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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총파업

일제 강점기 최대의 노동 투쟁

1929년

원산총파업 대표 이미지

원산 총파업 당시 원산노동연합회 시위 행렬

조선일보

1 파업의 시작

함경남도 원산 근처 문평에는 큰 규모의 공장이 있었다. 영국 소유 석유회사인 라이징선에서 만든 이 공장은 경성과 평양 같은 대도시는 물론 한반도 북부 일대에 공급할 석유를 저장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1928년 9월 7일 문평 제유공장에서 노동자를 총감독했던 일본인 고타마(兒玉)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했던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고타마는 평소에도 조선인 노동자를 업신여기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날은 조선인 노동자를 멸시하는 것을 넘어서 폭력까지 사용했던 것이다. 고타마의 도를 넘은 행동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폭행사건이 발생하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인 노동자 수 십 여명이 회사 측에 구타사건 해결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고 석유 운송을 담당했던 노동자들도 동맹파업을 개시했다. 점차 파업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할 무렵 원산노동연합회(이하 원산노련)도 문평 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에 합류했다. 원산노련은 파업 노동자를 대신해 구타사건을 일으킨 고타마 처벌과 조선인 노동자 처우 개선을 라이징선 회사에 요구했다. 원산노련의 요구에 파업이 장기화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라이징선 회사는 원산노련이 제시한 요구를 수용하여 3개월 이내에 해결하기로 합의 했다. 문평 제유공장 파업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2 확산되는 파업 물결

그런데 3개월 시간이라는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라이징선 회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약속과 다른 라이징선 회사의 태도에 원산노련은 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라이징선 회사는 원산노련의 항의에도 차일피일 합의 이행을 미루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라이징선 회사의 기만과 책임회피에 분노한 원산노련은 긴급 집행위원회를 열어 소속단체에 라이징선 회사 화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문평 제유공장 노동자들도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1929년 1월 14일부터 다시 파업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번엔 라이징선 회사 물품을 취급하던 운송업자들이 반발했다. 운송업자들은 라이징선 회사 화물 취급을 거부한 원산노련 노동자를 해고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노동자의 파업에 해고로 맞선 운송업자들의 대응은 다른 노동자의 반발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1929년 1월 17일과 18일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들이 대거 동정 파업에 나서면서 점차 파업 열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파업 열기가 확산되자 운송업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운송업자들은 원산경찰서에 노동쟁의를 조정해 줄 것을 부탁하는 동시에 원산상업회의소에도 조정을 부탁했다. 운송업자의 부탁을 받은 원산상업회의소(이하 원산상의)는 한층 더 강경하게 태도를 취했다. 앞으로 원산노련 소속 노동자는 일체 고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운송업자들도 원산노련과 관계를 끊을 것을 결의하며, 원산노련 소속이 아닌 노동자를 새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원산상의와 운송업자들이 적극 원산노련을 배척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원산노련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산 노련은 1929년 1월 22일 긴급위원회를 개최하고 앞으로 대응방침을 논의하고, 다음날인 23일 원산노련은 정식으로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총파업을 선언한 원산노련은 곧바로 파업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원산 대중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원산노련이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 알리자 원산상의 측도 이에 대응했다. 원산상의는 일본어 신문인 『원산매일신문』과 조선총독부 기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경성일보』, 『매일신보』 등을 통해서 파업 책임이 노동자 측의 무리한 요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사태는 원산노련과 운송업자·원산상의로 대표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결 양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3 원산노련의 파업투쟁과 국내외 호응

총파업을 선언한 원산노련은 결연한 태도를 취하며 파업투쟁을 이끌었다. 1920년대 중반 원산노련은 산하 단체의 가입금을 토대로 소비조합과 노동병원을 운영했을 만큼 탄탄한 재정을 갖추고 있었다. 원산노련은 평소에 갖춰놓은 재정을 바탕으로 미리 3개월 동안 먹을 식량을 구입하며, 파업 노동자의 생계를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원산 노련은 규찰대를 조직하여 자체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규찰대는 원산상의와 운송업자들이 인천을 통해서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불러오려는 계획을 저지하며 파업 노동자의 동요를 방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원산상의에 이번 파업에 대한 공개 연설회를 개최할 것을 제의하거나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원산 노련과 파업 노동자가 보여준 굳건한 모습에 미처 파업에 동참하지 못했던 노동자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1월 27일에는 양복을 만드는 노동자와 인쇄 노동자가 파업에 합류했고 일용직 노동자도 자유노동조합을 조직하며 원산노련에 합류했다. 심지어 1929년 2월 1일에는 조선인 노동자를 대신이 임시로 원산 부두에서 일하던 일본인 노동자도 조선인 노동자의 총파업에 동조하며 작업을 중지했다. 이제 파업은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를 아우르며 원산지역 노동자 대다수가 참여하는 파업으로 확산됐다.

