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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실력양성운동

근대 학문과 신문화를 배워 실력을 쌓는 것이 우선이다

1920년 ~ 1935년

1 민족실력양성운동의 개념과 주도세력

일제에 의해 1905년 ‘보호국화’, 1910년 ‘한국병합’이 강제로 이루어진 이후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과 민족해방운동 내에는 여러 계열의 정치사상과 정치운동론이 존재했다. 이 중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정치사상과 운동론이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이었다. 이것은 1905~1910년 사이에는 애국계몽운동(‘자강운동론’)으로, 1910년대 실력양성론과 구사상 ·구관습 개혁론으로 나타났고,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론’으로 발전하였다가 1920년대 중반 이후 1930년대 초반 사이에는 ‘자치운동론’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들 애국계몽운동, 문화운동, 자치운동의 기저에 깔린 논리는 모두 ‘준비론’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이었으며, 그 기본 논리는 ‘선(先)실력양성 후(後)독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이란 한국민족은 아직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므로 먼저 독립할 수 있는 자체 역량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실력이 갖추어지게 되면 독립의 기회는 저절로 오게 된다든가, 혹은 전쟁 등 국제정세의 변화로 인해 독립 기회가 오더라도 독립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 때 비로소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이러한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의 주체는 주로 1905년 이후 1910년대 말까지 국내외, 특히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은 신지식층들이었다.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 문명에 압도되고, 서구의 부르주아적 문화의 세례를 받은 계층으로, 이제 한국도 그러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건설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신지식층들은 실력양성의 구체적 방법으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 즉 신교육의 보급과 민족자본의 육성을 제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구사상 ·구관습의 개혁을 통한 신문화 건설을 제시하였다.

신지식층은 한말 특히 1906년 이후 191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고 성장한 계층이다. 1906년 이후 국내에서의 신교육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사립학교는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한 때 3, 4천 개교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 사립학교는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에 의해 그 수가 줄어들긴 했으나 1910년 10월 말 전국의 사립학교 수는 2,229개교였고, 보통학교 급이 2,222개교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당시 학교들은 대부분 아직 초등교육 내지는 중등교육 정도의 교육기관이었고, ‘지식층’이라 불릴 만한 학생을 배출하는 고등교육기관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1915년 현재 공립보통학교 수는 340여개로 3배 정도 늘었지만 사립학교는 절반 정도로 줄었다. 고등교육기관도 전문학교 수준으로 경제, 법률, 의학, 공업, 농업 등 실용적인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이 시기 총독부의 한국인 교육정책은 한국인을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만들기 위한 보통교육과 하급 실무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실업교육의 장려, 반일의식 고취의 온상인 사립학교 교육 단속 등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고등교육을 받고자 하는 청년들은 일본이나 미국, 중국 등으로 유학을 갈 수 밖에 없었다.

한말 이후 1910년대까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유학한 곳은 일본이었다. 1910년대 일본 유학생 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던 학생들은 자신들이 한국의 장래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면학을 통해 각자의 실력을 기르는데 열중해야 한다는 ‘실력주의’를 제창했다. 자기 자신들의 ‘도도히 흘러가는 암흑의 사회를 구제하고 신문명을 개발하여 이를 유지하며 이를 전진케 할 책임’을 지고 있다면서, 이러한 중대한 책임을 다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면 충분한 용의와 다대한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은 각자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그러면 당시 국내 신지식층은 어떠했을까. 비록 국내에서 신지식층이 형성되는 길은 거의 차단되어 있었지만, 한말 계몽운동기부터 참여했던 신지식층, 혹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식층이 늘어감에 따라 국내에서도 신지식층이 하나의 계층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 무단통치 하에서 활동 폭은 극히 좁았다.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나 기독교, 천도교 등의 종교기관에 근거를 두고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10년대 후반 일본 유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신교육’을 받은 ‘신지식층’이 다수 등장했고, 이들은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실현함으로써 국권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근대자본주의 문명의 막강한 힘을 경험한 상황에서 실력 양성 없이 자강과 자주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20세기 초반 한국 지식인층에게는 당연했다. 1907년 안창호(安昌鎬), 양기탁(梁起鐸), 이갑(李甲), 이동휘(李東輝)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민회(新民會) 역시 민족실력양성운동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은 경제와 교육 부문의 실력 양성뿐만 아니라 독립전쟁을 할 수 있는 무력에 대한 준비와 공화주의라는 정치적 개혁도 함께 도모했다. 이들에게 실력양성은 국권회복을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이것이 1910년대 이후 타협적 민족주의자의 실력양성론과 달리 비타협적 독립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2 1910년대 실력양성론과 구사상, 구관습 개혁론

