련된 무산자 약탈’이라는 것이며, 이 운동으로 조선의 산업이 다소라도 발달했다 하더라도, 조선인 자본가에게 그 이윤 전부를 빼앗겨 무산대중의 입장에서 일본인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공민(羅公民)은 물산장려운동이 유산계급의 운동이 아니라 중산계급과 무산자의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원래 물산장려 즉 조선 물산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자는 운동을 공평한 태도로 비판하면, 조선의 유산계급이 일본 부자의 조선 착취를 탈환하려 하여 선동한 것도 아니요 조선의 무산대중이 차(此)를 희망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몰락이 급극(急劇 : 급하고 격렬함)하여 참형(慘刑)이 박두한 중산자와 계급의식이 분명치 못한 무산․유식자가 합동하여 조선의 경제적 위기의 함정에 입(立)하여 최후의 절규를 시(試)한 것이다.”라 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의 주도계층이 유산자가 아니고 그들과는 전혀 무관하며 오히려 몰락한 중산계급과 일반 무산대중의 결속에서 형성된 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쟁점은 ‘민족자본’의 형성 가능성에 대한 문제이었다. 나공민은 물산장려운동은 무산대중을 더 한층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진작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 이익이 민중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물산을 장려한다고 해서 자산가에 의해 생산된 물품을 무산자가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무산자 자신이 생산한 가내수공업적 생산품을 무산자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력갱생운동의 의미가 있으며, 농촌에서 부업으로 생산하는 산품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농민들의 소득을 높여줄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 사회주의 진영에서 물산장려운동이 몇몇 특정 조선인 유산자들의 공장상품을 민중이 애용하도록 운동함으로써 생산품의 값이 뛰어올라서 궁극적으로 민중을 수탈하게 된다는 비판에 대해 “조선의 토산품이라 하면 아직도 그 대부분이 농가의 부업으로 생산할 만한 것이다. 또 물산장려라 함이 현재 소유한 외래품을 소각 파멸하고 조선산품을 전용하자 함이 아니라, 기왕 있는 것을 소비하여 가면서 의식적으로 조선산품들을 점차 사용하자 함이니 가령 조선인 산품이 수요 격증에 의하여 가격이 등귀하게 되면 무산자는 염가의 외래품을 사용하고 고가되는 조선산품을 생산 안함이 가하지 아니한가.”라고 반박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주종건(朱鍾建)과 장적파(張赤波)는 이미 농촌은 가내수공업을 더 이상 지탱할 위치에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대부분이 일본의 자본가의 침탈과 조선의 유산자에 의해서 행해지는 공장물품에 압도당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의 존립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윤영남(尹嶺南)은 물산장려운동이 소비운동의 양상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물가상승만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세 번째의 쟁점은 물산장려운동이 무산자의 계급의식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서 야기되었다. 이에 대해 나공민은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이 살기 위한 반제운동의 첫 단계이며 사회주의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물산장려운동은 점차로 유산자와 무산자를 하나로 결집시켜서 민족적 대동단결을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무산자들의 의식까지도 구체적으로 높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무산자가 단결하라고 말하나 무산자가 살아 있어야 단결을 하지 사체(死體)로서 공동묘지에서 단결함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물산장려운동은 모든 조선인들의 살아남기 위한 운동이며, 따라서 그것은 성공여부와는 관계없는 당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의 측면에서도 생산력 증대로 혁명의 조건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경제적 어려움을 근거로 물산장려운동의 불가피성을 피력하였다. 이순탁(李順鐸) 역시 혁명의 전제조건인 생산력의 제고를 위해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주종건은 ‘식민지하에서는 물산장려운동이 불가능하다. 일반소비자에게 경제적 불편을 강요하는 것이며, 생산성이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 오히려 노동조건의 악화만을 가져온다.’라고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생산력이 일정한 수준까지 발전하기 전에는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나공민의 주장에 대해, “새로운 사회의 출현에 필요한 물질적 생산력은 스스로 발달하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 생산력이 발달된다고 반드시 다 사회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출현은 계급투쟁에 의해 건설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성태도 무산계급의 이름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사회주의 혁명만이 진정한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이 일부 지식인들과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 상호간에 벌어졌다. 이는 당시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이었으며, 또한 그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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