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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관

조선의 역사는 정체되었고 타율적이다

1925년

식민사관 대표 이미지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조선사』와 청구학회에서 발간한 『청구학총』

1 개요

‘식민사관’은 19세기 후반 이래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과 조선으로 침략을 단행하고 이 지역을 식민지·반식민지로 통치 및 간섭하면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침략지에 대한 부정적인 역사상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렇게 침략지에 대한 조사·연구 및 이를 기반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 낸 것은 일본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는 일본이 식민지배를 위해 한국사를 어떻게 그려내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겠다.

2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연구와 역사학

19세기 이래 서구 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으로의 침략을 가속화하며 이 지역의 대부분을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로 만들어 자신들의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확대하였다. 서구에 의한 침략 이전 아시아의 변방에 위치한 일본 역시 서구에 의해 개항을 당하였지만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관철해 나아가고, 서구 제국을 모방·학습하면서 주변으로의 침략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넓혔으며, 조선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벌인 청일전쟁의 결과 1895년에 대만을 식민지로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륙으로의 침략을 지속하며 1910년에는 조선마저도 강제로 차지하였다.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은 정치·경제적인 영역에서 시작되지만 곧이어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낯선 지역으로의 침략과 식민지화를 위해서는 이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침략과 통치를 위해서는 식민지에 대한 인구, 기후, 지리적 특성, 토지를 비롯한 각종 자원에 대한 현황, 풍습과 습관, 사회적 상황 등을 파악해야만 했고, 이를 위한 조사과정에서 식민지에 대한 각종 정보들이 축적되었다. 서구 제국에서는 이미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이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 제도화되어 있었으며, 이들 학문은 침략과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서구 제국이 구축하였던 근대적 분과 학문들은 침략지에 이식되며 식민지 권력기구가 축적한 지식과 정보들을 바탕으로 식민지 사회를 연구하며 식민지 사회에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비서구 피식민 지역은 서구적 기준에 따라 열등한 지역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고, 서구의 지배는 당연시되었다. 즉 제국의 침략과 통치는 식민지를 발전시킨다는 것으로, 근대 ‘문명’의 관점에서 식민지를 ‘야만’으로 정의하며 식민통치를 ‘문명개화’, ‘계몽’이라고 정당화·미화했던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를 연구하는 역사학은 식민지의 과거를 제국의 입장에서 정리하여 제국의 침략을 감추고 미화하는 데에 최상의 학문이었다. 제국은 자신들이 침략하여 식민지·반식민지로 전락시킨 아시아·아프리카를 상대로 식민지화의 원인은 제국의 침략이 아니라 식민지화된 사회의 내부에 있다고 강변하였다. 즉 식민지로 전락한 사회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이 없는 정체된 상태 혹은 거듭된 퇴보의 과정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는 식민지화된 사회는 스스로 근대 문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화는 제국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그 사회의 역사적 귀결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지배는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었던 사회에게 근대화의 계기이자 근대적인 법과 제도의 이식 과정으로서 설명되었다.

이처럼 식민지에서 제국에 의한 역사학의 성립·확산은 아시아·아프리카 사회의 식민지·반식민지화를 그 사회의 ‘역사적 숙명’으로 고착화하는 것이자 식민지에 대한 제국의 차별을 식민지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제국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에 대한 역사상(歷史像)을 보통 ‘식민사관’이라고 통칭하며,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제국 일본 역시 조선을 비롯한 침략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각종 기관을 만들어 전문적인 학자와 연구들을 양산하였다. 일제의 당시 연구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조선의 역사를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려내어 조선이 식민지화된 원인을 자신들의 침략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과정에서 도출하였다.