일제는 1910년대 ‘문명개화’를 표방하면서 산업개발, 문명교육의 보급, 민풍개선 등 각종 통치정책을 구사했다. 1910년대 총독부의 산업개발정책은 농사개량, 농사지식 보급, 부업 장려, 상공업 발달과 산업 발전에 도움을 줄 교통 운수시설의 완비, 도로 항만 수축 등이었다. 이처럼 ‘식산흥업’을 통한 식민지 조선의 발전을 표방했지만, 그 본질은 일본 자본주의 상품시장과 원료 확보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한국인들의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그 성장을 억지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총독부는 보다 효율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각종 사회정책을 구사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민풍개선정책’이었다. 그것은 소위 ‘교풍회(矯風會)’로부터 시작되었다. 총독부가 ‘민풍 개선’에 주목한 것은 지방사회에서 ‘산업개발’에 지방민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 ‘산업개발’과 ‘민풍개선’과 같은 총독부 식민정책은 1910년대 실력양성론과 통할 수 있는 점이 있었다.

1910년대 실력양성론은 교육과 산업진흥론으로 구성되었다. 교육진흥론에서는 특히 실업교육과 과학교육이 강조되었는데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의 교육론과 비교해 보면 실업교육이 강조된 점은 같으나, 국가의식이나 민족혼을 강조하는 교육론은 소홀히 되고 있었다. 반면 산업진흥론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 한국인들에 의한 농업, 상업, 공업의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서 사회의식·사회관습의 개혁, 실업교육·과학교육의 장려, 자본의 집적 등을 제시했다. 이러한 산업진흥론은 1915년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稧) 설립운동이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곧 해산당했다.

1910년대 구사상 ·구관습 개혁론은 위의 실력양성론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 즉 실력양성론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산업진흥론과 이를 위한 신교육 보급론이었다면, 구사상 ·구관습 개혁론은 그러한 산업과 교육의 진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사상적, 사회적 여건의 조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구사상에 대한 비판은 주로 유교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들은 유교 자체가 오늘날의 시대에 맞지 않는 사상이며, 조선의 유교는 특히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한 빨리 유교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점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론자들의 다수가 신구학(新舊學)을 절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1910년대 실력양성론을 주도했던 신지식층들이 유교를 버리고 대신 가져야 할 사상으로 제시한 것은 서양의 신사상이었다. 그것은 개인주의, 과학주의, 산업진흥론 등 주로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사상과 가치관을 의미했다. 한편 구관습에 대한 비판은 주로 양반제도 같은 계급제도, 조혼 같은 혼인제도, 분묘 같은 조상숭배 사업 등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런데 1910년대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은 민원식(閔元植), 유만겸(兪萬兼), 이광수(李光秀) 등 친일지식인들이 총독부의 식민정책에 호응하며 “일본 천황의 지배 하에서 일본인과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갖기 위해 일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실력을 양성하자”고 주장하는 ‘동화주의적 실력양성론’과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1910년대 신지식층의 실력양성론과 구사상 ·구관습 개혁론은 이 시기 무단통치 하 집회,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실행에 옮겨지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반 소위 ‘문화운동’ 시기였다.

