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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립대학설립운동

우리 힘으로 조선인만의 대학을 만들자

미상

1 한말에 시작된 모금운동의 전통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920년대 초 조선인의 손으로 직접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개한 모금운동이다. 민립대학 설립이라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런데 이 운동의 원형적 체험은 이로부터 15년 전에 있었다. 1907년 거족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나라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다. 민립대학설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거족적인 모금이라는 외형적인 양상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모금된 의연금의 처리 과정에서 대학 설립이라는 아이디어가 처음 떠올랐던 것이다.

일제의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이 중단된 후 모금된 의연금의 처리를 위해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직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이 회장에 선임되었는데 모금된 돈으로 토지재단을 세워 그 수익으로 교육사업을 벌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 방침에 따라 토지매입을 시작하였지만 곧바로 국권이 피탈됨에 따라 무산되어 버렸다.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되면서 최종적으로 조선총독부의 통제 하에 들어가 버렸으며 이후 이 자금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교육사업이라고 포괄적으로만 표현하였지만 실제로는 대학설립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마저 일제의 침략으로 무산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2 3·1 운동으로 대학 설립의 길이 열리다

1910년대 조선에는 대학이 없었다. 대학을 설립할 수 있는 길이 아예 차단되어 있었다.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이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대학교육에 관한 규정이 전혀 없었다. 조선교육령은 ‘시세와 민도에 적합한 교육’(제3조)이란 명분으로 보통교육, 실업교육, 전문교육만을 포함하고 있을 뿐 고등교육 영역은 아예 배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고등교육기관은 성균관처럼 폐쇄되거나 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처럼 수준이 격하되었다. 따라서 조선인 가운데 고등교육을 원하는 자는 국외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차별적 학제 때문에 매우 불편하였다.

기독교계 사학들은 1910년 무렵이면 이미 숭실학당 대학부나 이화학당 대학과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학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들 학교들도 학제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17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대학이 아니라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1910년대 조선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3·1 운동으로 인해 고등교육을 향한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였다. 교육에 대해서도 이른바 준거주의란 것을 표방하였다.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1922년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었다. 이 개정 교육령은 제12조에 ‘대학교육은 대학령에 의한다’고 규정하였다.

대학에 관한 규정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에서도 대학을 설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제는 이러한 연장선에서 경성제국대학 설립도 추진하였다. 1923년에 대학창설준비위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에는 경성제국대학관제를 공포하였다. 같은 해 예과를 개설하였으며 1926년에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개설하여 정식으로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화학당과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들도 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조선에도 비로소 대학을 향한 문호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3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라

1920년대에 들어 조선인 사이에 교육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각급 학교의 입시경쟁이 치열해졌다. 조선인들은 총독부 당국에 학교를 증설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직접 학교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 이러한 현상을 ‘교육열’이라고 불렀다.

교육문제와 관련한 사회 단체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 6월에 결성된 조선교육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단체는 한규설(韓圭卨), 이상재(李商在), 윤치소(尹致昭), 최규동(崔奎東), 유성준(兪星濬), 최두선(崔斗善) 등 91명이 조직하였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로 이름을 바꾸어 인가를 받았다.

지방에도 교육단체가 만들어졌다. 1921년 청주에서는 충북교육진전기성회가 만들어졌으며 부산에서도 유지 100여 명이 모여 조선교육개선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교육단체들은 주로 조선인의 요구를 결집하여 총독부 당국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당시 이를 한 마디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인들은 총독부 당국에게 조선인 교육에 보다 적극적인 투자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을 조선인에게도 제공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 즉 동화교육에는 반대하였다. ‘동등’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교육 그것이 바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이었다.

‘조선인 본위의 교육’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쟁점이 바로 일선공학(日鮮共學) 문제였다. 일선공학이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뜻한다. 차별철폐를 가장 적극적으로 적용한 것이 바로 일선공학이었다. 당시 조선의 교육단체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일선공학에 반대하였다. 그것은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을 한 학교에서 경쟁하도록 하면 입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인 학생이 불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차별은 철폐되어야 하지만 민족적 구별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대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였다. 조선총독부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은 일선공학의 학교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인 학생보다 일본인 학생의 수가 더 많았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조선에 위치하고 있지만 조선인을 위한 대학이 아니라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을 위한 대학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인에게는 조선인만을 위한 대학이 따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교육회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민립대학 설립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4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조직과 활동

조선교육회는 1920년 9월 26일 회의를 열고 일본정부에 보내는 진정서와 함께 민립대학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조선인 사회에서는 민립대학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1922년 2월 3일에는 『동아일보』에서 사설을 통해 민립대학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 조선청년연합회 제3회 총회에서 민립대학 설립이 결의 사항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었다. 이렇게 1920년대 들어 민립대학 설립문제가 조선인 사회의 새로운 어젠더로 떠올랐다.