한편 다른 지역 노동자들도 원산 노동자의 파업을 적극 지지했다. 전국 각지의 노동조합에서 원산노련과 파업 노동자를 위한 응원금과 지지 격문이 쏟아졌다. 또한 일본과 중국에서도 원산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 격문과 지원금이 발송됐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전해지는 지원금과지지 격문은 원산노련과 파업 노동자에게 큰 힘을 전해주다. 그만큼 원산노련과 파업 노동자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4 일제의 탄압과 자본가의 대응

원산노련과 운송업자·원산상의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원산지역의 공기도 점차 험악하게 변했다. 일제 경찰은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는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한편으로는 원산시내에서 모든 집회를 금지시키고 총 끝에 칼을 꽂고 엄중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또한 소방대와 제향군인과 같은 조직도 원산시내 치안유지에 동원되었으며 국수회(國粹會) 같은 일본인 우익단체도 원산으로 모여들어 원산노련과 파업단을 위협했다. 여기에 일본군도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일본군 제19사단 함흥보병대 병력도 훈련을 명목으로 총검으로 무장을 하고 원산 시내를 행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헌병대는 원산총파업이 발생한 전말과 경과를 세밀하게 조사하며 원산지역 동향을 주시했다. 일제 경찰과 군대는 노골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원산노련과 파업 노동자를 압박했다

1929년 1월말이 되자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일제 경찰이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1월 29일 일제 경찰은 원산노련 산하 소비조합을 수색하고 장부를 압수했고 며칠 뒤 다시 일제 경찰은 원산노련 산하 조합을 수색했다. 일제 경찰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일제 경찰이 원산노련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일제 경찰은 원산노련 집행위원장 김경식을 비롯한 주요 간부를 체포했다. 파업을 선두에서 이끌어온 원산노련 지도부가 한순간에 붕괴된 것이다. 이후에도 일제 경찰은 원산노련 회원 가정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식량과 가옥 상태를 조사하는 등 파업 노동자를 압박했다. 일제 경찰은 파업 노동자를 동요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사용했다.

한편 이 무렵 원산상의와 운송업자들도 새로운 계획을 추진했다. 원산노련을 대체하는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그들을 고용함으로써 원산노련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이계획은 곧 실체를 드러냈다. 1929년 2월 6일 원산상의가 원산노련을 대신할 새로운 노동조합 설립 필요성을 언급하자, 기다렸다는 듯 운송업자를 중심으로 어용노조인 함남노동회가 설립됐다. 함남노동회는 설립되자마자 곧바로 노동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주로 농한기에 일자리를 찾아 떠돌던 사람들이 그 대상이었다. 함남노동회는 조합이 설립된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약 400여 명의 노동자를 모집했다. 원산상의와 운송업자들은 함남노동회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게 되자 공개적으로 원산노련을 탈퇴하고 함남노동회에 가입된 사람만을 고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며 원산노련 소속 파업 노동자를 압박했다.

5 파업의 종료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와 함남노동회를 앞세운 자본가의 압박에도 원산노련과 파업 노동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파업은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시간은 어느덧 세 달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파업이 세 달 넘게 지속되자 원산노련과 파업 노동자들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몇몇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9년 4월 1일 10여 명의 노동자가 함남노동회를 습격하여, 간부와 회원을 구타했다. 2일과 3일에도 노동자들이 함남노동회원을 공격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원산노련 간부와 소속 노동자를 체포했다. 이로 인해 파업을 유지하던 힘도 크게 떨어지게 되자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던 원산노련 지도부는 4월 6일 산하 조합에 자유 복업 결정을 내렸다. 복업결정이 내려지자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원산노련을 탈퇴하고 함남노동회에 가입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소속 노동자의 이탈이 늘어나면서 원산노련의 힘도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1929년 4월 21일 원산노련 사무실마저 폐쇄됐다. 이로서 4개월여 간 지속됐던 원산총파업은 완전히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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