3 1920년대 문화운동론

3.1운동 이후 상당기간 국내외에서는 ‘절대독립론(무장투쟁론)’ ‘외교독립론’이 제창되면서 독립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지만, 이러한 운동론은 미국 등 서구열강의 한국독립에 대한 지원을 기대한 것이었다. 즉 한국의 신지식인층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한 시기, 정의(正義) 인도(人道)의 원칙하에 세계 개조(改造)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고 민족 자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열강의 냉담한 반응 속에서 1920년 하반기 미하원의원단의 방한, 1921년 말 태평양회의(일명 워싱턴회의)에서 외교운동의 좌절 등 민족 자결 운동이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하게 되자 다시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부활하였다. 당분간 독립은 절망적이므로 교육과 산업의 진흥 등 실력양성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 즉 ‘선실력양성론’․‘준비론’이 강력하게 대두된 것이다.

한편 총독부는 3·1 운동 이후 일본 자본주의의 본격적 진출과 한국인 부르주아의 일정한 육성을 위해 회사령을 철폐했다. 이에 따라 1919년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 각종 회사설립 열풍이 일어났다. 비록 대부분이 중소규모의 자본에 불과했지만 일정하게 ‘민족자본가’라고 부를 수 있는 계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소자본이며 부족한 기술과 인력으로 일본 자본주의의 물결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 폐업이나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이들은 총독부에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호소했지만, 총독부는 이를 거부하고 식민지적 산업정책을 재확인했다. 이에 민족자본가들은 더 이상 총독부에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실력양성론’을 앞세우며 ‘민족자본 보호’를 민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은 신문화건설·실력양성론, 정신개조·민족개조론을 그 이론적 기초로 삼고 있었다. 문화운동 초기에 제창된 ‘신문화건설론’은 세계 개조의 시대적 기운에 부응하여 조선에서도 신문화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현대적 문명의 수립’이라는 막연한 표현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그 내용은 사회적 측면에서 봉건적 잔재의 청산, 경제적 측면에서 낙후된 생산력의 증진 등 자본주의적 문명의 수립을 뜻하는 것으로 분명해져갔다. 현대적 문명의 수립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교육과 실업의 발달, 구습의 개량 등이었다. 특히 『동아일보』는 창간 시부터 문화운동을 주창했는데, 그것은 실력양성론의 시각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우리 조선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할지니 실업이나 교육이나 기타 사회적 만반 경영에 개인 개인이 하지 말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서로 협력하며 연락”하자는 민족통합을 주장했다. 경제 발달, 교육 확장, 사회악습 개량을 행하고, 사회 각 방면의 실력양성을 통해 문화의 행복과 민족의 사명을 이루는 것을 민족운동의 사회적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정신개조 민족개조론’은 이 시기 전래된 ‘문화주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 신문화 건설을 위해서는 먼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능력발전과 인격향상이 선결과제이며 그러한 개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개인 개조, 특히 ‘내적인 정신개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개조론’은 1922년경에 이르러 ‘민족개조론’으로 발전한다. 나타났다. 1920년대 초 민족개조론은 『동아일보』의 송진우(宋鎭禹), 『개벽』의 이돈화(李敦化)와 김기전(金起田), 현상윤(玄相允), 이광수 등에 의해 제창되었다. 특히 이광수는 1922년 5월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이란 논문을 발표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전개된 1920년대 초반의 문화운동은 크게 청년회운동, 교육진흥운동(민립 대학 설립 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물산장려운동(物產獎勵運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 1919년 말부터 신문화건설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한 청년회 운동은 지 ·덕 ·체의 함양 등 인격 수양과 풍속개량, 실업 장려, 공공사업 지원 등을 그 목적으로 설립되어 강연회, 토론회, 야학강습회, 운동회 등을 주요 사업을 설정했다. 이 운동은 1920년 말 조선청년회연합회 결성으로 발전하여 구습 개혁, 인격수양, 지식 교환, 산업 진흥, 세계문화 공헌 등을 내세웠지만 철저히 비정치적 수양단체를 표방했다.