3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과 한국사 왜곡

1853년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의 내항과 개국, 뒤이어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개혁을 거치며 일본은 제국으로 거듭났다. 서구의 압력 속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서구를 배우면서 급속하게 진행된 일본의 근대화는 제국주의화와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학문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근대적인 분과학문들, 특히 근대 역사학의 성립은 조선과 같은 주변 침략지에 대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의 성립과정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 개혁이라고 이야기되는 메이지 유신은 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천황’(이하 ‘일왕’)에게 통치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를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는 과정이었다. 이에 따라 일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 역사편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위해 국가 공식 역사편찬기구로서 1869년 3월 ‘사료편집 국사교정국’(史料編輯 國史校正局)이 창설되었다. 이후 국사교정국은 인선을 비롯한 사업의 주도권과 진행 방식, 최종 역사편찬물의 형태, 일본 정부의 직제 개정 등과 맞물려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러한 가운데 1886년 제국대학(현재의 도쿄대학)의 개교는 일본 근대 역사학의 전개와 일본 정부 공식 역사편찬에 있어 획기적 사건이었다. 제국대학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편찬을 담당하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그 출신들이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식민사학’의 전개와 확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895년 제국대학 문과대학 내에 ‘사료편찬괘’(史料編纂掛)가 설치되며(1929년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로 개칭), 사료를 수집하여 편년에 따른 사료집 편찬이라는 사업 목표가 확정됨에 따라 『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와 『대일본고문서(大日本古文書)』가 간행되었다. 이러한 사업 방침은 이후 대만과 조선과 같은 일본의 식민지에서도 반복되었으며, 일본에서 역사편찬에 관여했던 이들은 대만과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한 역사편찬 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이렇게 역사연구를 위한 사료 수집이 이루어지는 한편 일본의 대륙 침략이 전개되면서 제국대학의 교수와 학생으로 대변되는 아카데미즘의 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조선에 자주 왕래하는 언론인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조선의 역사에 대한 많은 언급과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이러한 저술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은 침략이 아니며 조선의 멸망은 침략 때문이 아닌 조선의 역사적 결과라고 강변하였다.

당시 이러한 책자에서는 자신들의 침략을 옹호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의 인종적·역사적 관련성을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같은 논의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또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일선동원론(日鮮同源論), 일선동역론(日鮮同域論)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제국이 자신들이 침략한 곳에 대하여 인종적인 근친성과 역사적 관련성을 강조하는 것은 서구 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아시아·아프리카를 통틀어 유일하게 제국화하여 같은 황인종이자 한자문화권인 주변국을 침략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특수성이라고 하겠다. 일본에서 조선과의 역사적 관련성을 이야기한 것은 에도시대(江戶]時代)에도 있었다. 18세기 이래로 『고지키(古事記)』·『니혼쇼키(日本書紀)』와 같은 일본 역사서의 기재 내용을 검토하는 가운데 역사적으로 먼 과거부터 이루어진 조선과 일본의 인적·물적·문화적 교류를 추정하였으며, 일본의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조선의 영향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침략과 함께 주장된 일선동조론은 조선을 침략하는 논리로 작용하였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이다. 당시 일본의 학자들은 고대 낙동강 일대인 임나지역에 일본정부가 ‘일본부’를 두어 통치했다고 주장하여 인종적·역사적 관련성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조선과 일본은 하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제국대학의 교수들 뿐 아니라 조선으로의 침략과 함께 조선과 일본의 인종적·역사적 관련성을 강조하는 논의는 확대되고 있었으며, 이는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으로의 침략이 본격화할 즈음인 1890년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교수였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호시노 히사시(星野恒), 시게노 야쓰츠쿠(重野安繹) 3인은 『국사안(國史眼)』이라는 책을 공동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발간된 이후 중고등학생용 일본사 교과서 저술의 저본이 되어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일선동조론에 입각하여 조선과의 혈연적 근친성과 역사적·문화적 밀접성을 주장하여 조선에 대한 관심을 환기함은 물론 침략을 합리화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학자들은 이후 1910년을 즈음해서는 강점을 ‘복고’ 내지 ‘태고로의 복귀’라고 강변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1919년 3·1 운동과 같은 제국의 위기 상황이 전개될 당시에도 제국의 팽창을 주장·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였다. 