1922년 11월 23일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이상재, 이승훈(李昇薰), 윤치호(尹致昊),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 최규동 등이 참여하였다. 준비회에서는 각군마다 2~5명의 발기인을 선발하기로 하고 자격과 선정방법은 각 군에 일임하였다. 발기인의 선정은 1922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923년 5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되었다. 1923년 3월 발기인이 1,000명을 돌파하자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기성회는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1차년도에는 400만 원을 모금하여 대지 5만 평을 구입, 교실 10동과 대강당 1동을 건축하여 법과, 경제과, 문과, 이과 등 4개의 단과대학과 함께 예과를 설치한다. 2차 연도에는 300만 원을 모금하여 공과를 증설하고 이과와 기타 학과의 충실을 기한다. 3차 연도에는 300만 원을 모금하여 의과와 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기성회는 경성에 중앙부를 두고 각 부와 군에 지방부를 두기로 하였다. 중앙부와 지방부에는 각기 집행위원과 감사위원을 두는 등 조직을 이원화하였다. 원래 모금된 돈은 명단과 액수를 중앙부에 올려 보내 한일은행 등 각 은행에 예치하기로 하였지만 지방에 금융공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지방부가 각기 지방금융기관에 예치하고 액수만 중앙부에 보고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1923년 4월 2일에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위원장에 이상재, 상무위원에 한용운(韓龍雲), 강인택(姜仁澤,서무), 유성준, 한인봉(韓仁鳳,회계), 이승훈(사교), 유진태(兪鎭泰), 고용환(高龍煥), 홍성설(洪性偰) 등 9명을 선출하였다. 이후 중앙부에서는 지방순회 선전위원을 각도별로 파견하여 강연회 등의 방법으로 모금의 취지를 널리 알렸다. 각 부와 군에서는 지방부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미국 하와이와 중국 봉천(奉天) 등 국외에도 지방부가 설치되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에는 지방부의 설립에 관한 보도가 연일 줄을 이었다.

이렇게 민립대학설립운동은 화려하게 시작되었지만 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열기가 식어버리고 말았다. 을축년대홍수를 비롯하여 연이은 재해도 열기를 가라앉히는 원인이 되었다. 총독부 당국의 교묘한 방해도 여기에 한몫 거들었다. 총독부 당국은 이 운동이 조선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이 운동의 핵심이 모금인 만큼 그 성패는 조선인 자산가층의 동향에 달려있었다. 이 점은 기성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지방부의 경우 더욱 분명하였다. 문제는 이들 자산가층이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일제에 타협적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 운동에 소극적이 되었다. 또한 청년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세력들의 동향도 문제였다. 이들은 당시 물산장려운동을 부르주아적인 운동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은 이 운동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기세가 꺾이는데 영향을 미쳤다.

5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여진

이렇게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시작된 지 1년여 만에 가라앉았지만 아주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여진이 있었다. 첫 번째 여진은 1926년 3월에 있었다. 경성의 유지들은 이종린(李鍾麟), 한기악(韓基岳), 안재홍(安在鴻) 등을 대표로 뽑아 민립대학촉성운동을 다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홍성설과 이갑성(李甲成) 두 사람이 이를 위한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 운동 역시 총독부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1932년 민립대학기성회의 회금보관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김성수는 대학 설립을 시도하다가 총독부의 인가를 얻지 못하자 대신 이 학교를 인수한 것이었다. 1932년 10월에 발행된 『삼천리』에는 김성수와의 인터뷰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는 김성수에게 이 학교를 민립대학로 발전시킬 것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37년 동아일보에는 보성전문학교에서 석조 도서관을 건립할 때 김제 지역의 주민들이 15년 전 민립대학설립운동 당시 모아두었던 돈을 기부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고 있다. 이렇게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조선인에게 민립대학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이 학교에서도 늘 대학 승격을 추진하였지만 끝내 총독부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결국 민립대학 설립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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