일제 총독부는 이러한 문화운동의 대두에 대해 ‘독립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민족실력양성운동’이라 파악했지만,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문화적 방법’에 의한 운동으로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을 환영했다. 이 문화운동을 체제 내적인 운동, 더 나아가서는 동화주의를 지향하는 친일어용적인 운동으로 유도하고자 하였다. 총독부의 이러한 의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청년회 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 대학 운동, 민족개조론 등은 모두 스스로 비정치성을 표방했으며, 1924년에는 마침내 자치운동이 출현하게 되었다.

4 자치운동으로의 전환과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의 한계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자치운동은 이미 1910년대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거론되었고, 국내에서는 3·1 운동 전후 일부 상층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추진 움직임도 있었다. 그들은 자력에 의한 독립 획득과 유지는 역량 상 불가능하다고 보고 일제의 지배 하에서 자치권을 획득하려는 운동을 구상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저 하에 1923년 하반기 경제적 문화적 민족실력양성운동인 문화운동이 벽에 부딪치자 이제 ‘정치적 측면에서의 민족실력양성운동’으로서 자치운동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1923년 들어 『동아일보』는 ‘민족적 기치하의 대단결’․‘민족적 중심세력 결집’ 등을 주장화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중심세력 결성의 필요성은 대체로 ‘인민의 생명 재산 보호’․‘폐정 개혁’ 등 조선민족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정치상의 유력한 발언권’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치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낸 것은 1924년 1월 2일~4일자 사설 ‘민족적 경륜’이었다.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 이 결사로 하여금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장래 구원한 정치운동의 기초를 만들게 할 것”을 제창했다. 이에 대한 일반의 반응은 매우 비판적이었고, 반발이 거세지자 해명하는 글을 내기에 이르렀지만, 자치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치운동론은 “현재로서는 독립이 불가능하므로 독립의 기회에 대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준비론, “독립에 도달하는 한 단계로서 자치권을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단계적 운동론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의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을 정치적 측면까지 확장시킨 것으로, 이제 민족실력양성운동은 타협주의 운동으로 전락했다. 당시 민족자본 상층에서도 특히 총독부 권력 하에 예속화하고 있던 대자본가와 그들을 대변하는 타협주의자들은 경제적 문화적 민족실력양성운동도 한계에 부딪치고 독립의 전망도 요원하다고 느꼈을 때 최소한의 정치권력이라도 획득하여 자본의 존립기반을 마련하고, 정치적으로도 독립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계산 하에 자치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한편 일부 식민지배자들은 동화주의적인 한국 지배방식이 무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자치제 실시라는 방향으로 식민지배 방식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배권력 내의 조선 통치방식에 대한 균열 또한 한국인 자치론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은 한말부터 일제초기까지 신지식층들의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지식층들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며, 한국민족의 경우에도 독립할 수 있는 자체역량이 없다면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 자체역량이란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수립을 의미했고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 민족은 열등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논리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주의 이론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이것이 한국인들에 침투하여 내재화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은 19세기 후반 이래 일정한 성장을 보이고 있던 신흥 상공인계층과 근대적 자본가로의 전환을 지향한 일부 지주계층이 가지고 있던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욕구와도 관련을 갖고 있었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민족자본의 성장이란 제국주의자들이 부여하는 가능성과 제약성 틈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에 경제적으로 ‘자립적 발전’과 ‘종속적 발전’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저항’과 ‘투항’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동요’의 처지에 놓인 민족자본가들이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던 유일한 논리가 민족실력양성운동론이었다.

민족실력양성운동의 핵심이었던 문화운동은 기본적으로 ‘실력양성이라는 개량주의적 방법을 통한 독립운동’을 내세웠다. 그런데 운동이 진행되면서 ‘독립’의 목표는 점차 퇴색되어갔고 ‘자본주의 문명의 수립’이 우위를 점하면서 운동은 타협주의적 성격이 농후해졌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자치운동이 대두하였던 것이다.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대륙침략전쟁과 함께 민족자본의 존립기반은 소멸되어 갔다. 민족자본 상층은 이제 확실한 ‘종속적 발전’이냐 아니면 ‘몰락’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로써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의 존립기반은 점차 소멸되어가고, 민족실력양성운동론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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