대표적인 일선동조론자라고 할 수 있는 키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3·1 운동 직후인 1921년, 조선과 일본만이 조선민족의 기원을 만주에서 찾으며 민족적으로 만주까지를 하나의 영역으로 설정하며 제국의 팽창을 설파하기도 하였으며, 강점을 전후하여 수차례 조선을 직접 답사하며 인종과 무속을 조사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3·1 운동이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것이었다면서 조선과 일본은 원래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한일병합이 민족자결임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일선동조론은 학문적 영역을 벗어나 일본 제국의 침략을 옹호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을 부정하는 논의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일본 제국의 침략이 아닌 한국사의 역사적 귀결이라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바로 만선사관(滿鮮史觀), 타율성론(他律性論), 정체성론(停滯性論), 당파성론(黨派性論)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의 승리로 만주일대의 철도 부설권과 넓은 부속지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이를 수행하기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08년에는 그 산하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滿鮮歷史地理調査室)을 두어 만주와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연구에 착수하며, 이른바 ‘만선사’(滿鮮史)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동양사학의 창시자로서 거론되는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을 설득하여 설치한 이 만철역사지리조사실은 대표적인 만선사학자인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를 비롯한 당시 일본학계에서 촉망받는 수재들을 모아 『만주역사지리(滿洲歷史地理)』,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를 발간했으며, 이후 1915년에는 기구를 도쿄제국대학으로 이관하여 연구를 지속하며 『만선역사지리연구보고(滿鮮歷史地理硏究報告)』라는 이름의 책을 16권 간행하였다. 이들에 의해 구축된 만선사는 조선과 일본의 인종적·역사적 관련성을 강조했던 일선동조론적인 시각과 그 입론은 다르지만 조선의 식민지화는 조선의 역사적 전개상 당연하다는 시각에 입각해 있다. 만선사관은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역사단위로 뭉뚱그려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조선을 구성한 민족의 대부분은 만주 지방에서 연원하며, 이후 역사적 전개를 살펴볼 때 조선의 역사는 정치적·경제적으로 만주와 따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기본적으로 한국사의 특징을 정체와 타율에 두고 있다. 즉 한국의 역사는 정체되어 스스로 변화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변화하였으며, 그 자극은 대부분 대륙인 만주에서 연원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을 시찰한 학자들이나 관료들 역시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하여 식민지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선의 역사를 통해 설명하는 저술을 발표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제학자인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가 발표한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이다. 이는 1902년 수일간 조선을 여행하고 나서 쓴 논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서양과 같은 봉건제가 일본에는 나타나지만 조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며, 한국사에는 봉건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10세기 정도의 역사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봉건제 결여를 주장하며 한국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정체성을 꼽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강점 이후, 특히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경제사학자들이나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체성론과 함께 조선의 식민지화를 설명하는 주요한 방식은 정쟁 또는 당쟁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파성론으로 이야기되는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말부터 제기되어 왔는데, 그 정리·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대한제국 정부의 학정참여관(學政參與官)으로 조선에 부임했던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가 1907년에 저술한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였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시데하라는 통감부 설치 이래 조선의 교육행정에 간섭하면서 조선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알아야 한다며 그 키워드로 ‘정쟁(政爭)’ 즉 당쟁을 상정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정쟁의 경과를 ‘동서분쟁(동인과 서인의 분쟁)’과 ‘노소분쟁(노론과 소론의 분쟁)’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조선의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고질병’, ‘참화’와 같은 부정적인 용어와 연결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정치인들이 개인적 이득과 권력 독점을 위해 당을 이루어 정쟁을 일삼았으며, 이러한 정쟁은 세대를 계속하여 지속했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 역시 곤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역사를 정체, 당쟁으로 설명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근대화의 내적 동기를 부정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외부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타율성과 연결되었다. 따라서 이런 논리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옹호할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쟁만 일삼던 구폐를 일소한, 인민을 위한 선정이자 근대화의 계기로서 옹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관에 입각한 식민지 조선의 역사편찬은 강점과 함께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하며 더욱 강화되었다.

