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근대
  •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만 천하에 알리다

1905년(고종 42)

시일야방성대곡 대표 이미지

“시일야방성대곡” 논설(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국립중앙도서관

1 국권회복운동의 신호탄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논설이 실렸다. 이 논설은 사장인 장지연이 직접 지었다. 제목은 ‘오늘을 목 놓아 통곡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요한 것을 맹렬히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논설을 신호탄으로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항쟁 등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적인 운동들도 모두 이 글 한편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2 을사늑약, 어떻게 체결되었나

당시 『황성신문』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이란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이로써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과정 전체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약 1주일 뒤인 11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도 거의 그대로 전재되었다. 이 무렵 『황성신문』은 이미 정간된 상태였으므로 미처 못 읽은 사람을 위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다시 보도한 것이다.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을사늑약에 대해 기록할 때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장지연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 받을 때 논설은 자신이 썼지만 보도기사는 성낙영의 취재에 의한 것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성낙영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1889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5년 12월 사관양성소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5월 양성소를 그만둔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는 1898년 9월 황성신문사에 사무원으로 입사하여 9년 동안 근무하였다. 성낙영이 취재만 하고 기사는 장지연이 쓴 것인지 아니면 그가 기사까지 직접 작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보도 내용이 매우 구체적인 점으로 미루어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인물로부터 직접 취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의 내용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특파대사로 임명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1905년 11월 10일 오후 7시 경부철도 편으로 서울에 들어와 손탁호텔에 여장을 푸는 것으로부터 사건은 시작되었다. 이토는 11일 자정 고종을 만나 일왕의 친서를 바쳤는데 이 친서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 대사를 보내니 대사의 지휘에 따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토는 이때까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14일 오후 3시 고종을 다시 알현하면서 비로소 외교권 위탁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3대 조건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고종은 사안이 중대하여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이를 받아들이면 망국과 마찬가지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양측이 한차례 탐색전을 주고받은 셈이었다. 이토는 이때 결론을 내지 못했으며 16일에는 참정 이하 각 대신을 대사관으로 초청하여 3대 조건을 제시하였지만 대신들도 모두 반대하였다.

이러한 팽팽한 대치상태가 깨진 것은 17일에 있었던 어전회의였다. 이날 오후 2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가 대신들을 공사관으로 초청하여 어전회의를 열어 이 자리에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대신들이 입궐하여 어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일본군이 경운궁에 투입되어 회의가 열리고 있는 수옥헌 주위를 물샐 틈 없이 포위하였다.

이토가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대장과 함께 입궐하여 대신들에게 3대 조건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참정대신 한규설이 극구 반대하자 그를 끌어내어 작은 방에 감금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법부대신 이하영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대신이 찬성으로 돌아섰다. 결국 박제순이 외부대신의 도장을 조약문에 날인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때의 시각이 18일 새벽 2시로 장장 12시간에 걸친 실랑이 끝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것이다.

3 시일야방성대곡

11월 18일 날이 밝고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시내는 속으로부터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각 학교의 학생들은 통곡하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각 관청의 관원들도 사무를 전폐하다시피 하였다. 하지만 일본 군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들고 일어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장지연도 황성신문사에서 사원들과 함께 분개하고 있었다. 신문의 사명은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는 것인데 당시에는 일제가 신문에 대해 엄격히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보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이를 폭로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이 한국과 일본이 의견이 일치되어 이 협정을 체결했다고 천하를 속일 것이므로 목숨을 걸고라도 그 전말을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직접 이 논설을 썼으며 밤새워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매수의 신문을 인쇄하여 이른 새벽 집집마다 돌린 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시일야방성대곡의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여태까지 이토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주장했던 동양평화론과 동양삼국연대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믿음을 헌신짝같이 저버렸다는 것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명분으로 동양평화론 또는 아시아연대론을 내세운 바 있다. 러일 전쟁은 서양세력의 침략에 맞서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며 아시아 삼국이 힘을 합쳐 러시아를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당연히 그러한 아시아연대의 맹주라는 것이다.