4 병합 이후 식민사관의 전개

강점 이후 식민통치의 최고 기관으로 설립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각종 자료를 조사·수집하고 그 역사를 연구하여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한편 통치를 위한 자료로 삼고자 하였다. 이 사업은 1915년부터 중추원에서 담당하게 되는데. 이즈음부터 조선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편찬·서술이 개시되었다. 바로 중추원에서 담당하게 된 『조선반도사(朝鮮半島史)』 편찬사업이 그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여 조선과 일본은 동족(同族)이지만, 조선의 역사는 계속된 정치적 혼란으로 어지러워 조선의 백성들이 피폐해졌다는 사항을 기술할 것이 명시된 이 사업은 1918년 중추원 내에 편찬과가 설치되고 도쿄제국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조선총독부 학무부에서 근무하던 오다 쇼고(小田省吾)가 편찬과장으로 부임하며 활기를 띄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역사 연구열이 강화되고, 나라의 시조인 국조로서 단군(檀君)에 대한 인식이 상식화하며 시의성을 잃게 되는 한편 역사서술에 필수적인 사료 수집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중단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1922년 새로운 역사편찬사업을 위해 ‘조선사편찬위원회’ 를 조직하였으며, 1925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로 조직을 상설화하고 확대·개편하여, 향후 사료의 수집과 편찬을 주도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역사연구를 위한 사료를 수집·정리해 『조선사(朝鮮史)』 편찬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러한 사업 방식은 일본 정부의 역사편찬 방식을 이식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에서는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일본에서 역사편찬사업에 오랫동안 종사하고 사업을 총괄하였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를 기용하여 사업에 대한 전권을 맡겼다. 구로이타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조직하는 한편 만선역사지리조사부에서 만선사를 체계화했던 이나바 이와키치,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에서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도쿄제국대학 재직 당시 자신의 제자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와 역시 도쿄제국대학 출신으로 조선사에 관심을 보인 나카무라 히데타카(中村榮孝)를 기용하여 사업을 전개하였다. 조선 각지에 대한 사료를 조사·정리하는 가운데 1931년 『조선사』 제1권을 간행한 이래 1938년까지, 사업 개시 이후 장장 18년에 걸친 사업의 결과 35권에 달하는 『조선사』 가 간행되었음은 물론 한국사 연구에 주요한 사료 특히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임진왜란과 관계된 사료를 중심으로 20종의 사료와 고문서를 『조선사료총간』, 『조선사료집진』이라는 이름으로 공간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사편수회의 사업은 사료의 수집·정리 및 공간이었지만 이는 역사연구의 기반이 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주로 일본인 연구자들이 관심있어 하던 부분과 조선사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데에 적합한 사료들을 선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사편수회는 당시 일본의 연구자들을 키워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사편수회 설립 초기부터 관여했던 쓰에마스나 나카무라는 물론 도쿄제국대학 졸업 직후 편수회에 부임해 사무를 담당했던 마루가메 킨사쿠(丸亀金作), 스도 요시유키(周藤吉之), 구로다 쇼조(黑田省三)나 경성제국대학 졸업이후 편수회에 근무한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등의 인물은 1945년 이후에도 일본의 동양사학계 특히 조선사 연구를 주도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이들이 본격적인 연구자로서 첫 발을 띄고 연구를 개시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사료를 수집·공간하는 동안,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한데 이어 1926년 법문학부가 개설되어 조선사강좌 2개가 마련되어 조선사 연구를 심화했다. 나아가 경성제국대학 교수 및 총독부의 주요 관료, 일본인으로서 조선에 부임해 온 교사 등이 조선사의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각종 학회를 조직하여 여러 연구발표회 및 대중을 대상으로 한 조선사 강좌 등을 개설하며 식민사학을 심화·보급하였다. 특히 1930년 경성제대 교수, 조선사편수회원 및 조선총독부 관리 등 식민통치기구의 학자와 관료들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청구학회(靑丘學會)는 학술지로서 『청구학총(靑丘學叢)』을 1년에 4회씩 총 30호까지 발간하며 식민사학의 심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학회에서 진행한 강좌와 발간된 연구물을 보면 일선동조론에 입각하여 조선과 일본의 밀접한 관련성을 주장한다거나 조선의 역사에서 중국의 영향, 계속된 정치적 분란 등을 강조하여 식민지화의 필연성을 강변하고 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전쟁에 돌입한 이래 전선이 확대되며 식민지 조선사회 역시 전쟁 수행을 위해 재편될 즈음부터는 일말이라도 유지되던 학문적 측면은 사라지고 ‘연구보국(硏究報國)’이라는 표어 아래 조선과 일본의 일체성, 조선의 역사와 대륙의 관련성이 노골적으로 강조되며 전쟁을 옹호하기에 이른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식민사관은 일본의 제국대학과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등과 같은 기관과 그곳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식민사관을 주도하던 기관은 사라지거나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재편되며 중단된 듯 보였다.

한국 학계는 한국사학의 정립을 위해 식민사학의 청산이 선결과제였다. 1960년 4·19 이후 민족·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1960년대 중반 이후 식민사학 청산이 화두가 된 이래로 식민사관의 문제점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었다. 식민사학의 사료전 근거가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이론적 허술함이 지적되는 가운데 내재적이고 발전론적인 입장에서 한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식민사관의 주요한 주장들은 극복되었다. 그렇지만 식민사관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는 식민통치를 통하여 조선사회를 근대화시켰다는 시혜론이 깔려 있으며, 이는 한국사회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변형되어 주장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대변되는 고구려사의 귀속을 둘러싼 중국 학계와의 역사 분쟁의 기반 역시 조선의 남부와 일본과의 친연성·일체성을 주장하면서 단군을 북방 퉁구스 민족의 전설이라면서 한국사를 남부 중심으로 보고 고구려사로 대변되는 북방의 역사를 한국사에서 떼어내어 만주사로 편입하고자 했던 식민사관의 논리가 잠재해 있어, 식민사관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정리가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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