러일 전쟁 발발 초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많이 넘어간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일본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장지연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일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토를 동양평화의 영웅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 논설에 도입부에 나오는 이토에 대한 실망감은 단순한 의례적 표현이 아니라 그야말로 그의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논설은 이어서 이 조약이 한국뿐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하여 그것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요하면서도 온갖 감언이설을 총동원하였는데 이 논설에서는 조약 자체가 갖고 있는 침략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또한 이 논설은 고종이 강경한 자세로 이 조약에 대한 재가를 거부하였음을 못박았다. 고종의 재가 여부는 추후 을사늑약의 국제법적 유효성 문제와 관련된 예민한 논점이 되었는데 이 논설은 당시부터 이러한 논점을 정확히 짚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논설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을사늑약에 찬성한 다섯 대신(을사오적)에 대한 비판으로 채우고 있다. 전체 분량 가운데 절반 이상을 여기에 할당했다. 조약문에 직접 도장을 찍은 외부대신 박제순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끝까지 거부하여 연금까지 된 참정대신 한규설도 비판의 칼날을 면할 수 없었다. 과거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처럼 자결을 하지 않고 무슨 낯짝으로 황제와 동포를 대하려 하는가라고 신랄하게 공격한 것이다.

4 시일야방성대곡이 가져온 파장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된 신문이 배포된 11월 20일 오전 6시 30분 경찰대가 황성신문사에 들이닥쳤다. 신문사를 압수 수색한 결과 인쇄된 신문 가운데 800부가 이미 서울 시내에 배포된 사실을 확인하고 지방에 배부하려던 2,280부를 압수하였다. 또한 인쇄기계 전부를 폐쇄 봉인하는 한편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직원을 모두 체포하였다.

11월 20일부로 『황성신문』에는 무기정간령이 내려져 언제 다시 신문을 찍을 수 있을지 모를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킨 이유로는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아 치안을 방해했다는 것을 들었다. 구속된 장지연 본인도 항변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서도 어떠한 죄목으로 구속했느냐고 비판하였다. 일제는 치안방해 이외에는 특별한 죄목을 들이대지 못한 채 감금해 놓았다.

이 논설을 지은 장지연은 경상도 상주 출신의 시골 선비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짓는 것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 덕택에 대한 제국 시기 사례소에 발탁되어 『대한예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1899년 시사총보의 주필로 언론계에 처음 등장하였다. 1901년에는 『황성신문』의 제2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논설 때문에 『황성신문』이 무기한 정간되면서 그도 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듬해 1월말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때 장지연과 함께 풀려난 사람은 8명 더 있었다. 이 가운데 안병찬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경운궁으로 달려가서 상소를 올렸다. 이설과 김복한은 과거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설의 경우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할 때에도 이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인 바 있다. 이들은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다가 체포되었다. 최재학, 전석준, 김인집, 신상민 등 4명은 모두 평양 출신의 청년들로 대안문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이들이 시위운동을 꾸밀 때 거점 노릇을 했던 곳이 바로 상동교회였다. 오주혁은 1904년 한일의정서를 반대하는 통문을 돌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바 있는 인물로 이번에는 일본공사를 모욕한 죄목으로 구금되어 있었다. 이렇게 장지연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과 함께 구금되어 있다가 풀려난 것이다.

장지연이 감옥에 갇혀있을 당시 바깥에서는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을사늑약 반대 운동은 원로 대신인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심상훈 등의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각계 각층의 상소로 이어졌으며 조병세와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였다. 학부주사 이상철, 상등병 김봉학, 전 참정 홍만식, 경연관 송병선 등도 연이어 순절하였다. 상업회의소의 결의로 육의전을 비롯한 상가는 철시하였고 각급 학교도 동맹휴학을 하였다. 기산도 등은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을사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렇게 을사늑약은 거족적인 저항운동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촉매제가 된 것이 바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의 신문논설이었다. 그리고 이를 시발점으로 개화지식인들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지방의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들은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논설을 지은 장지연도 1906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의 길에 나섰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